101.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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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진실
2022.10.20.
프시케의 초록 눈이 얼어붙었다.
“어, 어떻게 그걸……!”
하얗게 질린 그녀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으며 헬리오가 다정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과 이런 이야기를 할 순간을 기다려왔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간절한 눈빛으로.
“정말로 오래.”
헬리오가 공포에 사로잡힌 프시케에게 속삭였다.
“너는 나와 다르지 않아, 프시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죽지 않는 헬리오나 회귀하는 프시케나 똑같은 괴물이라고 그가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보다, 다른 사실에 프시케는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녀의 회귀를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당신께서 회귀하실 때마다 저 또한 무한 반복되는 그 삶을 함께 살았으니까요.”
“!”
“제가 이렇게 된 것에는 어찌 보면 당신의 덕이 크지요.”
프시케는 이제 이성적이기 힘들었다. 가슴 한편이 견딜 수 없이 아렸다.
그동안 자신의 회귀를 두고 누굴 탓해본 적도 없지만, 누군가 자신의 회귀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거라고는 더욱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가능성조차 염두에 둔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회귀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내가 처음으로 나만이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아니! 나보다 더 특별한 이가 있음을 알았을 때의 그 충격을 당신도 느끼게 해주고 싶군. 할 수만 있다면.”
“!”
“내가 가장 특별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 그때, 얼마나 절망스러웠는 줄 아십니까?”
“절망……스러웠다고?”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나인 줄 알았는데 그걸 아닌 것을 깨달았을 때.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절망.”
그게 첫 번째였다.
더 큰 절망은 따로 있었다.
“본래도 너무 오래 살아서 삶이 무료했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나를 즐겁게 하는 몇 가지가 있었지요. 종말과 구원을 반복적으로 일으키면 인간들은 내게 복종하고 나는 그렇게 신이 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것은 다 되는 전지전능한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어느 날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과거로의 회귀였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미칠 지경이었지요.”
헬리오는 어째선지 프시케가 회귀할 때마다 함께 과거로 회귀했다.
“그리고 의아했지요. 내가 특별히 뭔가를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과거로 돌아와 있었으니까요.”
“!”
갑작스럽게 과거의 특정 순간으로 돌아가는데 그게 기준이 없었다. 어떤 조건이 맞아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헬리오의 입장에서는 생전 처음 느끼는 불가항력이었다. 그게 치욕스러운 모멸감을 주었다.
자신이 신인데, 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게 당신 때문임을 알아차리는 데만도 정말 오래 걸렸어요. 알아낸 지 불과 몇십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달그락달그락.
프시케의 손이 떨려 그녀가 묶여 있는 사슬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리고 언젠가 그 원인이 되는 것을 찾게 되면 부숴 버리자, 망가트려 버리자고 맹세했지요.”
헬리오가 프시케가 묶인 쇠사슬을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이 그에게 확 쏠렸다.
“윽!”
고통으로 손과 몸이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조여오는 것은 공포에 잠식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일이지요?”
헬리오가 프시케의 얼굴을 움켜쥐더니 입이라도 맞출 듯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시 한번 프시케의 온몸이 빳빳하게 굳으며 가시가 돋듯 온통 소름이 휘몰아쳤다.
“마침내 과거로 돌아가는 원인이 당신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마음에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 솟았습니다.”
“……안 돼…….”
“갖고 싶어졌어요. 당신을.”
그리고 그토록 여러 번 당신을 회귀하게 만든 그 원흉, 그토록 당신이 원하는 그자는 완전히 망가트려 버리고 싶어졌어.
“저는 이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얻게 되었고, 당신이 원하는 로안도 망가트리게 되었으니까요.”
“……아아.”
프시케의 입에서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토록 로안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 결국은 자신이었다니!
‘내가 사랑을 이루지 못해 계속 회귀할수록 로안은 더욱 무능한 황제가 되었던 건 아닐까? 그러다 결국 내가 로안을 위험 속에…….’
헬리오가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뱉는 말들은 억지라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로안이 고통 속에 빠지고 지금 흑마법에 집어 삼켜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프시케는 마음이 무거웠다.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숨이 막혀왔다.
‘나 때문이었어!’
마음이 무너져 내리자 눈물이 속절없이 쏟아졌다.
프시케의 눈빛에서 점차 이지(理智)가 사라지고 대신 공허와 슬픔으로 가득한 허망함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신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지긋지긋한 반복을 멈추겠어요.”
“!”
그 말을 들으며 점점 프시케는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
“성하의 목적이 황후 폐하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미카일이 데몬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이미 부와 권력, 명성을 모두 가진 이가…… 제국은 욕심내지 않고 황제를 무너뜨리려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 것 같은가?”
데몬의 말을 들으며 미카일도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도 황제가 절대 포기하지 않을 무언가였겠군.”
그래야 무너진 황제가 그것을 손에서 놓을 것이니까.
데몬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흑마법사가 노리는 것이 엘리제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엘리제의 몸에서 주술을 몰아낼 때, 황궁의 폭발에서 그녀를 지켜낼 때 느낄 수 있었다. 엘리제의 고통과 죽음은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함을.
데몬의 낮은 음성이 천천히 자신의 답을 이야기했다.
“그게 아니면, 황제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누군가이든가.”
“!”
그게 황후였다. 미로니카 황국을 위해서라도 황제를 절대 포기하지 않을 사람.
“황후를 갖는 것이 목표라면 황제를 시해하는 것이 보통 아닌가?”
“황제에게 고통을 주는 것 역시 목표에 들어 있는 것이겠지.”
“!!”
미카일과 엘리제는 그제야 데몬의 말을 이해했다.
“맙소사.”
미카일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엘리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성하께서 그토록 잔인한 목표를 가지게 된 것일까요?”
“그것까지는 아직 저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데몬이 대답하며 침착하게 엘리제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몸이 조금 전부터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황후에 대한 걱정 때문인가?’
아니면 그녀의 힘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일까. 이곳이 시에델이 아니기 때문인가?
걱정으로 가슴이 조여왔다.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은 찰나.
“그렇다 해도 황후 폐하를 당장 구하러 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예요.”
엘리제가 비장하게 말했다. 이토록 가냘픈 몸으로 떨면서 황후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가 안타까워 데몬의 가슴이 시큰거렸다.
용기 있고, 당차고, 멋진 나의 엘리제.
그저 따뜻하게 품고만 있고 싶은데 그녀는 자꾸 등에 달린 눈부신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려 한다.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은 채.
그런 엘리제이기에 더욱 사랑스러웠지만 동시에 애가 닳았다.
두 팔로 감싸 안아 꽁꽁 숨겨놓고 사랑만 가득 부어주어도 아쉽게만 느껴질 텐데, 날아오를 수 있게 품에서 놓아주어야 한다니.
“폐하께서는 어찌하고 계시나. 황궁에서는 군을 움직여 수색을 시작했는가?”
데몬의 물음에 미카일이 난색이 되어 답했다.
“그것이……. 황제 폐하께서 아직 명을 내리지 않으셨네. 그분의 상태가 실은 조금 이상해.”
“이런.”
데몬의 입에서 짧은 외마디가 떨어졌다.
‘흑마법에 조종당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예상은 했지만 결국 데몬이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강력한 흑마법사를.
그렇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황제와 황후를 지키려는 모두가 위험해질 것이었다.
‘엘리제부터 피신시키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수색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의 마음을 알지도 못한 채 품속에서 엘리제가 바르작거리며 물었다.
“……수색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헬리오가 작정하고 그녀를 숨긴 거라면 흔적을 모두 감추었을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격이겠지.
“하지만 제국을 모두 뒤져서라도 찾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데몬은 그녀의 금색 눈을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그 눈빛 속에 담긴 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토리와 로떼를 데려왔으니 저도 함께 찾아볼게요.”
향기로운 붉은 입술이 예상했던 대답을 내놓았다.
데몬은 잠시 아찔해졌다.
‘이대로 엘리제를 안전한 곳에 가두고 나와 미카일이 황후를 찾는 일에 매진하면 안 될까?’
나중에 원망을 받더라도 그녀가 안전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나와 떨어져 있게 되면 혹, 그녀의 정령의 힘이 약해져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시 시에델에 잠시 보내는 것은 어떨까.
그곳은 그래도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을 테니.
여러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데 어디서 빠르게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그닥. 다그닥.
그들을 향해 멀리서 백마가 하나 달려오고 있었다. 시에델의 왕태자 자이드가 탄 말이었다.
***
지나친 충격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프시케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이자의 손아귀에서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 잘못되었음을 인지시키면 포기하지 않을까?
프시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떨리는 입술을 떼었다.
“당신은……, 날 얻더라도 회귀를 멈출 수 없을 거야.”
로안과의 사랑이 어긋나면, 곧 또다시 회귀하게 될 테니.
“알고 있습니다. 회귀의 조건을.”
“……뭐, 라고?”
“어떤 경우에 당신이 어김없이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지 관찰했거든요.”
“!”
“내가 괜히 신인 줄 아십니까?”
헬리오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로안은 당신의 사랑을 받기에 너무 부족합니다. 이미 틀렸어요.”
프시케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그는 회귀의 조건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제가 방법을 찾았으니 걱정 마요, 나의 프시케. 내가 당신도 구하고 회귀도 멈춰 주겠습니다.”
그의 말도 안 되는 자기애와 끔찍한 자기 합리화에 분노한 프시케의 몸이 다시 오들오들 떨려왔다. 말 그대로 치가 떨리는 상황이었다.
“나를 구한다고? 당신이?”
“들어봐요. 제가…… 로안이 되는 것입니다.”
헉.
순간, 프시케의 동공이 열리고 숨이 턱 막혔다.
“당신이, 로안이 된다고??”
“그의 몸 안에 제 영혼이 들어가는 겁니다. 마침 그의 영혼을 부수던 중이기도 했고요.”
“!!”
“이거야말로 진정한 운명이고 신의 뜻이지요. 즉, 나의 뜻입니다. 프시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지?!
“나쁘지 않잖아요. 나는 당신을 통해 이 지긋지긋한 반복을 마감하게 되고, 당신은 로안과 행복한 삶을 사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로안인가!
“지금의 로안으로는 영원히 회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프시케. 어리석은 황제는 네 짝으로 마땅치 않다고.”
이미 알고 있지 않냐는 말투로 헬리오가 계속 지껄였다.
“이제 인정하고 그만 로안을 포기해.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황제이자 반려가 될 수 있어.”
로안을 포기하라고?
그 말에 프시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솟던 눈물을 멈추고 대신 이를 꽉 물었다.
“그렇게는 못 합니다. 로안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 하여도, 제 남편이며 미로니카의 황제입니다!”
“이런,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라는 듯이 쯧쯧 헬리오가 혀를 찼다.
“부탁을 드리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린 것뿐.”
어디선가 검은 연기가 흘러나와 프시케의 코를 통해 순식간에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그 순간.
끈이 떨어진 마리오네트가 된 것처럼 프시케의 몸이 바닥을 향해 쏟아졌다.
헬리오가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지금 나눈 대화는 잊으세요. 나중에 필요할 때 다시 떠오르게 될 겁니다.”
그리고 결박된 프시케를 다정하게 안아 올렸다.
“내가 로안이 된 이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