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 납치 (99/126)


99. 납치
2022.10.13.



“안타깝게도 미로니카를 위험에서 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습니다.”

“데몬!”

이를 어쩌면 좋나.

나라의 위험이 아무래도 좋다 말하는 대공이라니,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대공가와 엘리제 당신뿐입니다. 아니, 대공가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도 그러시면 안 돼요, 각하!”

“저는 사실 이미 예전부터 미로니카를 버릴 준비를 해왔습니다.”

“!”

이게 무슨 말인가. 이미 전부터 미로니카를 버리려 했다니.

엘리제는 멍하니 데몬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공가의 독립을 준비해왔다는 뜻입니다. 이미 크레미언 대공가는 공국으로 독립할 충분한 힘을 갖추었습니다.”

‘꿈에서 데몬이 말했던 예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게, 설마 이건가?’

그동안 강력한 힘을 가지고도 로안의 아래에서 명을 따르던 크레미언 대공이 의아하게 생각되긴 했었다.


“당신을 모셔오기 위한 때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어쩐지! 그래서 지난번부터 미로니카의 안위가 뒷전이었구나!’

“하지만, 그들에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제게는 엘리제 당신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가 이불에 꽁꽁 말린 엘리제를 다시 침대에 눕혀 눌렀다.


“앗! 안 돼!”

절박해진 엘리제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두, 두 배로 보상해드릴게요! 미로니카를 구해주시면 두 배요!”

“두 배로 무엇을요?”

붉은 눈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아차,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구나.


“휴.”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데몬이 정말 대공으로서의 책임감을 던져버리고 미로니카를 버리려는 건 줄 알아서 애가 끓었는데 반쯤은 농담이었나 보다.


“놀랐잖아요!”

“미로니카를 구하러 가긴 할 테지만,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지 미로니카를 위해서는 아닙니다.”

이제 그에게 엘리제 외에 의미 있는 것은 없으니까.


“당신이 원하시니 그리하는 것뿐입니다. 다만, 제게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합니다.”

‘그게 나란 말이야?’

졸지에 몸 바쳐 미로니카를 구하는 입장이 된 엘리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미로니카에는 원하는 것이 없으니까요. 제가 원하는 것은 엘리제 님뿐이고 당신이 원하시니 움직여드리는 것뿐입니다.”

“다만, 대가를 바란다는 말씀이시고요.”

“맞습니다.”

데몬의 눈이 만족스럽게 휘었다. 장난기와 색기가 섞여 무척이나 선정적인 미소였다.


‘맙소사. 내가 이 사람을 각성시켰나 봐!’

내면에 숨어 있던 자신도 모르던 본성을.


“저는 본래 이런 사람입니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 보통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싫어할 만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데몬은 그래서 자신의 데몬이라는 이름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그 이름이 마치 자신을 대신하여 설명해주는 기분도 들었다.


“제가 아는 당신은 정의감 넘치고 따뜻한 분인데요.”

“원하는 것에서 행동의 목적을 찾는 것은 모든 인간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타당한 이득이 없는 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저는 좀 생각이 다르지만, 그건 나중에 다녀와서 또 이야기해요. 지금은 황궁이 위험하니까요.”

당장은 미로니카에 데몬이 필요했다.

그가 없으면 미로니카를 지킬 강력한 힘이 사라지게 되니 그 몫은 당연하게도 프시케가 짊어지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황후 폐하는 성하를 감당하지 못하실 거야! 나와 데몬이 도와드려야 해.’

그게 이 작품이 무사히 끝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황후 폐하는 꼭 지켜야 해요.”

“그분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데몬이 질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프시케에게 인간적으로 받은 은혜도 있었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사실 엘리제는 다른 더 큰 이유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걸.’

<황후 프시케>가 여자 주인공이 행복하지 않은 채로 끝나는 소설일 리가 없다. 회귀물이고 남주 후회물이었지만 분명 새드 엔딩이 아니었다.


“우리 이야기의 끝은 반드시 황후 폐하의 해피엔딩이어야 하거든요.”

그래야만 데몬과 자신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데몬이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엘리제 님의 뜻이시면 제가 이뤄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그가 그렇게 말하자, 무척이나 든든했다.


‘그런데 이 대사……. 어디선가 읽은 적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다. 분명 여주인 프시케에게 데몬이 작품의 막바지 부분에서 했던 말이었던 것 같아 엘리제는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분명한 건, 지금 프시케에게 데몬과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꿈에서 본 것도 있으니 저도 꼭 함께 가고 싶어요.”

확인해봐야 했다. 그곳이 어디인지. 분명 결정적인 장소인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 성검을 가져왔던 황후 폐하의 방 아래 같기도 한데…….’

그곳의 정체 자체를 황후와 자신만이 알고 있으니 다른 이를 보내어 부탁하는 것이 어려웠다.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할 일이 있어요.”

“이번에 황궁에 가신다면 살아계신다는 걸 들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조심할게요.”

“…….”

데몬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저와 함께 계시고, 피치 못해 떨어져 있게 되면 다시 만났을 때 바로 입 맞출 수 있게 해주십시오.”

조금이라도 오래 떨어져 있으면 엘리제가 위급해질까 데몬은 염려되었다. 비상시 그녀를 도울 누군가를 함께 보내고 싶었다.


“밖에 누구 있는가.”

멀리 문 쪽을 바라보며 묻자 앞에 서 있던 여인이 재빨리 들어오며 대답했다. 눈치 빠른 마가렛이었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어 대기 중이었습니다.”

마가렛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엘리제 님, 제가 토리와 로떼를 데리고 곁을 따르고 싶어요.”

기감이 뛰어난 토리와 로떼는 엘리제가 데몬과 함께 있지 않은 순간에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엘리제가 위험한 순간이 오면 마가렛이 데몬을 부르러 갈 수도 있을 것이고.


“고마워 마가렛. 마가렛이 함께 가준다면 마음이 한결 놓일 거 같아요. 그리고 각하께서 주신 반지도 있고요.”

그녀가 위험에 처하면 반지가 데몬에게 신호를 줄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데몬이 지금까지 품에 넣고 다니던 자신의 반지를 꺼내었다.

엘리제가 다가가 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그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두 사람의 손에 크기만 다른 한 쌍의 반지가 각각 끼워졌다.


“가는 동안은 당연하지만 쭉 제 곁에 계셔야 합니다. 말을 함께 타는 것이 좋겠습니다.”

‘설마, 또 달리는 말 위에서 입맞춤 나누어야 하는 건 아니죠?’

흠칫 놀란 엘리제가 불안한 눈빛으로 데몬은 바라보았다.

속을 읽은 듯 그가 빙긋이 웃었다.

‘왜 아니겠습니까? 방금 그 생각 정답입니다’하는 표정이다.


‘아휴. 누가 보면 입맞춤에 한 맺힌 사람인 줄 알겠네!’

 

 

***

프시케는 눈을 들어 올렸다. 정신이 몽롱했지만 낯선 침대와 어두운색의 커튼이 보였다.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황궁에 이런 곳이 있던가?’

그녀가 아는 장소가 아니었다.

분명 오전에 급히 회의를 마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로안을 보기 위해 그의 방에 갔었다.

침대에 잠든 로안에게 다가가기 위해 조금 전까지 움직이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어른어른 촛불이 일렁이며 사위가 흔들려 프시케는 더욱 어지러웠다.


“드디어, 둘뿐이군요.”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설, 설마! 이 목소리!’

 

***



“황후 폐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황궁에 난리가 난 것은 물론이었다. 미카일은 혈안이 되어 황궁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 오전 회의를 마치고 로안의 방으로 향하는 프시케를 보았다. 조심하라고 귀띔해주기 위해 얼른 뒤를 따랐다.

황제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가 나올 때까지 근처에 서서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나오질 않자, 애가 탄 미카일은 프시케를 잠시 방에서 데리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황제의 방 앞을 지키고 선 시종장에게 가서 말했다.


“급히 황후 폐하를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해주십시오.”

시종장도 아까 들어간 황후를 보았으니 미카일의 요구대로 프시케를 불러주기 위해 잠시 기다리시라며 로안의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그가 방에서 나와 미카일에게 덜덜 떨며 말했다.


“황, 황후 폐하께서 계시질 않습니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분명 들어갔는데? 그걸 미카일도 보고, 방 앞에 있던 시종장도 보고 방문을 지키고 섰던 호위들도 보았다. 순식간에 방과 복도에 있던 대여섯 명이 혼비백산하여 황후를 찾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이오, 분명 들어가셨고 나오질 않으셨는데!”

시종장도 기겁하며 황제의 방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침상에 누워 있던 로안이 그 소란에 일어나서 한 말이었다.


“무슨 말이더냐. 황후는 내 방에 들어온 적이 없거늘!”

그 말에 미카일과 시종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

프시케는 겨우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었다.

답을 듣기가 두려워 꺼내기 망설여지던 말이었다.


“당……당신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프시케가 묻자,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예. 저입니다.”

대답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한 발 나오며 그가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내었다.

예상했던 답이었는데도 가슴이 철렁했다.


‘맙소사!’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었는데 어쩐지 손목이 아프고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묶, 묶여 있잖아!’

결박된 손과 움직여지지 않는 몸이 느껴졌다.

당황과 경악으로 프시케의 초록 눈이 마구 떨렸다.


“제, 제게 왜…… 이러십니까?”

“하찮은 벌레가 좀 꼬여서요.”

‘벌……벌레라고??’

그가 의미하는 것이 황궁에 있는 누군가를 칭하는 말이라는 걸 프시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더욱 싸늘하게 느껴지고 두려움에 몸이 굳어갔다.


“생각보다 눈치 빠른 것들이 황후 폐하 주변에 많더군요. 대부분은 소리 없이 죽여도 탈이 없지만 특별한 힘을 가진 것들은 좀 귀찮아서요.”

프시케의 온몸이 소름으로 뒤덮이는 것 역시 순식간이었다.

저토록 인자한 얼굴로 사람들을 하찮은 벌레라고 칭한 것도 모자라 죽여도 탈이 없다고 말하고 귀찮은 존재라 표현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 저를 놓아주십시오. 결국 사람들이 저를 찾아낼 것입니다.”

“아아.”

그가 프시케의 말에 씨익 웃었다.

친근하고 사람 좋은 인상의 그 눈웃음도 함께.


“그건 걱정 마세요. 찾아내기 쉽지 않을 겁니다. 여기는……,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고 해두지요. 유일하게 알고 사용하던 이가 얼마 전 황궁에서 전사했거든요.”

‘그 여자 흑마법사가 쓰던 방이구나!’

타나가 있던 방.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답이 떠올랐다.


‘데몬의 말이 사실이었어!’

뼈를 때리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허망한 표정을 바라보며 눈앞의 남자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름 아끼던 녀석이었는데, 얼마 전 허무하게 죽어버렸지요. 여긴 그녀에게 제가 준 곳입니다.”

하얀 옷을 입은 그가 거친 욕설을 뱉으며 선반 위에 놓였던 촛대를 들어 순식간에 구겨버렸다. 저토록 인자한 웃음으로 파괴적인 힘을 사용하는 하얀 성자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강한 위화감이 들었다.

머리와 마음이 온통 혼란스러웠으나 프시케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나를 납치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데몬이 눈치챘으니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

사실 죽는다 하여도 크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녀는 또 회귀할 것이니까.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른 생들과 크게 다른 점이 있어서 여느 때와는 달리 애착이 컸다.


‘어쩌면 이번 생만큼의 기회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눈앞의 남자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었다.


“장소만 제가 준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새 삶, 그 아이의 이름……. 첫 임무, 첫 희생자, 모든 것은 다 제가 주었지요. 생의 희망부터 시작해서 극도의 절망, 그리고 구원.”

모든 면에서 지금 프시케는 턱없이 불리한 입장이었다. 당장 그를 자극해서는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도망갈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말을 잘 따르는 척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으로 우선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떨어지는 사연이 프시케의 희망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아주 귀한 집의 아이가 모든 것을 잃은 절망에 놓였을 때 구원처럼 누군가 나타난다면 신처럼 믿고 따르지 않을까 하는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관계였어요.”

“!”

그 말은 그가 타나를 얼마나 잔인하게 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한 문장이었다.

프시케의 초록 눈이 마구 떨려왔다. 그의 실체를 마주하자 그것이 주는 실망감, 충격이 주는 공포가 그녀의 몸을 압도하고 있었다.


“왜…… 그런 잔인한 짓을……!”

“어차피 그들 모두가 쓸모없는 존재일 뿐인 것을요.”

그 말에 프시케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삶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들을 도와준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우월함을 느끼기 위해.”

“!”

“네, 그래요. 내가 얼마나 그들과는 다른 완벽한 존재인지를 알고 싶어 그들을 구원도 하고 절망에 빠트리기도 한 것입니다.”

프시케의 커다랗게 열린 초록 눈을 바라보며, 하얀 옷의 헬리오가 웃으며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뱉었다.


“신이, 늘, 인간에게 그러하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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