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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미로니카는 필요 없습니다
2022.10.10.



“아아.”

정신을 차려보니 데몬의 품 안이었다.


“깨셨습니까?”

“네.”

나른하고 기분 좋은 만족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커튼 사이 작은 틈으로 쏟아지는 빛이 강렬한 것을 보니 벌써 아침인가보다. 아니, 낮인가?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빛이 닿아 만드는 음영이 그의 잘생긴 얼굴과 건강하고 단단한 몸의 실루엣을 더욱 입체적으로 도드라지게 하였다. 이 순간에도 그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아……. 아직 괜찮아요.”

정신을 차렸는데 이렇게 멋진 그와 이토록 밀착되어 있다니!

멀리서만 바라보아도 몸과 마음을 흔들었던 그가 바로 내 곁에 붙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너무 행복하다.’

사랑하는 그와 함께 시간을 나눈다는 건 그동안 살아오며 내가 느꼈던 행복이라는 감정의 격을 달리하게 했다.

또 다른 만족감으로 가슴 벅차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껴보았다. 현실에서는 제대로 된 연애도 사랑도 못 해 봤었으니까.

다시 살아나길 잘했다.

빙의하길 잘했어!


“혹시 목마르시진 않으십니까?”

“음……, 목은 좀 마른 거 같아요.”

충만하게 행복하면서도 그와 도란도란 나누는 안부가 갑자기 부끄러워서 얼른 침대보를 끌어올렸다. 눈 바로 아래까지.

그런데 아침인데.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멋지세요?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내가 작게 말을 시작하자, 침대맡 협탁 위의 물잔을 잡고 데몬이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여전히 한쪽 팔로는 나를 안고.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자고 일어나셔도 그렇게 멋지신가 해서요.”

그와 밤에 아무 일 없이도 손만 잡고 잔 적, 나란히 누워 잔 적이 얼마나 여러 날이었던가.

그런데 자다 깨어도, 아침에 일어나도 그는 항상 목소리도, 모습도 너무나 멋져서 정말 신기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

그가 아무 말 없이 들었던 물잔을 내게 주나 했더니, 자신이 한 모금 마셔버리는 게 아닌가.


‘설마 내가 한 말이 너무 별로여서 자기가 물을 마셔버리는 거야?’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는 찰나 데몬이 물을 머금은 입술로 내 입술을 찾았다.


“!”

꼴깍, 꼴깍.

입맞춤을 통해 물이 내 목을 넘어갔다.


‘아니! 내가 마셔도 되는데요!’

“저도 마실 수 있어요.”

“유혹하시는 건 줄 알았습니다.”

“!”

아침에 눈뜨자마자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는지 그가 다시 팔로 내 허리를 감고 입술을 내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리하고 싶었으니까요.”

“!”

뭘요? 눈뜨자마자 유혹 말이에요?


“그리고 둘만 있을 때는 이름을 불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가 달콤하고 애절한 눈빛으로 부탁을 했다.

아! 그를 이름으로 부르는 날이 오다니.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데몬.”

“예, 여기 있습니다.”

세상이 다 녹아내릴 만큼 근사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렇게 멋지게 미소 지어 버리면 어떡해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쭉 이러고 있고 싶어지게. 나라를 팔아버릴 만큼 아름다운 이는 내 눈앞의 그인 것만 같다.

그리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이, 이럴 때가 아닌데!’

입맞춤으로 인해 어젯밤의 기억과 느낌이 확 상기되었다.

얼굴이 붉어졌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간밤에 꾼 꿈 아무래도 예지몽 같아.’

그에게 말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나른한 눈빛으로 벌써 더 적극적으로 다가온다 이 남자.


“잠, 잠시만요.”

“그동안의 기다림이 컸으니 제게 이 정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자격이야 충분하지. 예전에 데몬의 말이 사실이었던 것도 충분히 확인했고.

그의 장담처럼, 그는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을 정말 잘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더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을 만큼 그와의 시간이 좋고 황홀했다.

하지만 지금은 진짜 안 된다. 프시케 언니가 위험하다고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위급한 상황일지도 몰라서 그래요. 꿈을 꿨거든요.”

어느새 나를 끌어안고 귀 근처에 고개를 내려 숨 쉬던 그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꿀이 뚝뚝 떨어질 듯 달콤했던 붉은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어 있었다.


“아무래도 황후 폐하의 안위가 걱정되어요.”

그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물었다.


“꿈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

프시케는 눈을 들어 올렸다.


‘여기가 어디지?’

창문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낯선 곳이 아닌 자신의 방이었다.


‘내가…… 잠들었었나?’

방까지 어떻게 돌아온 것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성하께서 대화를 나누자고 하셨던 것 같은데…….’

어제 늦은 밤, 로안의 방으로 가는 길에 헬리오를 만났던 것과 마지못해 로안의 방 옆 응접실에서 대화를 시작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어느 순간 이후부터가 마치 기억의 일부가 소실된 것처럼 아득했다.


‘함께 로안 걱정을 하며 옛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던 것 같은데…….’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프시케는 순식간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무엇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헬리오가 자신에게도 성수를 권하면 어쩌나 걱정했기에 특별히 더 경계했다.

다행히 그는 그 무엇도 권하지 않았다. 그저 마주 앉아 대화를 하였던 것이 다였다.


‘며칠간 너무 예민하고 피곤해서 순간 실신했던 것인가?’

하지만 그랬다면 분명 시녀장과 황후궁의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눈을 떴을 것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부르자 시녀장이 공손히 들어오며 안부를 물었다.


“피로가 좀 풀리셨습니까, 폐하.”

“푹 쉬었네. 어제 내가 무척 피곤했던 모양이야. 어제 혹 성하께 실례를 한 것은 아닌지 염려되네.”

“성하께서는 폐하를 걱정하셨습니다. 많이 피곤하셨는지 어제 대화 중 잠드셨다고 깨시면 알려달라 하셨습니다.”

대화 중에 잠들었다고?


“……어제 본후가 어떻게 방까지 왔는가?”

“응접실에 잠들어 계시어, 송구하오나 호위를 불러 침소까지 모시고 왔습니다.”

“!”

‘그럼 성하와 이야기를 나누다 정말 나도 모르게 정신을 잃고 잠들었단 말인가!’

프시케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

미카일은 지난밤 목격한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데몬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평생 자신이 모셔온 성하의 뒤를 쫓고, 몰래 이야기를 엿듣는 생각 따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도 그러했다. 며칠 동안 지켜본 헬리오는 수상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대한 존경심만 깊어질 정도로 신실한 성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러니 헬리오가 황후를 만난 어젯밤의 대화를 듣게 되었을 때 미카일은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이 내용을 이야기해도 누가 믿을까?’

데몬이라면 믿겠지. 이미 성하를 의심하고 있기도 했고.

지난밤, 성하의 말을 곱씹으며 미카일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생각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왜 이렇게 현명한 황후 옆에 이토록 무능한 황제인가.”

 
성하와 황후 폐하께서 어떻게 그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일까.

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성인께서 하시는 말씀이 맞는가? 미카일이 충격에 휩싸이는 동안 프시케의 지혜로운 올리브색 눈도 그 순간만큼은 혼란으로 뒤덮이는 것이 보였다.

믿고 있던 이에게 듣는 말의 내용이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라, 그녀의 신념을 무너트리고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듯했다. 미카일에게 그러한 것처럼.

그 뒤로는 헬리오가 프시케에게 다가가 무척이나 작게 속삭였기 때문에 미카일의 능력으로는 그 이상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치 인기척을 느낀 것처럼 헬리오가 미카일이 숨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란 미카일은 흠칫 몸을 숨겼다. 그 바람에 미카일은 그곳을 도망쳐 나와야 했다.


‘들킨 것 같진 않았어.’

오늘 아침 일부러 따로 뵙고 문안 인사를 올렸지만, 헬리오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의 군주이자 인자하신 신앙의 왕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제 일을 떠올리면 미카일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분명 어젯밤은 자신이 알던 성하의 눈빛이 아니었다.

분명하게도 그 모습은 어둡고 사악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마치, 흑마법사처럼!’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그 사실이 미카일의 목을 조르는 듯 느껴졌다.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충격이었다.


‘데몬에게 알려야 해.’

서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후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카일의 뇌리를 스쳤다.

서둘러 서신을 작성하고 데몬에게 연락할 때 사용하는 전서구를 불렀다.

***

잠시 뒤, 미카일이 보낸 전서구가 대공가에 도착했다.

잘 훈련된 짙은 회색 비둘기의 몸을 쓰다듬어 다시 날려 보낸 후, 데몬은 방금 읽었던 쪽지를 바로 불에 태워 없앴다.

불길에 사그라드는 종이를 바라보며 그의 두 눈도 붉게 물들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데몬의 얼굴빛이 어두워진 것을 눈치채고 엘리제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면서 데몬이 둘둘 감아 놓은 이불 속에서 꼬물거리며 침대를 벗어나려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데몬이 다시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을 칭칭 감은 이불을 다시 꼭꼭 말았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소중한 보물을 다시 포장하듯이.


“더 쉬십시오.”

“각하께서도 일어나셨잖아요. 충분히 쉬었어요. 그러니 이제 이불 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

조금이라도 그녀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소식은 알리지 않고 싶었다. 그녀가 아무런 걱정 없이 그의 품에서 그저 사랑만 속삭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겠지.’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그녀가 걱정하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황후든, 미로니카 황국이든 내버려 두고 데몬은 그녀에게 입 맞추어 마력을 불어넣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그것만 생각하고 싶은데 당장 나서야 할 일이 생기니 못마땅했다.

엘리제에게 꿈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안 그래도 황궁으로 가봐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미카일이 보낸 서신이 도착했던 것이었다.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니 데몬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이야기해 주신 꿈이 역시 예지몽이 맞는가 봅니다.”

그 말에 엘리제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벌떡 몸을 일으키는 애벌레처럼, 이불에 말린 엘리제가 움직였다.


“황후 폐하 신변에 무슨 일이 있대요?”

의도치 않게 행동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그와 반대로 아름다운 얼굴은 걱정으로 금세 하얗게 질렸다.

데몬은 그 작고 하얀 얼굴을 두 손으로 살짝 잡았다. 사실 미로니카의 상황은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의 천국이 눈앞에 있으니까. 너무나도 달콤하게 그가 속삭였다.


“그것은 아니나 수상한 조짐을 미카일 역시 발견하였습니다.”

“당장 가보실 거죠?”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황궁과 황후만 걱정하고 있는 엘리제를 데몬이 빤히 바라보았다.


“…….”

어째서인지 데몬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설마…….


“당신 곁을 떠나기 싫습니다, 엘리제.”

“!”

그의 말에 엘리제의 심장이 두근두근 마구 뛰었다.


“하지만 황후 폐하와 미로니카는 데몬 당신이 필요해요.”

엘리제가 애절하게 말하자 데몬의 표정이 순간 짓궂게 변했다.


“다녀오면 보상으로 무얼 주시겠습니까?”

“보상이요?”

생각지 못한 물음에 엘리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에게 보상을 요구하다니, 데몬답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말이 더욱 그녀를 놀라게 했다.


“안타깝게도 미로니카를 위험에서 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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