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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지금 위태로운 것은 (97/126)


97. 지금 위태로운 것은
2022.10.06.



 


“미로니카의 멸망보다 제게는 당신과의 하룻밤이 더 중요합니다.”

“네?”

심장이 쿵쾅쿵쾅 큰 소리로 뛰며 난리가 났다. 너무 좋은데, 또 너무 황당하다.

이거 무슨 기분이야?


“나라는 망하면 다시 세우면 되지만, 당신과의 시간은 흘러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진짜 나라보다 나와 보내는 밤이 더 소중하다고?’

그가 빈말을 하는 성격도,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니 그만큼 그가 하는 말들이 모두 내 심장을 그대로 관통하듯 충격적이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하며 나는 그만 멍해졌다.

아니! 너무 설레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제가 하룻밤 없다고 미로니카가 단번에 무너지지는 않으니 염려 마십시오.”

다시 두 팔 아래 나를 가두고 더욱 단단히 몸을 붙여오며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더니 내 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당장 나도 모르겠다 심정으로 그가 주는 황홀감에 빠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러다 나중에 오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면 어찌하나. 나는 도리질을 하며 이성을 찾았다.


“하지만 제가 살던 나라에서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이 있어요. 제가 그 주인공이 되긴 싫어요.”

“지금 당신의 아름다움은 사실 미로니카가 아니라 저를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만.”

“네?”

데몬이 내 손을 자신의 심장 근처로 가져다 대었다.


“!”

‘사람 심장이 이토록 빨리 뛰어도 되는 건가?’

“각하, 심장이!”

“……미로니카가 아닌 혹 저를 위한 자비는 없으십니까?”

정말 폭발할 것처럼 뛰고 있었다.


“저를 위해 허락해주십시오. 폭주 직전이니까요.”

그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지금은 저와 함께 계셔주시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입니다. 당신의 나라 이야기는 이후 천천히 들려주십시오. 더 듣고 싶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곧장 자신의 큰 손으로 내 열 손가락 모두를 얽어매었다.


“사랑합니다.”

아아. 더 이상 무슨 걱정이 필요할까.


“저도……!”

대답하기 위해 열린 내 입안으로 다시 그가 거칠게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

프시케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달라 부탁하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어제도, 그제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지만, 오늘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자신의 방 안에 아무도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프시케는 작은 쪽지를 꺼내어 빈 벽난로에 넣고 불을 붙였다. 쪽지는 순식간에 타들어 가 약간의 재만 남긴 채 사라졌다.

데몬이 보낸 쪽지였다.


‘하아. 말도 안 된다 생각했었는데…….’

쪽지를 처음 확인한 어제까지만 해도 터무니없는 말이라 생각했다. 분명 대공이 무언가 단단히 착각한 것일 거라고.

그러나 쪽지를 바로 태워버릴 수가 없었다. 내용을 곱씹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공이 말한 모든 것들이 과연 우연일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말한 것들과 자신이 느껴왔던 것을 연결하니 오히려 평소 의아했던 것들이 이해되었다.


‘성하께서 그래서 내게도 성수를 권하셨던 것인가?’

로안에게 성수를 준, 그날 밤.


‘그래서 흑마법사가 죽고 나서도 성검을 찾으셨던 거고?’

검을 없애고 싶었겠지. 자신을 위협하게 될 유일한 무기이니까.


‘그러고 보니, 그때도 성하의 눈빛이 의아했었어.’

황궁의 창고에 가서 구호품과 식료품을 내어주겠다 이야기했을 때.

이미 그때도 무언가 따로 바라는 것이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그토록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것일까?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분께서 이토록 끔찍한 일을 벌이셨다는 말인가.

빈민을 위해 가진 모든 걸 내놓는 분이신 것을 여러 사람이 직접 보았는데.


‘설마, 그 모든 것이 거짓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믿었던 성인이 거짓된 얼굴로, 다른 목적이 있어 선행을 베푸는 척했다니.

실망과 절망감으로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여전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분이 그토록 위험하고 잔인한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자꾸만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도대체 그분이 뭐가 아쉬워, 무얼 원해서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고 로안을 괴롭힌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다.’

황국을 원한다면 그가 가진 신성력으로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부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미 가지고도 남았을 수 있었다.

권력은 황제보다도 높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모르겠구나.’

흑마법까지 사용하며 도대체 로안에게 주술을 걸고 고통 속에 몰아넣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아.”

목적을 모르니, 확실히 범인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지만 프시케는 우선 마음을 굳혔다.


‘누가 진범이든 우선은 로안을 지켜야 한다!’

조금 전 겨우 잠자리에 든 로안을 두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불안해서 다시 가봐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로안이 신기하게도 불안해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잠이 들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헬리오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 로안을 그에게 보였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숄을 걸치고 문밖으로 나온 프시케를 보고 시녀장이 달려왔다.


“황후 폐하, 어찌 나오셨습니까?”

“잠이 오지 않아 폐하 곁을 지키려 하네. 앞장서 주게.”

깊어지는 밤이라 황궁에 어둠이 내린 지 한참이었다.

등불을 밝힌 시녀장을 따라 로안의 방으로 향하는 프시케의 뒤를 몇몇 시녀들이 따랐다.

황후궁에서 나와 황제의 방이 있는 본궁으로 향하면서도 프시케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구나. 역시 성하께서 그러실 리 없는 게 아닐까.’

그러는 사이 로안의 방 앞에 다다랐는데.


“황후 폐하 아니십니까?”

“!”

등 뒤에서 들리는 다정한 소리에 프시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늦은 시간에 로안의 방 앞에 그가 왜 다시 찾아왔을까.

로안이 아까 잠든 것은 황궁의 모두가 아는데.

굳은 얼굴로 프시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인자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성하, 헬리오였다.

***

데몬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신없이 뜨거웠던 열기를 식혔다.

작은 새처럼 자신의 품 안에서 숨을 고르는 엘리제가 사랑스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쳤는지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으나 발그레 상기된 얼굴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다행히도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별빛 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몇 번을 쓰다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제가 곤한 숨을 쉬며 잠드는 것이 느껴졌다.

데몬은 자신의 팔로 베개를 만들어 그녀의 머리를 올리고 그녀의 몸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렇게 할 것을…….’

이렇게 가져도, 가져도 부족한 마음이 들 줄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먼저, 더 오래, 더 많은 시간을 그녀를 갖는 일에 썼어야 했다.

이토록 온몸이 부서져도 좋다 생각이 들 만큼 행복할 줄 알았더라면.

그녀의 대관식에 맞춰 시에델에 갔을 때, 연회장으로 향하는 동안 데몬은 마력을 이용하여 그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대화를 들을 수가 있었다.

원치도 않는 성녀 자리를 두고 엘리제에게 시에델 왕가가 인연을 맺어달라 요구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당장 그녀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녀의 대관식이 아니었더라면, 참석자들을 손님처럼 대하는 그녀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문부터 부숴버리고 그곳을 뒤집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새하얀 드레스에 베일을 쓴 모습의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놀란 눈으로 웃었을 때 데몬은 생각을 바꿨다.

그 순간 중요한 것은 그들을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가 아니었다. 그저 엘리제를 데리고 나오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곳에서 그녀를 조금이라도 빨리 품에 안아버리고 싶었다.

이전부터 충분히 허락을 받아왔으니 당장이어도 상관없을 일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그의 공간에서, 얼마나 그가 지금 애가 닳아 있는지를 살짝이라도 전한 후에 그녀를 안고 싶었다.


“사랑합니다, 엘리제.”

잠든 그녀의 감긴 눈 위로, 따듯한 볼 위로, 말캉한 입술 위로, 보드라운 머릿결 위로 끝없이 입술을 내리며 사랑을 속삭여도 부족했다.

미로니카가 멸망하더라도 엘리제와 밤을 보내는 것을 선택하겠다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지난번 그녀를 잃었을 때 그 무엇도 그녀보다 더 소중하지 않았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몸을 쓰다듬고 보듬으며, 자신이 남긴 흔적이 없는 곳이 어딘지 눈으로 살폈다. 눈이 닿는 그 모든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녀가 허락한 그 모든 곳에.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하얀 설원에 자근자근 발자국을 남겨 그곳에 처음 닿는 이가 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처럼, 이 여리고 아름다운 하얀 피부에 잘근잘근 입술을 내려 지금부터라도 그녀의 모든 처음을 자신이 갖고 싶었다.

커져만 갈 그녀의 기쁨도, 행복도, 전율도.

사그라질 걱정도, 슬픔도, 두려움도.

모든 것을 그가 만들어주고, 지워주고 싶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면 붉었던 곳이 잠시 후 하얗게 조금씩 돌아왔다.

흔적이 옅어지면 다시 만들며 그녀의 모든 곳에 자신을 새겨 넣었다. 간절한 기도와 함께.

그녀 역시 온통 그로 가득하길.

그리고 찰나라도 더 그의 곁에 오래 살아주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며 데몬은 다시 잠든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그 안으로 자신의 힘을 흘려보냈다.


 

***



“황후 폐하.”

프시케는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왜 오늘 낮에도 아무렇지 않게 만났던 헬리오가 지금은 이다지도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까?

마치 속내를 다 들킨 것만 같이.


“성하, 어째서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까?”

“잠시 둘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시각에 말씀이십니까?”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겉모습은 낮과 같은 성하이시지만 어쩐지 속은 그렇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지나치게 경계하면 오히려 수상하게 보일 것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성하를 믿었던 때처럼, 평소처럼 대해야 한다.’

“너무 늦은 시각인 것 같아 성하께서 피곤하진 않으실까 염려됩니다.”

겨우 프시케는 그럴싸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연스러운 모습을 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의 병과 관련된 이야기라 한시라도 급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로안과 관계된 이야기라면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일 것이다.


“혹시 이곳에서는 곤란하십니까?”

프시케는 가능하면 여러 사람이 있는 곳이 더 안전할 거라 판단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 여러 사람이 함께 듣는 것이 괜찮을지 조심스럽군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나와 지금, 로안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씀이신가? 성하께서?’

“물론 지금 폐하의 마음의 병에 관한 이야기지요.”

“…….”

부드럽게 웃는 헬리오를 바라보며 프시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이쪽 응접실에서 잠시 뵙겠습니다.”

프시케가 몸을 돌려 로안의 방 가까운 응접실로 헬리오를 이끌었다.

***

거친 태풍에 바닷물이 바람에 쓸리고 출렁이는 것과 같았다.

나의 몸이 데몬이 주는 쾌감과 열기에 그대로 흔들리고 그의 모든 것에 잠겨버렸다.

그의 향기에, 그의 속삭임에, 그가 토해내는 거친 열기에 나의 모든 감각이 잡아먹힌 것처럼 아득하게 먹먹해져 갔다.

그러고는 달아오르는 열기와 뜨거운 폭발의 연속이었다.

어느 순간 까무룩 나른함과 몽롱함이 찾아왔다.

폭풍 뒤에 이어지는 조용한 적막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평온하고 깊은 휴식이 내면에 이어졌다.

푸른빛이 일렁이다 밝게 터진 것은 그때였다.

작게 들리던 소곤거림 역시 조금씩 커졌다.


“……신을 …….”

뭐라고?

신?


“……위해서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누군가 책을 읽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지?

아무리 들어도, 저건 내 목소리 같은데?

죽기 전, 빙의하기 전 현실 속 내 목소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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