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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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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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도대체 왜?
2022.09.26.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제가 엘리제 님의 밤 시중을 들게 해주십시오.”
머리가 순간 멍하다.
설마, 지금 들은 말이 내가 생각하는 그 밤 시중은 아니겠지.
“죄송하지만 밤 시중이라고 하셨어요?”
잘못 들었을 수도 있으니 다시 물었다.
나만큼이나 놀랐는지 문 옆에 선 마가렛이 ‘힉’ 기겁하는 소리가 들린다.
“예, 맞습니다.”
맞다고? 아니, 그런데 왕태자님 너무 당당하신 거 아니에요?
님께서, 저에게, 밤 시중을…… 도대체 왜요??
‘설마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의 밤 시중이 있는 건가?’
다른 의미가 있더라도 이 늦은 시각에 자이드에게 무슨 시중이든 받지 않고 싶다.
그의 얇은 침의만 보아도 어쩐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기분이니까.
“말씀하시는 것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필요하지 않으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이 정도 단호하게 말을 하면 그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알아듣겠지.
“제가 꼭 엘리제 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네?”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싫다는 데도 본인은 그 시중을 꼭 들어야겠다는 건가?
나는 독하게 마음먹었다. 수치심을 불러일으켜서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어줘야겠구나!
“말씀하시는 그 밤 시중이 무엇인데요?”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편히 주무실 수 있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주무시기 전에 필요하시다면 저를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용해도 좋다고요?”
“그렇습니다. 숙면하실 수 있도록 제가 기분 좋게 해드릴 수도 있고, 또 원하신다면 더 깊은 쾌락의……”
“헉, 잠시만요!”
어이쿠! 계속 들으면 진짜 큰일 나겠다.
자이드 생각보다 엄청 뻔뻔하구나! 지금 대놓고 나를 몸으로 꼬셔보겠다 말하는 거야?
“왕태자님께서는 부끄러움을 모르십니까?”
아니, 뻔뻔이 아니라 밝히는 건가?
그렇게 안 봤는데! 작정하고 온 모양이구나.
“저는 내일이 대관식이니 거기에 필요한 시중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이런 시중인 걸 알았더라면 당연히 거부했을 거예요. 그런 건 결코 필요하지 않아요!”
실망하였는지 자이드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마지막 중요한 한 마디를 전했다.
“게다가 저는 이미 혼인을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민망하게 첩에서 벗어나자마자 약혼하고 왔다고 이렇게 빨리 밝히게 될 줄이야!
그래도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다. 나는 왼손을 들어 당당하게 반지를 보여주었다.
“혼인이요?”
자이드의 갈색 눈이 조금 더 세차게 흔들리는 것 같더니 이내 멈추었다.
‘그래.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겠지.’
포기했나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나 보다.
“내일 대관식 후에 드릴 말씀이었는데, 그렇다면 하루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불안하게 뭘요? 그냥 안 들으면 안 될까요?
“성녀가 되시면 저희 시에델의 또 다른 의미의 왕이나 다름없으십니다.”
아까 왕후 마마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긴 하다. 데몬 생각하느라 제대로 귀 기울이지는 못했지만.
“시에델 왕가를 대표하여…….”
왕가를 대표하기까지 한다고?
그렇다면 이미 왕후 마마와도, 다른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눈 바라는 말인가?
“저를 후궁으로 맞아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네에??”
나도 모르게 입이 주먹만 하게 벌어졌다.
후궁이라니! 결국 첩이 되고 싶다는 말이잖아.
“제가 엘리제 님의 첩이면 안 되겠습니까?”
“!”
결국 그가 그 말을 입으로 뱉고 있다.
내가 첩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해.
아무리 그래도 얼마 전까지 첩이었던 사람의 첩이 되겠다는 건가, 지금?
곧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했는데도?
“그건 더욱 함부로 허락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유혹은 거부하나 첩은 원한다 이렇게 말했나요? 유혹도 첩도 싫어요!
“분명히 말씀드리겠어요. 밤 시중은 필요 없습니다. 물론 성녀가 된 이후 후궁도요.”
내가 무슨 역하렘의 주인공 절륜한 여왕도 아니고, 와~ 자이드 이 소설을 진정 19금 로판으로 바꾸려 하는구나!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분명 생각이 달라지실 거라 확신합니다. 엘리제 님을 기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
맙소사! 이제 경악을 넘어서 어이가 없었다.
‘결혼할 상대가 누군지 말하지 않아서인가?’
데몬이라는 걸 알면 이렇게 무식하게 들이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왕태자님…….”
대화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고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고른 후 자이드를 불렀다.
“예, 명하십시오.”
어쩐지 기대하는 눈빛과 상기된 얼굴색으로 자이드가 나를 바라보았다.
“정 그러시다면, 결혼식을 올린 후에 제 남편 되는 분께 상의를 드려보겠습니다.”
움찔.
물러설 것 같지 않았던 미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 남편 되실 분께서 혹시…….”
“크레미언 대공이세요.”
***
‘설마 했는데 정말 대공이 엘리제에게 청혼했구나!’
자이드는 우선 한발 물러섰다.
조금 전 엘리제의 방에 갈 때만 해도 긴장과 기대로 마른침이 목울대를 넘어갔었다.
그녀를 자신의 여인으로 만드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자이드가 왕위에 올라 그녀를 맞이하는 방법에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부왕인 페르만과 모후 그레이스가 아직 정정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자이드가 원한다고 엘리제를 신부로 맞을 수 없는 더 큰 이유는 그녀의 힘이 시에델에서 가장 강력해지면서 입장이 뒤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선택할 수 없다면 선택받으면 그만이라 생각했건만.”
대공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이르다.
지금 당장은 엘리제가 자신을 거부했지만, 성녀가 되어 입장이 달라지면 생각 역시 달라질지도 모른다.
본부인을 밀어내고 후궁에서 황후로, 첩에서 본처가 된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역사에 기록된 것만 찾아도 상당할 것이다.
‘남녀가 바뀌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엘리제가 자신을 후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자이드는 데몬보다도 총애를 입을 자신이 있었다. 엘리제의 총애라니, 생각만 해도 목구멍이 타오르고 묘한 쾌감이 몸을 타고 흘렀다.
여인을 밝히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인의 관심을 마다한 적 없었던 자이드였다.
그가 누군가를 원하기 전에 항상 누군가가 먼저 그에게 다가와 갈증이나 애욕이 쌓일 일도 없었다.
‘엘리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녀를 향한 갈망이 진득한 빛이 되어 그의 두 눈에 담겼다.
‘그나저나 루시아에게는 안된 일이군.’
대공을 욕심냈었던 루시아는 무척이나 속상해할 것이다.
‘아니, 잘된 일이다. 어차피 마음을 정리해야 했으니까.’
시에델 왕가의 단단한 돈줄이 되기 위해 루시아는 부유한 귀족과 혼담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왕가보다 강력한 정령의 힘이 등장했으니 아무래도 대관식 이후로는 왕가의 입지가 흔들릴 것이었다. 그러니 경제적으로 든든한 힘이라도 챙겨놓아야 했다.
왕과 왕후는 엘리제가 미로니카로 떠나자마자 루시아의 혼처가 될 귀족부터 추려냈다.
혼담이 결정된 직후 루시아는 궁 안에서 훌륭한 귀부인이 되기 위한 모든 준비를 위해 거의 갇혀 있는 상황이었다. 엘리제가 돌아왔을 때조차 공주는 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가여운 루시아.’
자이드도 원치 않는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여동생을 떠올리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시에델에서는 그것이 당연했다.
정령의 힘이 없는 공주가 가진 무기는 ‘젊음과 아름다움’이 전부다.
그 가치가 최상일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절로 반대 입장인 엘리제가 떠올랐다.
정령의 힘도, 아름다움도 이 세계의 최상이어서 스스로 남편을 고르게 된 여인.
“여러모로 엘리제는 정말 최고의 배우자 감이군.”
그러니 이렇게 훌륭한 상대를 눈앞에 두고 놓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
***
대관식은 성대하게 준비되었다.
따뜻한 5월과 같은 날씨에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꽃의 향기가 바람에 가득하고 새의 지저귐이 푸른 하늘을 수놓는 날.
‘지난밤 자이드만 아니었다면 기분까지 완벽했을 것 같은 상서로운 아침이네.’
어젯밤 꿈까지도.
‘어쩐지 느낌이 좋았지. 어제 꿈도 예지몽 같았는데…….’
꿈의 내용을 되짚어보며 화장대에 앉았다. 얼마 후 엘리제는 마가렛과 시에델의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완벽한 성녀의 모습이 되어 시에델의 커다란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녀가 시에델에서 데뷔탕트를 하였던 그 장소에서 오늘은 성녀로 인정받게 될 예정이었다.
푸른 정령의 힘을 신성시하는 시에델답게 곳곳에 파란색 크리스털과 리본을 달아 연회장은 무척이나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그곳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흰 베일을 쓰고 등장한 엘리제는 호칭만 성녀가 아니라 당장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결혼식의 신부 모습과도 같았다.
시에델의 모든 귀족들이 황홀한 표정과 감탄으로 그녀를 맞이하였다.
“엘리제 님을 성녀로 모시는 대관식을 거행하겠다.”
왕 페르만의 선포와 동시에 그녀를 위한 식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
밤새 성하의 뒤를 밟고 염탐한 미카일이 아직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대관식에 늦지 않게 가봐야 한다.’
지금쯤 시작하지 않았을까? 마가렛이 보낸 서신에 따르면 엘리제의 대관식이 오늘이었다.
데몬의 붉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가렛의 서신에는 한밤에 찾아온 앙큼한 왕태자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특별한 성과가 없지만 이대로 시에델로 향해야 할까 고민하던 데몬은 프시케를 다시 한번 찾아갔다. 하루 사이 특별한 일은 없었다는 황후의 말에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폐하께 혹시 조금 의아한 점은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의아한 점? 그 말에 프시케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보다……. 의아한 점이라 하니 하나 떠오르는데요.”
프시케가 유난히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끔…… 성하께서 성수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성수가 달갑지 않아요.”
확실히 의아했다. 헬리오를 향한 신심이 깊은 프시케가 그가 사용하는 성수가 달갑지 않다니, 믿기 어려운 고백이었다.
“……혹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건 좀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타나가 나타난 날 폐하께서 성수를 드시고 주무셨는데, 황궁이 무너지는 그 소란 속에도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깨지 않으셨거든요.”
“그게 성수 때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제 느낌으로는요. 하지만 이건 추측일 뿐입니다. 흑마법사가 황제 폐하를 뵙자마자 무언가 술수를 부렸을 수도 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타나의 손에 죽고 없었다.
“어쩌면 그때 남은 흑마법의 기운이 폐하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성하의 성수가 폐하께 안 좋은 영향을 끼쳤을 리 없으니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흑마법은 그 주인이 되는 자가 죽으면 주술과 효과 역시도 모두 연기가 되어 사라지니까요.”
“!”
아직까지 효과가 남아 로안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성하 말씀대로 폐하는 마음의 병이신 걸까요?”
“…….”
주술을 마시고 흑마법사에게 몸이 조종당했던 엘리제.
성수를 마신 날 취한 듯 잠들고 그 이후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로안.
두 사람 모두 밤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이 과연 우연일까?
“제가 황제 폐하를 좀 뵈어야겠습니다.”
“지금이요?”
***
창문 너머 멀리서 지켜본 로안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로안의 몸 안에 찰랑이는 어둠의 기운이 붉은 눈으로는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 흑마법의 주술이었다.
‘하지만 왜?’
게다가 말도 안 된다.
그가 흑마법을 사용한다니. 신성국의 왕이며 이 세상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잠깐만.’
데몬은 얼마 전 엘리제를 살리기 위해 흑마법을 사용하려 하였던 자신을 떠올렸다.
마력도 흑마법의 주술을 사용하면 흑마법으로 변해버린다.
신성력을 가진 이가 흑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그 힘은 더 이상 신성력이 아니게 된다.
‘그건 흑마법이지.’
사용자가 흑마법사의 모습을 띠지 않고 있을 뿐.
‘그렇다면…….’
로안이 살아 있는 증거라면, 이제 남은 수수께끼는 하나였다.
‘도대체 성하께서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