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밤 시중
(9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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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밤 시중
2022.09.22.
‘로안이 설마 흑마법에?’
그러나 타나는 죽었다.
분명히.
데몬이 그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러니, 흑마법사가 사라진 지금 로안이 마치 흑마법의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우연히도 로안의 증상이 주술에 걸린 사람과 같거나…….’
데몬의 짙고 잘생긴 눈썹이 조금 더 위로 휘었다.
‘예상했던 대로 흑마법을 사용하는 이가 더 있거나.’
침착하게 들어 올려진 붉은 눈이 황후를 바라보았다.
“낮에도 그런 증상이 있으십니까?”
“종종 낮에도 그러실 때가 있지만 누군가 부른다며 두려워하시는 것은 밤에 확실히 심하십니다.”
밤. 흑마법은 밤에 그 기운이 더 강해진다.
“그래서 성하께서 거의 매일 밤 오셔서 잠드실 수 있게 도와주고 계세요.”
“성하께서요?”
붉은 두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타나와 대치한 두 번의 차이점에 대해 이미 생각해보았다. 장소가 황궁이라는 것이 같았고 상황도 비슷했다. 데몬과 타나 외에 전투력이 비슷한 상대가 없다는 점도.
오히려 두 번째 전투에서 타나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팔이 한쪽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전보다 강했고, 확실히 보이지 않는 힘이 타나를 돕는 느낌이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황궁에 신성국의 왕과 사제들이 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사제들 중 누군가이지 않을까 짐작은 했었지만…….’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성하께서 오셨을 때는 확실히 황제 폐하께서 괜찮아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신성력을 사용하시니 금방 편안해지시고 곧 잠드십니다.”
마력이든 신성력이든 특별한 능력들은 사용하는 이의 의도에 따라 편안함과 잠을 불러오기도 한다.
‘내 기우일 뿐인가?’
최강의 신성력과 흑마법이라니 아무래도 그 조합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은 결정적인 무언가가 없다. 뒷받침할 증거도.’
고개를 기울이며 데몬이 턱을 괴는 찰나에 방 밖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는 이만 물러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이 터서 제법 주위가 밝아졌지만 여전히 어둠과 붉은 하늘이 섞인 새벽이었다.
프시케는 이 새벽하늘을 닮은 붉은 눈동자와 인기척이 느껴지는 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다시 창문으로 나가는 데몬을 향해 프시케는 엘리제에게 안부 전해달라 부탁했다.
“황제 폐하는 제가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가 창문의 높이가 무색하게 가볍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소리도 없이.
“!”
뛰어내린 사람이 아니라 바라본 사람이 기겁하여 숨을 참았다. 무사히 지상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그림자를 본 후에야 프시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황후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후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그녀를 깨우러 온 시녀장이었다.
***
“데몬!”
“별일 없었나?”
약속 장소에서 만난 데몬과 미카일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다행히도. 성하께서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많이 회복되셨어.”
“자네의 도움이 컸나 보군.”
미카일은 헬리오를 제외하고는 사제들 중에서도 신성력이 가장 강했다.
“내 덕인 것이 아니라, 정말 상태가 많이 호전되셨던걸.”
“……그래?”
“응. 황후 폐하는 잘 뵙고 왔나?”
데몬은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부탁의 말을 꺼냈다.
“어려울 것을 알지만, 성하를 미행해줄 수 있나?”
“……뭘 하라고?”
지난번엔 도둑질을 시키더니, 이번에는 모시는 왕의 뒤를 밟으라니 도대체 이 친구가 오랜 우정을 어떻게 써먹는 것인가 싶어 미카일이 큰 눈을 끔뻑거렸다.
“데몬.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성하는 내가 오랫동안 곁에서 모셔왔던 분이야.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면 내가 먼저 알았을 거야.”
미카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혼자이신 성하를 지켜본 적은 없지 않은가?”
“그건 당연하잖아.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미행 말고, 염탐을 부탁해.”
“뭐?”
이런. 친우 돕다 까닥하면 신앙과 직업을 동시에 잃게 생겼다.
***
벌써 시에델에 온 지 이틀이 되었다.
대관식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오전에 일어나 마가렛과 함께 시에델을 한 바퀴 돌며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우리의 사업 업무를 처리하였다.
“아휴! 그동안 뒤보리 크림 찾는 손님들을 번번이 빈손으로 가시게 하여 죄송했는데 다시 납품 가능하다니 잘된 일입니다!”
벌써 매출 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인지 상점 주인의 입꼬리도 함께 올라갔다.
방문하는 상점마다 우리 물건을 목 빠지게 기다린 주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공급량이 많지 않았는데 그동안 우리가 물건을 생산하지 않아 의도치 않은 품귀현상으로 뒤보리 크림의 몸값은 훨씬 더 높아져 있었다.
“말씀처럼 되었네요? 걱정했는데 오히려 상품값이 뛰었어요!”
“그러게. 운이 정말 좋았다!”
그만큼 크림의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에 공백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떨어지지 않은 거겠지.
거의 망했을 거라 생각해서 마가렛에게 빈 깡통 사업을 양도한 것일까 봐 미안했는데.
‘깡통이 아니라 돈주머니라서 참으로 다행이다.’
“말이 나왔으니 드리는 말이지만, 제가 엘리제 님이 남기신 편지와 권리양도 문서를 보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 줄 아세요?”
그렇게 시작된 마가렛의 잔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마가렛 이런 성격이었어? 언니한테 혼나는 기분이네.
“그래도 대단하다 마가렛. 그 와중에도 남겨놓은 정령수로 크림을 만들고 있었구나.”
“그럼요……. 누가 믿고 맡기신 건데요.”
대답하는 마가렛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침대 아래에 만들어 놓고 가신 정령수들 발견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정말 미안해.”
내가 주고 간 거라 한 시도 소홀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마가렛에게 미안하고 그만큼 또 고마웠다.
“이제 이 서류는 다시 돌려드릴게요.”
언제 챙겼는지 뒤보리 크림 소유권 문서를 마가렛이 내밀었다. 설마 항상 들고 다닌 건가?
“아냐. 여전히 마가렛 거야.”
“네? 저는 받을 수…….”
“내가 대공비가 되더라도 그 사업은 마가렛에게 맡기고 싶었어. 나의 비서님이 좀 유능해야 말이지.”
내가 쑥스럽게 웃자 마가렛이 더욱 커진 눈망울로 촉촉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감동했나? 내게 정말 돌려줄 생각이었나 봐.
“감……동했어요. 엘리제 님…….”
아, 역시.
“예전부터 마가렛에게 보너스 두둑이 챙겨주고 싶었어. 뒤보리 크림은 우리의…….”
“그거…… 말고요, 엘리제 님.”
응? 그거에 감동한 거 아니었어?
“대공가의 안주인이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이요!”
“어? 그, 그거?”
맞다. 내가 데몬에게 청혼 받은 거는 말 안 했으니 마가렛 몰랐겠구나. 아니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반지도 이렇게 끼고 있는데?
반짝이는 붉은 보석이 박힌 얇은 보물이 나의 왼손에 잘 끼워져 있었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마가렛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 반지가 청혼반지였군요! 혹시나 그러지 않을까 얼마나 기대했는지 몰라요!”
“그럼 예상했던 거 아냐?”
“하지만 그 반지를 어느 분께 받으신 건지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구나! 혹여 데몬 외에 다른 이에게 받은 반지일 수도 있지.
“물론 대공 각하께 받으신 것이기를 빌고 또 빌었지만요.”
미소 짓는 마가렛의 두 볼이 발그레해진다.
어쩐지 쑥스러워 나도 모르게 반지 낀 손을 흔들며 웃었다.
“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임자가 있는가 보다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귀족에게는 반지가 그냥 액세서리이기도 하니까요.”
그런가? 반지 끼면 모두 약혼이나 결혼했구나 생각할 줄 알았는데.
게다가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다.
“설마, 딱 봐도 의미 있는 반지로 보이는데 상관없이 들이대는 사람이 있겠어?”
에이. 없을 거야, 그런 사람.
***
왕궁으로 돌아와 오후에는 왕후 마마와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다.
“시에델에 그 뒤로 이상한 낌새는 없었나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왕후 마마께 루시아 공주와 시에델의 안부를 물었다. 루시아가 좀 못되긴 하지만 아직 어리기도 하고 지난번 고생했으니 좀 걱정도 되었다.
“전해주신 정령수 덕분인지 왕궁은 안전했습니다. 그 뒤로 루시아를 찾아오는 수상한 기운도 없었고요. 모두 엘리제 님 덕분입니다.”
미로니카를 위협하던 흑마법사는 내 손으로 없앴으니, 같은 이가 시에델에도 찾아왔던 거라면 이제 이곳도 안전할 것이다.
“별일 없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제가 대관식을 위해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엘리제 님께서는 참석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레이스의 친절한 대답에 마음이 더욱 놓였다. 이렇게 태평한 세월을 보내도 되나 싶을 정도다.
‘데몬은 바쁘겠지?’
벌써 못 본 것이 이틀이었다.
‘어서 대관식을 마치고 보러 가고 싶다!’
그런데 정말 마가렛 말대로 사람들은 별로 내가 낀 반지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다. 왕후 마마께서도 분명 아까 힐끔 바라보신 것 같은데 별말씀이 없으신 걸 보니.
뭐, 나로서는 남들이 관심을 가져주든 아니든 사실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지만.
아니,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건가?
그때, 노크와 함께 왕후 마마의 방으로 자이드 왕태자가 들어왔다.
“자이드 왔구나! 어서 와라.”
“두 분 대화 중이셨군요. 엘리제 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말을 듣고 여쭐 것이 있어 왔습니다.”
다정하게 모후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천천히 말하는 모습에서 처음으로 왕태자다운 기품이 느껴졌다. 잘생긴 그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니 더욱 그 모습이 근사해 보이는 것 같다.
물론 나의 데몬이 훠얼씬 멋져서 비할 바가 아니지만.
“엘리제 님.”
“아, 네.”
“오늘은 대관식 전날이니 특별히 주무시기 전 시중을 좀 들어드리고 싶은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시중이요?”
대관식 전에 피부관리라도 해주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신앙 의식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종교적인 종류의 시중인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꼭 해야 하는 것이냐 물었더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받아주면 좋겠다는 왕태자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럼 받아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준비해 놓겠습니다.”
자이드가 다시, 나와 왕후 마마께 인사를 하더니 그대로 방 밖으로 물러났다.
정말 그 용건으로 왔었는지, 대답을 듣고는 바로 나가버린 것이다.
‘무슨 시중이길래 그러지?’
몇 시간 후, 그 시중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 줄은 맹세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저녁이 지나 밤에 가까워지자 토리와 로떼를 재우고 마가렛과 막 잠자리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방문을 두드리고 나타난 이는 얇은 침의를 걸친 자이드였다.
“엘리제 님.”
어쩐지 잠긴 듯 그윽한 목소리와 시선으로 자이드가 나를 바라보았다.
옷차림을 보니 때를 놓친 것이 미안해서 잠잘 시간인데 들렀나 싶었다.
‘내가 먼저 눈치껏 거절해주는 게 좋겠지?’
“오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좀 늦은 것 같은데 저는 괜찮으니 다음이 어떠세요?”
그러자, 믿기 어려운 말이 자이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이 적당한 때라, 지금 온 것입니다.”
“네?”
속이 비칠 듯 얇은 옷감이 성큼 나에게로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 나풀거리며 흔들렸다.
“제가 엘리제 님의 밤 시중을 들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