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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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흔적
2022.09.19.
엘리제 곁에 로안도 데몬도 없다니,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미로니카의 황제가 생각보다 쉽게 그녀를 놓아줬군. 대공이 무슨 수라도 썼나?’
엘리제 혼자 독립을 이루기는 힘들었을 텐데.
대공이 도와준 거라면 왜 시에델에 그녀를 혼자 보냈을까?
‘이유가 뭐든 내 입장에서는 고맙군.’
엘리제는 곧 대관식을 통해 성녀가 될 테니 자이드는 그 뒤로 그녀가 시에델에 머무는 동안 천천히 매일매일 다가갈 생각이었다. 본래 옷 젖는 줄 모르는 가랑비가 더 무서운 법이다.
‘내게도 기회가 왔구나.’
드디어. 기다리고 고대한 보람이 있었다.
‘그럼 뭐부터 해 볼까?’
***
미로니카 황궁에 동이 트고 이른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황가의 일원들이 깨기 전에 먼저 아침을 준비하는 이들 덕에 자연스레 복잡해지는 그 안으로 데몬과 미카일이 섞여 들어갔다.
“나는 성하께 바로 갈게. 자네는?”
“황후 마마를 먼저 몰래 뵙고 흔적을 찾으려고. 다음 자정에 그곳에서 만나.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응. 자네 먼저 뭔가 발견하고 시에델로 간 걸로 알게.”
“나 역시.”
미카일이 그 시각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성하와 관련된 일이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뜻이 될 것이었다.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의 의중을 파악한 오랜 벗은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으니, 그럼 결혼 후엔 대공비가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은 못 했었는데, 갑자기 여유가 생기니 그 생각부터 든다.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 엘리제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정말 그답게 정직하고, 꾸밈없어 더 멋졌던 청혼이었다.
지금처럼 죽음 걱정 없는 상태에서 청혼을 받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의 눈빛과 음성을 떠올리기만 해도 열이 올랐다.
‘벌써 보고 싶다.’
그 없이 이렇게 나 혼자 멀리까지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마가렛과 토리, 로떼가 있어서 다행이지 혼자였다면 정말 데몬이 몹시도 그리웠을 것 같다.
“아! 일단 시에델 오니까 몸이 가볍긴 하다.”
마치 온몸에 달고 있던 모래주머니를 뺀 것 같은 기분? 아니, 무거운 롱 코트나 점퍼를 입고 다니다 벗은 느낌. 여하튼 몸이 가볍고 생각도 밝아진다.
“정말 그러셔요?”
“응. 오니까 확실히 몸이나 기분은 산뜻해.”
‘이래서 정령의 힘을 가진 이들이 시에델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했구나.’
미로니카에 있을 때는 데몬의 입맞춤이나 접촉이 있어야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몸이 편하려면 시에델에 살아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있고 싶으면 힘들어도 미로니카에 있어야 한다는 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데, 고향에 온 것이 좋았는지 로떼와 토리가 침대 위에서 방방 난리가 났다.
“신났네? 토리, 로떼.”
“그러게요. 저도 엘리제 님과 다시 올 수 있어서 좋아요.”
“나도. 어딜 가나 마가렛과 함께면 좋겠어.”
“기뻐요. 부디 그렇게 해주세요.”
마가렛이 밝게 웃었다. 이제 정말 이들이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데몬과 정령의 힘이 이어준 나의 편.
‘역시 나는 이들 곁에서 살고 싶어.’
결혼도 미로니카에서, 살기도 그곳에서 이들과 살 것이다.
그러면 꼭 시에델에서 대관식을 올릴 필요가 있을까?
***
“꼭 성녀가 되어주셔야 합니다.”
그레이스 왕후 마마는 예상대로 나를 붙잡았다. 붙잡는 것에 끝나지 않고 다시금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내 손을 꼬옥 잡고.
“게다가 아시지 않습니까……. 시에델이 아닌 곳에서는 오래 살 수 없으시다는 것을.”
눈빛에 나를 걱정하는 진심이 느껴져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렇긴 하지만, 데몬이 계속 곁에 있어 준다면 미로니카에서 장수도 가능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데몬이 내가 힘들다 싶으면 손도 더 잡고, 그걸로 부족하면 입맞춤도 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 너무 좋은데? 결혼해도 부부 사이가 나쁠 일이 없을 것 같아!
‘아니지. 데몬과 사이가 안 좋아지게 되면 나는 곧 죽는 거구나.’
그건 그것대로 무서운 현실이다.
남편과 사이가 나쁘면 죽음이라니.
하지만 지금은 그와 뭘 해도 행복할 것만 같아서 솔직히 고민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걱정이 현실이 되려면 우선 그와 결혼부터 해야겠지.
흠, 그것보다 너무 데몬을 인간 치료제 취급하는 건가?
‘어쨌든 정했다! 성녀가 되더라도 역시 사는 건 미로니카에서 살아야겠어!’
“엘리제 님께서 저희 왕가를 지지해 주시고 성녀가 되어주신다면 정말 큰 기쁨일 것입니다. 저희가 엘리제 님을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미로니카의 다급했던 현실 덕에 시에델의 상황을 잊고 있었다. 지금 시에델의 왕 페르만 일가는 사실 나의 선택에 운명이 풍전등화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솔직히 저와 자이드는 아직도 엘리제 님과 가족으로 이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아, 맞다. 왕후 마마는 나를 딸로 삼고 싶어 하셨지?
단지 내 능력이 욕심나서가 아니라, 이분은 나를 정말 좋아하시는 거 같아. 아직도 그 마음이 그대로라니.
“말씀만이라도 무척 감사해요, 마마.”
절로 얼마 전 생사의 경계에서 본 현실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의 눈빛과 마마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이곳이 친정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왕후 마마의 따스한 미소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시에델만의 향기가 녹아든 것이 느껴졌다.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곳.
“언제든 필요하면 기대어주세요. 엘리제 님.”
“이미 의지하고 있는걸요. 대관식 준비하며 기다려주셔서 감사드려요.”
“저희의 영광입니다. 식은 언제가 좋으십니까?”
“저도 빠른 것이 좋긴 한데요…….”
빨리 그를 보고 싶으니까. 식을 마치고 얼른 돌아가서 데몬과의 또 다른 식에 대해 상의하고 싶으니까.
“그러시면 이틀 후가 어떠신지요? 이미 왕궁은 준비를 끝마쳤고, 도착하셨을 때 귀족들에게도 언제든 가능하게 미리 연락을 보내놓았습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하루라도 빨리 시에델의 성녀가 되어주세요.”
왕후 마마가 우아하게 활짝 나를 보고 웃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드셔도 저렇게 진솔하게 아름답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니. 문득,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가늠해 보기 위해 다시금 왕후 마마를 들여다보았다. 많게 잡아 봐야 쉰이실까?
‘저 연배까지 과연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내가 시한부라는 생각 자체를 버리자.
살아야지. 그러려고 죽음에서도 돌아왔는데!
살자,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
***
“대, 대공!!”
창문 앞에 선 데몬을 보자 프시케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랐다.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손님이 방문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시각이었다.
게다가 문이 아니라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제 담력이 커서 다행인 줄 아세요. 사신인 줄 알았습니다! 아직 죽기는 일러요.”
잠긴 창문을 열며 프시케가 소리 죽여 나무랐다.
시종이 깨우기도 전에 황후 프시케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사실 밤을 새웠다고 보는 것이 더 옳았다. 고민을 이어가다 동이 트는 것을 확인하고 결국 다시 책상에 앉은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가로 나타난 어두운 그림자에 당연히 놀랄 수밖에. 이 진중한 남자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여러 번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무례인 것을 알지만 이 시간에 직접 와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황후의 방으로 들어오며 데몬이 고개를 숙여 사죄하였다.
지금의 대공이 몸을 숨겨 황후를 남들 모르게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면 하나뿐이었다.
“엘리제와 관련한 것이군요.”
데몬이 짧게 긍정의 대답을 하며 품속에서 엘리제가 써준 서신을 꺼내어 전했다.
짧은 편지를 읽어내려간 프시케가 작게 감탄을 뱉었다.
“아아. 엘리제는 건강한가요? 살아있다는 서신을 받고 얼마나 놀라고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프시케는 다시 한번 눈시울을 붉혔다. 정말 엘리제에겐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를 입었다.
“꼭 만나서 제대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엘리제에게 검은 당분간 가지고 있어 달라고 전해주세요.”
가지고 있어 달라고? 되돌려 주지 말고?
데몬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의미냐는 뜻인 것을 눈치챈 프시케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성하께서 그 검을 신성국으로 다시 가져가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해서요.”
엘리제가 타나를 없애면서 사용한 성검의 존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직접 현장을 본 데몬과, 타나의 죽음을 통해 성검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안 프시케와 헬리오, 마지막으로 대공가에 있으면서 검을 직접 본 미카일이 다였다.
“엘리제가 검을 사용하기 전에도 성하께서는 성검을 돌려받고 싶어 하셨습니다.”
“검을 사용하여 흑마법사를 처단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마도요.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런데…….”
프시케가 생각에 잠기며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눈을 들어 다시 데몬을 바라보았다.
“엘리제가 그 검을 사용한 이후에도, 성하께서는 검을 찾으셨습니다.”
성검을 되찾으려는 목적이 단순히 흑마법사를 없애기 위함이었다면 엘리제 덕에 그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후에 검을 찾을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성하께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프시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눈을 바라보는 녹색 눈이 투명하고 맑았다. 하지만 약간의 불안이 서려 있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요. 순수하게 신성국의 보검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실 수도 있으나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 번의 회귀를 거치며 가지게 된 그녀만의 육감에 가까웠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과거는 불안과 의혹을 남겼고, 프시케는 가능하면 그런 의아함은 풀어가려고 애썼다.
그래야 예측하고 대비할 수 있는 미래의 폭이 자신의 통제 가능한 선 안에서 유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이미 그 범위를 한참 넘어섰다. 그러니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엘리제의 주검이 사라진 자리에는 혈흔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데몬이 정신없이 그녀의 시신을 대공가로 옮길 때까지 그녀의 손에 검이 그대로 쥐어져 있었으니까.
헬리오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그 현장에 다녀왔다.
엘리제가 타나의 몸에 검을 찔러 넣은 그곳에.
“성검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믿기 어려우셨겠지요. 황국의 누군가가 사용했다면 아마도 대공이라 생각하셨을 겁니다.”
“…….”
그녀에게 정령의 힘이 있다는 것을 프시케도 얼마 전 엘리제가 말을 해줘서 알았으니 헬리오 역시 그전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이제 그는 엘리제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나, 검을 사용한 사람이 실은 엘리제가 아닌 데몬이라 추측하고 있지 않을까?
“황후 폐하, 일단 조금 더 지켜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데몬이 신중하게 말했다. 프시케의 감만 믿고 판단하기에는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네. 그리고…….”
프시케가 아직도 어두운 낯빛으로 마지못해 대답하며 말끝을 흐리자, 데몬의 눈이 의아함에 조금 커졌다. 황후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아예 잠을 자지 못한 모습인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 더 있으십니까?”
“맞아요. 제가 불안한 또 한 가지 이유는 황제 폐하의 상태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도 충격을 많이 받으셨겠습니다.”
엘리제의 죽음으로 아직 힘든 상태인 모양이라 생각하고 데몬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맞아요. 엘리제가 죽은 것으로 알고 계시니까요. 그래서인지 그 이후로 밤마다 공포에 떠십니다. 자꾸 누군가 부른다고 하시면서요.”
“!”
그 말에 데몬의 눈빛이 순식간에 형형하게 변했다. 잘 만들어진 조각상과 같은 얼굴이 조금 전과는 다르게 심각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밤에 누군가 부른다고요?”
그 이야기는 흘려들을 수가 없다.
엘리제가 흑마법의 주술에 걸렸을 때 공포에 떨며 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