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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다시 와도, 당신 (91/126)


91. 다시 와도, 당신
2022.09.15.



“아니면 그 흑마법사에게 동료라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타나의 뒤를 봐주거나 도움을 주는 동료나 배후가 있었다는 뜻인가?


“동료나 배후라…….”

그럴지도. 데몬은 말을 아꼈다.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확인하기 위해서는 황궁으로 가봐야 할 것 같군.”

하지만 그 과정에 엘리제가 노출되는 것은 위험했다.

만일 타나를 도왔던 누군가가 정말 있다면, 그가 또 다른 흑마법사이든 타나의 신이든 간에 엘리제는 성검을 이용하여 타나를 없앤 장본인이니 보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황궁에 알리지 않으면 나중에 큰 화를 당하게 될지도 몰라.”

미카일이 걱정하자,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엘리제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만 말씀드리면 괜찮을 거예요. 비밀도 지켜주시고, 국장도 해결해주실 거고요. 제 서신을 좀 전달해주세요.”

 

***



“황후 폐하, 크레미언 대공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로안 걱정만으로도 머리가 무거운데 데몬마저 엘리제의 시신을 가지고 대공가의 문을 닫았던 터라, 그곳에서 온 연락이라니 프시케는 서둘러 서신을 건네받았다.


“어서 주게.”

서신을 열어본 순간 프시케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엘리제가 살아 있다고?’

무척이나 충격적이었지만 편지는 엘리제가 쓴 것이 분명했다. 프시케와 엘리제 둘밖에 모르는 ‘빌려준 물건’과 열쇠에 대한 감사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찾아가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을 전하고 싶었지만, 프시케는 주먹을 꽉 쥐며 참았다.

서신의 마지막에 엘리제가 위험할 수 있으니 아직 비밀로 해달라는 데몬의 당부가 추신으로 있었다.


‘신이시어! 살아 있다니, 정말 정말 다행이구나!’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몬이 흑마법을 사용한 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데몬에 대한 소문이 사실일까 봐 은근히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프시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은 가끔 기록으로 본 적이 있긴 했다.


‘하아. 일단 나중에 직접 만나서 물어봐야겠다.’

며칠간 로안과 헬리오 걱정으로 애간장이 녹아내릴 것 같았는데, 그녀에게 대공가의 서신은 참으로 기운을 주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폐하의 상태는 좀 어떠신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곁을 지키는 시녀장에게 물었다.


“어제보다는 좀 편안하신 듯합니다. 성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래, 곧 내가 뵈러 가겠다고 미리 말씀 올려주게.”

타나가 나타난 밤 혼수상태였던 로안이 다음날 깨어난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프시케는 한고비 넘긴 기분이었지만, 엘리제의 죽음을 겪어서인지 로안의 상태가 예전 같지 않았다. 아니, 어딘가 이상했다.


‘엘리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아시면 혹시 좀 나으실까? 밤이 되면 왜 그리 불안에 떠시는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공포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았고 원인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새 헬리오가 가능하면 로안의 곁에 머물며 신성력을 사용하고 기도를 계속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성하의 건강도 걱정이구나.’

타나의 공격을 받았던 헬리오 역시 아직 회복 중이었다.

처음 황궁에 도착하여 검은 분수의 물이 헬리오의 팔을 덮쳤을 때는 분명 그의 신성력이 순식간에 상처조차 사라지게 할 만큼 강력했었다.

그런데 타나의 공격이 헬리오에게 치명상이었는지 이번 회복은 매우 더디게 느껴졌다.


‘그동안 무리하여 약해진 상태에 공격을 받으셔서인가?’

로안과 헬리오의 상태가 걱정되면서도 프시케는 계속 찝찝하게 마음에 걸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

엘리제의 국장이 취소되고, 대공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에게 장례를 맡기겠다는 답신이 다음 날 대공가로 전달되었다.

대신 엘리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자작의 작위를 수여하는 것으로 황궁은 도리를 다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프시케의 배려였다.


“잘 되었습니다.”

“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이제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저는…….”

데몬이 그답지 않게 망설였다.

마음 같아서는 엘리제에게 어서 승낙을 받고 하루라도 빨리 혼인을 올리고 싶었다. 이번에 엘리제를 잃어 보니 더욱 간절하게 살아 있는 모든 순간 그녀와 하나이고,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나 당분간 미로니카에서 엘리제는 ‘죽은 사람’이어야 한다.

결혼식을 비밀리에 올릴 수도 있겠지만 소중한 그녀와의 결혼을 그리 급히 얼버무리듯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처해하고 있는 붉은 두 눈을 엘리제가 바라보며 조용히 그에게 다가왔다.

하얗고 따스한 손으로 데몬의 얼굴을 잡고는 도톰한 입술에 향기로운 입을 천천히 맞추었다.


“제 대답은 당연히 승낙이에요.”

데몬의 얼굴이 순식간에 기쁨으로 환해졌다. 금세 행복한 강아지 얼굴이 된 그를 보고 엘리제가 쿡 웃음소리를 냈다. 웃는 그녀의 모습이 눈부시게 사랑스러워 데몬의 귀 끝이 붉어졌다.


“하지만 먼저 한 약속이 있어서 지키고 오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 안 괜찮았다. 보내기 싫은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데몬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고 시에델에서 그녀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보내주어야 하겠지.


“그럼 대관식 이후에 저와 결혼식을 올려주십시오.”

“기꺼이요.”

“……저를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음에서 돌아왔으니 그녀의 가치관이나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죽음의 근처만 다녀와도 깨어나서 딴 사람처럼 달라지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그래서 데몬의 마음 한구석에 말 못 할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엘리제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저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정령의 힘이었다면…….”

엘리제가 말을 시작하자 붉은 눈이 그녀의 모든 것을 다 간직하겠다는 듯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녀만을 담고 있었다.


“그 힘을 준 사람은 당신인걸요. 죽어서 헤매는 동안에도, 다시 돌아와 보아도…….”

“…….”

“저는 결국, 당신이었어요.”

기다렸던 답이 흘러나온 입술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몇 번을 더 다시 와도, 제 답은…….”

데몬은 참지 못하고 그 사랑하는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입안으로 사라진 대답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함께 가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마가렛과 토리, 로떼가 있잖아요. 그리고 이것도요.”

엘리제가 손을 보이며 들어 올렸다.

네 번째 손가락에 그가 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반지에 마력을 담아놓았다.

그의 눈과 입이 만족스럽게 휘었다.

반지가 엘리제를 큰 위험에서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 역시 각성으로 강해졌고 시에델은 정령의 힘이 흐르는 나라이니 미로니카보다는 안전할 것이었다.


“황궁 조사가 끝나는 대로 저도 시에델로 가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몸조심하십시오.”

“각하께서도요. 그리고 편지 전달도 부탁드려요.”

엘리제는 프시케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시에델에 다녀온 후 검을 직접 돌려주러 가겠다고 한 차례 더 서신을 적었다. 날이 생긴 성검은 아직 대공가에 있었다.

그녀가 다시 살아난 것은 우선 비밀이었으므로 대공가에서도 소수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엘리제 일행은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시에델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몸을 숨긴 엘리제와 마가렛이 마차에 오르고 조용히 출발하였다. 배웅을 마친 데몬과 미카일은 말에 올라 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타나에게 그녀의 전투를 도운 동료나 배후가 있었다면, 황궁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흑마법의 증거가 과연 남아 있을까?”

“이미 없애거나 철저히 숨겨놓았을 테지.”

쉽게 찾을 수 있었더라면 누군가 이미 눈치를 채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감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확인이 필요했다.


“그런데 성하께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신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고 해. 안 그래도 황궁에 가서 바로 성하를 뵙고 회복을 도와드릴 생각이네.”

“조사도 하고, 성하도 치유해드리려면 자네도 꽤 바쁘겠군.”

“맞아. 누구 덕분에 말일세.”

“친구를 참 잘 두었군.”

흑마와 백마가 나란히 사이좋게 달렸다. 밝은 달이 미로니카 황궁 위에 떠서 달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



“프, 프시케…….”

“폐하, 괜찮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자꾸 누가 나를 부르오.”

로안이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었던가. 그녀가 황후가 된 이후 처음이었다. 프시케의 손을 잡은 로안의 벽안이 공포와 불안으로 물들어 있었다. 밤이 되면 심해졌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그런 듯했다.


“폐하의 상태를 제가 좀 보아도 되겠습니까?”

“성하! 어서 오십시오.”

늦은 밤인데도 로안이 걱정되어 찾아와준 헬리오가 고마워 프시케가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몸을 떨며 로안이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폐하. 이제 흑마법사는…… 없으니까요.”

다정한 음색으로 헬리오가 로안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밝은 빛이 손에서 쏟아지자 로안의 얼굴이 점점 편안해지나 싶더니 잠에 빠져드는 것이 보였다.


“이제 좀 주무시지요…….”

헬리오의 말에 로안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편히 잠들었다.


“성하, 오늘도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어서 마음을 강하게 가지셔야 할 텐데요.”

헬리오는 로안에게 마음의 병이 자리 잡았다고 했다. 하긴 충격이 연달아 컸을 테지. 집착하던 애첩에게 버림받고, 흑마법사에게 납치될 뻔하고, 결국 엘리제가 목숨을 잃었으니까.


“이렇게 매일 고생하시게 하여 송구합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하루빨리 신성국으로 돌아가셔야 할 텐데 저희가 붙잡게 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흑마법사가 사라졌으니 헬리오가 미로니카에 머물 명분의 큰 부분이 사라졌다.

한 나라의 왕인 그가 언제까지 타국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안이 그때까지 괜찮아질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헬리오를 더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을 프시케는 알고 있었다.


“제가 없어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성수나, 다른 사제의 신성력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프시케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전에 다른 사제들만 남았을 때도, 성수를 로안에게 주었을 때도 결국 일이 일어났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언제까지 헬리오의 친절과 신성력에만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감사합니다. 황국에서도 자구책을 찾겠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할 사람은 로안이 아니라 자신인 것 같다.

***



“엘리제 님! 어서 오세요!”

하루 반나절의 마차 이동이 끝나자 엘리제와 마가렛이 푸른 초원과 숲의 나라 시에델에 닿았다. 왕후 그레이스가 정말 애타게 기다렸는지 종종걸음으로 엘리제를 맞으러 달려왔다. 뒤에 왕태자 자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왕후 마마, 별일 없이 건강하셨지요?”

“무척 걱정했습니다! 미로니카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들어서요.”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이 시에델까지 전해진 모양이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다행히 무사했습니다.”

엘리제가 그레이스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반갑게 맞으며 그레이스가 그녀를 왕궁 안으로 이끌었다.


“건강하셨습니까? 많이 기다렸습니다. 엘리제 님.”

자이드도 다가와 어딘가 더 깊어진 눈빛으로 웃으며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엘리제의 뒤를 스윽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모습이었다. 마가렛이 토리와 로떼를 데리고 마차에서 내릴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대공 각하가 함께 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상외였는지 자이드가 살짝 놀라며 물었다.


“아, 네. 각하께서는 이제 제 호위가 아니셔요. 제가 더 이상 황제 폐하의 첩이 아니거든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엘리제가 웃었다. 그 말을 들은 그레이스가 기뻐했다. 엘리제가 시에델에서 살기 위해 미로니카의 신분을 정리하고 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이드의 잘생긴 눈이 반가운 소식에 활짝 커졌다.


‘그럼 지금 엘리제 곁에 로안도, 데몬도 없다는 뜻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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