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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내게 키스하세요 (90/126)


90. 내게 키스하세요
2022.09.12.



 


‘데몬!’

사랑하는 그를 혼자 남겨두고 온 사실이 떠오르자 빠르게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가야 해!’

다시 그에게로 가야 한다. 나는 원해서 이 작품 속에 빙의한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기 위해. 내가 원하는 사랑을 해보기 위해.

그래서 죽음을 맞자마자, 내 의지로 이곳 작품 속에 들어왔었던 거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 사람은 데몬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주변 소음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라도 내가, 과정 중에 폭주한다면 이 검으로 나를 찔러줘.”

내가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그 떨리는 저음.

그런데 그가 그 감미로운 목소리로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 하고 있잖아!’

 

***

이제 곧 밤 12시였다.

엘리제가 성검을 사용하고 목숨을 잃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의 시작.

데몬은 그 순간에 사용할 주문을 확인하기 위해 마법서를 다시 펼쳤다.

바로 옆에 선 미카일의 목소리가 떨렸다.


“데몬……,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없어. 확실히.”

너무나 단호한 대답에 미카일은 다시금 말을 잃었다. 이러다 엘리제에 이어 데몬까지 잃을까 두려웠다.


“자네가 없으면 미로니카는 멸망할지도 몰라.”

“……내 세상은 이미 사흘 전에 멸망했어.”

그녀가 없으니까.

안경 너머 미카일의 두 눈에 충격과 슬픔이 역력했다.


“자네에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가?”

“미안해, 미카일. 하지만 그녀가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나를 미치게 만들어. 이대로는 살아도 끔찍한 지옥일 뿐이야.”

데몬의 붉은 눈이 일렁였다. 절망을 가득 담고.

차라리 다른 이들의 애정을 잃고 원망과 저주를 받으며 결국 죽어가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데몬은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내가 신께 기도를 드려보겠네. 혹시라도…….”

“신이라…….”

신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엘리제를 살려달라는,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놓겠다는 기도를 지난 며칠간 수십, 아니 수백 번도 더 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남들이 악마라 부르는 이도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내게는 신일 거야.”

선이냐, 악이냐가 중요치 않았다.

신이든 악마이든 자신에게 엘리제를 지킬 힘을 주었더라면, 그녀를 살릴 수 있게 해준다면 그 존재를 숭배할 것이다.


“미쳤군.”

데몬의 속내를 들은 미카일이 탄식했다.


‘이래서 데몬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었구나.’

사랑하는 부인을 잃고 다시 살리지도 못한 채 흑마법에 잠식되어가며 그는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을 악마를 뜻하는 ‘데몬’이라 바꾸어버렸다.


“시간이 되었어.”

데몬이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 엘리제의 곁으로 다가갔다.

차갑지만 여전히 붉은 그녀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내리고 간절하게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눈을 살며시 감자, 또 그 끔찍한 찰나가 선연하게 떠올랐다.

타나의 거대한 낫이 그녀의 허리를 스치는 순간, 눈앞의 그녀가 엘리제가 아니기를 얼마나 간절히 빌었던가!
자신이 그 자리에 대신하였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스러져 내리는 그녀에게 바로 입맞춤으로 자신의 모든 마력을 불어넣었다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지난 사흘간 지독하게도 자신을 탓하고, 원망했다.

그녀가 저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과거의 자신을 저주했다.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엘리제가 자기를 대신하여 죽겠다는 결심도 하지 않았으리라.

전투 중인 두 사람이 기척을 느낄 수조차 없게 빠른 속도로 다가왔었으니, 아마도 그녀는 상황이 그렇게 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지몽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라도 볼 것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그 꿈을 믿지 않게 만들 것을.


‘아니, 대공가에서 나오지 못하게 철저히 가둬두고 올 것을!’

차라리 그녀를 잃는 것보다는 그 모든 것이 나았으리라.

그러나 미칠 듯한 분노도, 저주도, 절망도 모두 거쳐 간 후에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아 수면이 맑아지듯 데몬의 생각이 하나로 정리되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고, 한 가지 행동만 달라졌어도 그녀를 살렸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겠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어차피, 이미 내 모든 것은 그녀의 것이었으니까.’

그저 자신이 곁에 없을 뿐, 본래 그녀의 것이 될 예정이었던 것들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나는 것뿐이다.

되살아나는 그녀가 정령의 힘을 여전히 가지고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살아나기만 한다면, 그녀가 숨 쉬며 이 세상을 살아가 준다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생각이고 엘리제에게 잔인한 결정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녀는 자신을 잊게 될 것이다.


‘차라리, 그녀가 깨어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좋겠다.’

공허한 눈빛으로 데몬이 엘리제의 몸 옆에서 흑마술의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



‘안 돼! 저 바보!’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기 전에 어서 되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감각은 돌아오고 있었는데 아직 어떻게 해야 깨어날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전에는 그냥 꿈을 꾸고 일어나는 거니까 저절로 되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완전히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인가?’

게다가 막상 그의 곁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걱정이 퍼뜩 치고 들었다.
이야기의 ‘정해진’ 결말.

나는 원작에서 죽는 인물이라는 것과, 데몬이 프시케를 사랑할 거라는 설정이 떠오르자 다시 숨이 막히고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잠깐만!’

그래, 정해진 결말!


‘그렇다면 처음부터 나는 데몬이 죽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거잖아!’

내 기억이 맞다면 결국 로안은 프시케에게 돌아가고, 데몬은 프시케의 곁에 든든한 아군으로 남는다.

그 말은 결말까지 그 세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 반드시 내가 대신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어!’

어차피 원작과는 달라졌다. 나는 이제 로안의 첩 엘리제가 아니다. 여전히 로안의 첩이었다면 죽음을 걱정해야 했겠지만, 이젠 아니었다.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그렇다면 난, 살아야겠어! 데몬의 곁에서!’

너무나도 쉽게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그때는 왜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왜 내가 죽어야 하는 운명이라고 그토록 쉽게 받아들인 걸까?


‘이번 삶은 빙의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내 의지로 직접 선택한 거야!’

그러니, 내가 살아내는 모든 선택과 결말 역시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운명과 역할이 정해진 작품 속 인물이 아니니까.


‘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이야기도, 정해진 결말도 아닌, 바로 나!’

그러자 갑자기 몸이 확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안에서 무언가 솟아오르는 느낌이 점점 시야가 밝아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폭발하듯 강력한 힘과 달콤한 향기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두 번 경험했던 각성 때와 같이.


‘아니, 더 강력해!’

몸이 흔들리며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듯 눈앞이 소용돌이쳤다.

***

데몬은 주문 외기를 멈추었다.

이제 막 시작된 주문이 잘못되기라도 한 것인지 무언가 이상했다.


“!”

마법서를 든 손과 엘리제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다 말고 엘리제의 몸에서 대신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어, 어찌된 일인가?”

미카일이 걱정하며 물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은 데몬도 마찬가지였다.


“모르겠어. 이렇게…… 빨리?”

아직 주문은 한참이나 남았는데! 아니, 이제 막 읽기 시작했으니 거의 주문이 발동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했다.

게다가 마법서에 적힌 것과 현상이 달랐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인가?’

불안함이 엄습했다. 아버지 때처럼 실패하면 안 된다. 엘리제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데!

미카일이 다급히 데몬을 말렸다.


“잠깐, 기다려봐 데몬!”

두 사람의 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타고 흘렀다.


“!”

엘리제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화악!

순간 갑자기 빛이 터지며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밝은 빛이 일었다. 어둡고 슬픔에 잠겨 우울하던 대공가에 갑자기 달콤하고 향긋한 그녀의 그리운 향기가 쏟아졌다.


“아!”

서서히 시야가 회복되었을 때, 데몬은 믿을 수 없는 모습에 홀린 듯이 눈과 입을 열었다.

눈앞에, 엘리제가 상체를 일으킨 채 앉아 있었다.

더욱 깊어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이 바보!”

정신이 멍하고 몽롱한 그를 향해, 지금 막 강림한 여신과도 같은 모습으로 그녀가 타박을 시작했다.


“나를 살려놓고 당신이 없으면 설마 제가 기뻐할 줄 알았어요?”

데몬의 붉은 두 눈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저는 가만히 있을 거라고…….”

“엘리제……!”

“지금 당장 이리 와서.”

물기가 어렸지만 단호하면서도 여전히 따뜻하고 여린, 그가 사랑하는 그 미성이었다.


“내게 키스하세요!”

영혼의 주인이 입맞춤을 명하고 있었다. 다시 따뜻한 음성과 저 아름다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데몬의 심장이 터질 듯 뛰고 꿈을 꾸고 있는 듯 몽롱했다.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멍하니 엘리제를 올려다보았다. 눈에서 저도 모르는 눈물이 흘렀다.

엘리제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조차 따스하고 은혜로웠다. 눈을 감은 데몬이 성녀에게 닿기 위해 안달하는 이처럼 그녀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그 향기롭고 달콤한 입술에서 다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자, 데몬은 그제야 살 것만 같았다.

지독한 가뭄 속에 타들어 가다 그 끝에 내리는 단비를 맞는 싹이 된 것만 같이.

눈물 섞인 그녀와의 이 입맞춤이 데몬에게 생명을 전해주었다.


 

***

이야기 속 왕자님의 입맞춤으로 죽음에서 깨어난 공주와는 다르게, 엘리제는 스스로 부활했다. 그리고 입맞춤을 명하긴 했지만, 엘리제가 데몬에게 입술을 내렸다.

그 모든 것이 고지식한 사제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런데 엘리제 님이 어떻게 깨어난 것이지?”

주술은 다 외지도 못했는데. 미카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엇보다도 비현실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카일은 솔직히 무척 염려되었다.


‘혹여 그녀의 몸에 다른 이의 영혼이 들어온 것이거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빈 껍데기인 것은 아닐까?’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다시 깨어난 그녀가 어딘가 전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느껴져서 미카일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운데 데몬이 전한 소식을 듣고 마가렛이 토리, 로떼를 데리고 왔다.


“엘리제 님!!!”

“뀨우!”

마가렛은 엘리제를 보자마자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엉엉 울었다. 토리와 로떼도 오랜만에 주인의 품에 안겨 뱅그르르 몸을 돌리며 한참을 기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저 모습을 보니 진짜 엘리제 님이 맞나 보군.’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다른 이가 엘리제의 육신에만 들어온 것이라면, 저렇게 토리와 로떼가 따를 리 없을 테니까.

두 동물은 안 그래도 엘리제가 가진 정령의 힘에 유난히도 반응하고, 흑마법의 기운에는 벌벌 떨었다고 마가렛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게다가 엘리제의 곁에 항상 있었던 마가렛 역시 살아 돌아온 엘리제를 보고 저렇게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이상했다면 마가렛이 더 먼저 느꼈을 거야. 아무렴 나보다 엘리제 님에 대해 잘 알겠지.’

어쩐지 붉어진 얼굴로 미카일이 두 여인과 반려동물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각성이었습니까?”

데몬은 엘리제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죽음에서 돌아온 그녀에게 가장 먼저 신체적 접촉을 했던 데몬은 그녀의 힘과 향기가 더욱 강해졌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

답을 알려주듯 엘리제가 조용히 답했다.

두 번의 각성 모두 그녀의 곁에 있었던 데몬이었지만, 이번처럼 황홀한 달콤함과 충족감을 주는 경우는 없었다. 이전 엘리제가 가지고 있던 정령의 힘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설마 각성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감격스러워 데몬의 음성이 떨렸다.

그녀가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와 주다니!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저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엘리제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녀의 각성에 데몬은 필수조건이다. 거기에 매번 추가로 무언가 달성이 되어야 새로운 단계의 각성이 완료되는 형식이었다.

첫 번째 조건은 사랑, 두 번째는 자신의 성장이었다. 세 번째는 무엇이었을까?

안 그래도 궁금했다. 죽었던 자신을 되살릴 만큼 강력했던 각성이었으니까.


“……희생이었나 보군요.”

“!”

데몬과 그를 향한 희생.


“그렇군요!”

마가렛도 맞장구를 쳤다.


“마치, 자신과 타인을 향하고 결국 서로의 희생으로 완성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알려주시는 듯하군. 모든 것이 신의 말씀과 같아.”

미카일이 미소 지으며 성호를 그었다. 엘리제의 각성 조건이 그가 모시는 신의 뜻과도 부합하여 흡족한 모양이었다.


“황궁에 바로 알릴지는 고민을 해보겠습니다.”

데몬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황궁에서 하루라도 빨리 엘리제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려 할 텐데 어떻게 하려고?”

미카일의 물음에 데몬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

이번 전투를 치르며 그만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있었다.


“타나를 상대할 때, 마치 무언가가 그녀를 방어하고 돕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그게 무슨 말인가? 타나가 믿는다는 신이 가호라도 해주었다는 말인가?”

사제답게 미카일은 그것이 신의 보호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마가렛은 평범한 사람답게 해석했다.


“아니면 그 흑마법사에게 동료라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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