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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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신과 함께
2022.09.08.
성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엘리제가 모든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푸른빛이 온몸을 감싸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달콤한 장미 향이 전장을 진동했다.
몸을 감싼 푸른 불꽃은 그대로 검의 손잡이를 통과해 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뻗어나갔다.
순식간에 형성된 푸른색 날이.
그대로 타나를 꿰뚫었다.
“크헉!”
몸을 통과한 곳을 통해 뜨거운 선혈과 함께 검은 연기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도대체, 윽, 어, 어떻게…….”
중얼거리며 떨리는 시선으로 타나가 눈앞에 이를 바라보았다.
성검을 사용한 이는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주술을 먹여 몸을 가진 적 있었던 ‘그녀’였으니까.
“나의 신……께서, 너희를…… 컥!”
신성한 검날 아래, 타나의 몸은 점점 스러지며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모든, 것이, 그분……의 뜻대로…… 될지어다.”
타나의 마지막 숨이 토해지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엘리제는 검에서 손을 놓았다.
스르륵.
“엘리제!!!!!!”
엘리제의 온몸이 반응하는 사랑하는 저음이 귓전을 가득 울렸다.
***
‘아아. 역시 이것이 나의 운명이었구나.’
부드럽고 하얀 몸에서 쉴 새 없이 뜨거운 피가 쏟아져 내렸다. 데몬은 엘리제의 몸을 안고 미친 듯이 달렸다. 황궁 안 어딘가에 있을 미카일을 향해.
‘살릴 수 있어. 지금이라면. 지금 당장 닿는다면!’
미카일에게 응급처치만 받고, 바로 시에델로 향해야 할까? 그곳은 정령의 힘이 있는 곳이니 어쩌면 조금이라도 치유가 빠를 수 있지 않을까?
평소의 마력이라면 당장 몸을 날려 하늘을 날 듯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력을 사용하여 타나를 상대한 직후였다. 그 역시 여기저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데……, 데몬.”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엘리제를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없는 세상이라면, 그에게는 세상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당신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쉼 없이 다리를 움직여 달리며, 데몬은 빌었다.
제발, 자신을 두고 떠나지 말아 달라고.
고통을 참는 데몬의 미간과 입술이 일그러졌다.
“……다정한 당신께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에 그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엘리제는 그의 품에 안긴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순간에도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잘생긴 턱선과 콧날이 눈부셨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넘기고 묻어 있는 먼지와 핏자국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미 지난번에 한 번 죽어본 적 있는데, 그때 나를 위해 울어주었을 이들에게 미안하다, 고맙다 인사도 못 했던 것이 한이었어요.’
기운이 없어 뱉지 못하는 말들이 쌓여갔다.
가족을 두고 왔던 것도,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한 것도, 마지막 인사를 전하지 못했던 것도 역시 모두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떠나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살아 있을 때 잘할 것을.
사랑한다 한 번이라도 더 말할 것을.
낳아줘서 감사하다, 동생으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인사라도 한번 해볼 것을.
아무것도 못 하고 죽었다.
‘그러니 당신께는 다 말하고 싶어요. 후회가 남지 않게.’
엘리제의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데몬의 얼굴에서도 피와 섞인 눈물이 비처럼 흘러 엘리제에게로 툭툭 떨어졌다.
이전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당신을…… 가장.
“……사랑했어요.”
나를 사랑해줘서, 나를 알아봐줘서, 믿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저는…….”
울컥. 엘리제의 입을 통해 한차례 더 피가 쏟아졌다.
“더는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아니요……. 말해야 해요.”
알거든. 지금이 아니면 절대. 전할 수 없다는 걸.
기회가 없을 거야.
나는 이제 곧.
죽을 테니까.
너무나도 사랑하는.
내 목숨보다도 사랑하는.
크레미언 데몬. 당신을. 남겨두고.
“그러니, 들어, 주세요.”
이제 숨도 편히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 엘리제가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진짜 엘리제가 아니에요.”
“!”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요.”
지금 이 상황에 사과를 한다고?
저를 얼마나 더 미치게 할 생각이십니까!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정령의 힘을 가졌던 이가 남긴 유언장이나 그녀의 달라진 성격 등을 통해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말을 꺼낼 만큼 그녀가 그 사실을 걱정하고 염려했을 줄은 몰랐다.
데몬은 가슴이 또 한 번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이렇게 쉼 없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인가. 그의 눈물이 품에 안긴 그녀를 따스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래요?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마음…… 졸였네요.”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엘리제는 마저 다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다른 세상에서, 왔어요.”
그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서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되레 미안해서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저……”
당신을.
“……정말로 많이.”
사랑했다고 말해야 해. 그리고 고백해 줘서 고맙다고. 청혼도 기뻤다고.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었다면, 기꺼이 결혼도 승낙했을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뜨거워지는 배 속이 그녀의 혀를 잡아당기듯 무거워 한 마디도 더 뱉을 수가 없었다.
온몸의 기운이 바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미카일!”
데몬이 드디어 발견한 미카일을 불렀다.
“데몬!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헬리오의 급한 고비를 넘기고 막 일어선 참인데 더 처참한 모습의 엘리제를 안고 데몬이 뛰어 들어왔다. 절망이 가득한 데몬의 얼굴에 미카일은 소스라치게 놀라 곧바로 두 눈을 감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곧 미카일의 손에서 따뜻하고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자, 엘리제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러나 데몬의 품에서 그녀는 이미 눈이 감기고 고개에 힘이 풀리고 있었다.
미카일이 하얗게 질려 더욱 강하게 빛을 쏟아냈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후두둑. 후두둑.
선혈과 함께 그녀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
“엘리제!!!!”
다시 한번 공간을 찢듯 포효하는 데몬의 절규가 이어졌다.
그녀가 원하던 대로.
그토록 사랑하는 그의 품에서.
엘리제가.
그녀가 죽었다.
***
그녀의 장례는 성대하게, 그러나 조용히 치러질 예정이었다.
미로니카는 황국을 구하고 흑마법사를 처치하다 목숨을 잃은 엘리제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녀의 죽음을 성스러이 기리고자 하였다.
누구보다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 한 프시케는, 엘리제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고 가까운 시일 내로 그녀를 미로니카를 구한 유공자로 정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엘리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로안은 엘리제가 죽은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으나 엘리제의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하루가 넘게 식음을 전폐했던 로안 역시 결국 프시케의 의견대로 장례를 치르라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엘리제의 시신을 가지고 있는 데몬이 그 모든 과정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났지만 데몬은 여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시신을 대공가 가주의 방에 두고 미카일 사제와 흑마술을 부리려 한다는 망설까지 돌았다.
“각하! 이러다 큰일 나시겠습니다!”
“데몬, 슬픔은 알겠지만 남은 이는 살아야 하지 않겠나…….”
걱정하는 목소리로 하임과 미카일이 데몬을 말렸다. 마가렛이나 미카일, 대공가의 사람들도 그녀의 죽음이 무척이나 슬펐지만 데몬이 걱정되어 티조차 낼 수 없었다.
엘리제가 이러라고 대신 죽은 게 아니지 않겠냐며 3일 밤낮으로 설득해봤지만 데몬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하루도 아니고 벌써 사흘이나 지났다.
그러니 그녀는 이미 편안한 상태가 되어 신과 함께 있을 거라고 미카일이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었다.
“저러다 각하마저 잘못되시기라도 하실까 걱정입니다.”
“하아, 어찌하면 좋겠는가.”
미카일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평생 데몬을 지켜봐 왔지만, 저토록 무섭게 어두워져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걱정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설마, 각하께서 정말 그 방법을 사용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
아니긴. 데몬에 대한 소문은 망설이 아니었다.
실제로 데몬은 엘리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엘리제를 되살리려는 중이었으니까.
“내가 가서 다시 말해보겠네.”
데몬의 방에 미카일이 들어갔다.
하얀 꽃이 곁에 놓인 그의 침대 위에 엘리제가 마치 잠든 듯이 고이 누워 있었다.
‘정말 그냥 곤히 자는 사람 같군.’
미카일이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정령의 힘을 가진 자였기 때문일까? 사흘이 지났는데도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신기하게도 엘리제의 모든 신체활동이 멈추어 차갑게 식었는데, 안색도 살며시 지은 미소도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그런 부분이 데몬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왔나?”
데몬이 엘리제의 머리맡에서 읊조리듯 조용히 말했다.
“마법서는?”
“데몬…….”
그가 부탁한 주문을 적은 마법서는 미카일의 품 안에 있었지만 이걸 전해주는 것이 맞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자네의 마력이 강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주술은 사용하는 이가 어찌 되는지 알지 않나.”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미쳐가고 죽음을 맞이했는지 직접 보았으니까.
“미카일…….”
심해와 같이 어둡고 슬픈 목소리로 데몬이 친우를 불렀다.
“이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이렇게까지 라니. 이렇게밖에 살 수가 없는 것을.
지난 사흘 데몬은 이미 미쳐서 살았다.
눈을 뜨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아니 그냥 살아 있는 자체가 미칠 듯한 고통이고 슬픔이었다. 그런 그를 진정하게 만든 것은 죽은 이를 살리는 흑마법에 대한 기억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희생과 저주를 동반하기 때문에 금지된 주술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를 살리기 위해 데몬은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기꺼이 팔 수 있었다.
금지된 주술 정도야.
마력은 충분했다. 그의 아버지는 실패였지만 지금의 그라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술을 시행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었다. 한 번 어두워진 마력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흑마법의 기운은 서서히 데몬을 미치게 만들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었다.
그럼 엘리제를 살린다 하여도 그녀 곁에 남지 못하게 되겠지.
“성공해서 엘리제가 깨어나면, 그녀를 잘 부탁하네.”
준비는 다 마쳤다. 그녀가 다시 살아나면, 그녀를 떠날 것이고 자신의 자리는 미카일이 대신 채워줄 것이다. 대공가는 하임과 마가렛, 제레미가 잘 이끌어 줄 것이었다.
“자네가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다행스러워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데몬이 하는 우스갯소리에 미카일은 웃음으로 답할 수가 없었다. 말을 입에 담는 그의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혹시라도 내가, 과정 중에 폭주한다면 이 검으로 나를 찔러줘.”
데몬에게 성검을 전해 받은 미카일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엘리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타나의 몸을 가른 그 성검이었다. 엘리제가 사용한 후로, 검의 날이 생긴 성검.
어찌 된 영문인지 엘리제는 죽었지만 마치 그녀의 모든 힘이 검 안에 담긴 듯 이제 검은, 날과 손잡이의 완벽한 형태였다.
***
천지 좌우가 구분되지 않는 하얀 공간.
그곳에 내가 있다.
내가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 나의 형체도, 위치도 알 수가 없다.
그냥 그곳에 내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 울고 있다. 나를 부르며.
그런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다가가고 싶지가 않아.
‘어?’
앞에 무엇인가 보인다.
‘엄마잖아!’
“지원아, 그곳에 가서도 편히 잘 쉬어라.”
묘지를 쓰다듬는 엄마의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다.
‘엄마, 나 여기! 여기 있어. 엄마!’
“불쌍한 것.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다니.”
아무리 불러도 목소리는 그곳에 닿지 않는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아, 그래. 죽음. 이번엔 정말 죽었나 보다.
현실에서도, 작품 속에서도.
그러니 이제 나의 마지막을 시원스레 보여주는 것이겠지.
이제 어디로 가게 될까?
사람들이 말하듯 빨려 들어가는 빛 속으로 사라져 기억을 잃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될까? 아니면, 그건 그저 우리들의 희망 사항일 뿐 여기서 그냥 끝일까.
끝.
그 끝에 다다르면 절망도 고통도, 후회도 느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처럼.
갑자기 시야가 흔들리더니 새로운 풍경이 보인다.
‘어? 내 방!’
분명 내가 살던 원룸이다.
‘나다!’
죽기 전의 내가 핸드폰 화면을 밀어 올리며 웃고 있다.
아, 그래. 저렇게 밤늦도록 웹소설을 읽다 잠들곤 했었지.
“아, 재밌다.”
눈앞의 내가 중얼거렸다.
“하아, 나도 이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데.”
내가 저런 말을 했던가?
저게 언제쯤이지? 내 책상에 놓인 디지털 알람 시계를 보았다.
아, 저때라면 한창 빙의물, 회귀물에 빠져 있을 때다. <황후 프시케>도 저때 읽었어. 회귀자인 프시케가 참 멋있어서 나도 한 번 이런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정말 많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는 작품 속 인물이 아니니 ‘회귀’는 할 수 없었다. 회귀는 살고 있는 세상 내에서 과거나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니까.
‘잠깐! 설, 설마. 그래서?’
그 대신 엘리제로 ‘빙의’한 것인가?
헉!
‘내가 원해서 작품 속에 빙의되었던 거였어?’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느껴졌다.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이제 소름과 함께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의식만 남은 내가 공간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와 몸이 느껴졌다.
잠시 후, 현실의 내가 자취방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는 장면이 보였다. 스물넷, 사인은 믿어지지 않게도 심장 마비였다.
‘아, 아직 끝이 아니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까 내면에서 웅크려 정체를 숨겼던 심연의 고통이 이제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너무 두려워 외면하려 했던 감정과 울고 있던 누군가가 강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