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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 (88/126)


88.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
2022.09.05.



“제기랄! 빌어먹을 데몬!!”

휙!

타나의 거대한 낫이 허공을 갈랐다.


“악! 역시 지난번에 죽여버렸어야 했어!!”

분노와 욕설을 토해내며 타나가 마구 공격을 퍼부었다. 데몬이 그녀의 공격을 공중에서 막아내자 강력한 빛과 굉음이 사방으로 터졌다.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이 부딪히고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프시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목숨 걸고 타나를 막아주고 있는 데몬이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가 제때 나타나 준 덕분에 기사들과 함께 로안을 황궁의 안쪽으로 재빨리 옮길 수 있었고, 더불어 부상을 입은 헬리오 역시 피신시킬 수 있었다.


“황, 황후 폐하…….”

쿨럭. 내상을 입었는지 헬리오의 입에서 아직 피가 흘렀다.


“아무 말씀 마십시오. 크레미언 대공이 왔으니 괜찮을 것입니다.”

최강의 신성력을 가진 헬리오가 당해내지 못하다니, 대체 타나의 힘은 얼마나 막강하단 말인가.


“그동안의 일정에 무리가 있으셨나 봅니다. 헤아리지 못한 저희의 불찰입니다.”

“아닙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헬리오가 말을 잇지 못하였다.

생각해보니 신성국을 떠난 이후 그가 계속해서 신성력을 사용해온 것을 계산하지 못했다. 아무리 강한 신성력을 가졌고, 살아 있는 최고의 신성이라 하여도 그 역시 사람이다.

무한한 힘이 생성될 리 만무했다.

헬리오를 살아남은 사제들에게 맡기고, 프시케는 장소를 옮겨 서둘러 의원들에게 로안의 상태도 보여주었다.


“황제 폐하께서 어째서 깨어나지 못하시는 것인가?”

의원들이 로안을 이리저리 살폈으나, 원인을 찾지 못했다.


“흑마법에 당하신 것이 아니어야 할 텐데…….”

헬리오도 지금 위급하니, 지금으로선 로안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프시케는 로안이 잠들기 전 마셨던 성수가 자꾸 떠올랐다. 그때.


“황후 폐하!”

반가운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황궁에 막 도착한 미카일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

무시무시한 눈으로 타나는 데몬을 노려보았다.


“죽여버리겠어.”

전력으로 상대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면 로안을 데려가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지. 그녀는 입안을 짓씹었다.

저 망할 대공이 나타나는 바람에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졌다. 대공을 상대하는 사이 프시케가 쥐새끼처럼 로안을 데리고 황궁 안으로 도망 쳐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같이 부숴버려야겠군.”

그녀가 공허하게 웃으며 위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구구구궁.

거대한 소리와 먼지가 일어나며 황궁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데몬 역시 미간을 조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세찬 바람과 함께 황궁 전체를 보호하는 막이 형성되었다. 지난번과 같은 방식이었지만 단번에 형성하지 않고 시간을 두어 쌓아 올리고 있었다. 마력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이상한 일이군.’

타나는 지난번 자신의 공격으로 팔을 하나 잃었다. 그런데도 지금 자신을 상대하는 타나의 힘은 지난번보다 강했다.


‘힘을 얻는 수단이라도 따로 있는 건가?’

당장 답을 찾을 수는 없으나 최대한 조심하며 힘을 아껴야 후회가 없을 것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녀의 약점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하물며 지금은 더욱 강력해졌고, 진심으로 그를 상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특히 저 낫.

붉은 눈을 감았다 뜨며 데몬이 거대한 타나의 낫을 응시하였다.

***

쿵쿵. 구구궁.

아직 황궁까지 한참 남았는데도, 폭발음과 포화가 미로니카를 흔들고 있었다.

엘리제는 온몸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무기들 사이 마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번개가 치는 것도 아닌데 멀리 보이는 황궁에 번쩍번쩍 빛이 터지고 있었다.


‘데몬이 저기 있겠구나!’

망토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엄청난 굉음과 진동이 주변을 삼킬 때마다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엘리제는 한 가지만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내 역할, 내 역할.’

데몬을 살리는 것.


“빨리 마차를 안으로! 서둘러 무기를 내려라.”

기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마차가 황궁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엘리제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황후궁 아래였어!’

꿈에서 보았던 통로를 떠올리며 황후궁을 향해 달렸다.

그래도 창고에 가기 전에 프시케에게 검을 가져간다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디 계실까?’

이 긴급한 상황에 궁 안쪽으로 대피해 있을 수도 있지만 프시케라면 다친 사람들을 보호하고 사람들을 통솔하는 쪽에 있을 것 같았다.

궁의 입구부터 훑던 중, 뒤쪽에서 외침이 들렸다.


“엘리제!”

프시케였다.


“세상에! 정말 너구나. 이렇게 위험한 곳에 왜 온 것이냐?”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프시케가 엘리제의 두 팔을 잡았다.

헉, 헉. 뛰어오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폐하, 지난번 허락해주신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왔습니다.”

“!”

설마설마하던 대답을 기어이 엘리제가 뱉어냈다.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엘리제…… 나는…….”

망설임 없이 내어주겠다, 반드시 주겠다 약조하지 말 것을. 프시케는 엘리제가 조금 더 이번 생 자신의 곁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랐다.


‘정말 동생이라도 둔 것처럼 마음이 갔는데…….’

흔들리는 프시케의 눈빛 앞에 엘리제가 단호하게 외쳤다.


“서둘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공 각하가 위험해요.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꿈에서 보았어요.”

“하지만 엘리제, 그 꿈이 반드시 현실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엘리제에게 비밀창고로 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성검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데몬이 성검 없이도 지난번처럼 흑마법사를 우선 물리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 조금만 더 데몬을 믿고…….”

“그냥 허락만 해주시면 됩니다.”

“뭐라고?”

“가는 길은 이미 꿈에서 보아 알고 있어요.”

“!”

프시케는 할 말을 잃었다. 엘리제가 꿈에서 본 길이 실제 창고로 통하는 길이 맞다면 그 뒤에 데몬이 위험해질 거라는 엘리제의 말도 현실이 될 것이 분명했다.


“…….”

더 이상의 시간 낭비는 무의미하다.


“네가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부디, 너와 데몬 모두를 구하는 것이길 바란다.”

프시케가 엘리제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전했다.


“사용을 허한다, 엘리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원하던 인사까지 마친 엘리제가 지체 없이 달렸다. 꿈에선 본 그곳으로.

***

창고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꿈속에서 본 그대로였으니까.

열쇠로 창고를 열고 들어가 성검을 바로 찾아내었다.

검의 모습 역시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손잡이만 있는.


‘이걸 누가 검이라 알아볼 수 있을까.’

정말 아는 사람만 알 수 있을 모양새였다.

성검은 그냥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검에 날 자체가 없기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가 아니면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용자가 마력이든, 신성력이든, 정령의 힘이든 그 능력으로 검에 날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이 검을 사용해야 하는 순간이 이제 곧이었다.


‘데몬, 데몬……, 데몬!’

이상하게도 머리와 가슴은 그저 그녀가 살리고 싶은 한 사람만을 떠올리는데, 눈에서는 뜨거운 물이 솟아 자꾸 시야를 가린다.

엘리제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전히 빛과 소리가 부딪히는 그곳으로 무작정 달렸다.

몸을 내몬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한계에 이를 데까지 뛰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머리와 마음은 고요했다.

아니 그저 멍했다.

마치 머리와 심장이 이미 멈춘 듯이.

저곳에 닿아야, 그리고 아직 무사한 그를 봐야 그녀의 사고도, 심장박동도 시작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뿌연 포화 사이로 엘리제의 앞에 두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곳곳이 처참하게 부서지고 깨지고 떨어져 구르고 있는 곳에서 존재가 다른 듯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이.


“로안을 데려가지 못하더라도 오늘 너를 끝장내겠어!”

승부가 쉽게 나지 않자 분노한 타나가 야수처럼 그르렁댔다.


“…….”

데몬은 여전히 말없이 그녀를 상대하고 있었다. 타나가 전력으로 상대해오자,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데몬의 두 팔이 흔들렸다. 낫을 휘두를 때마다 강력한 힘이 그의 몸의 강타해 여기저기가 이미 찢기고 터져 있었다.


‘빈틈이 없다.’

지난번 전투와는 다르게 마치 타나를 보호하는 막이라도 싸여 있는 것처럼 틈이 없었다. 예상보다 더 쉽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상대여도 빈틈이 있으면 이길 수 있지만, 빈틈없이 보호되고 있는 존재와의 전투에서는 누가 오래 버티는가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타나는 어찌 된 것인지 계속 화를 내며 전력으로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마지막이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 검은 아우라가 더욱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듯 타나가 기를 끌어올리자 주변에 어마어마한 진동이 일어 땅이 흔들렸다. 데몬이 휘청인 찰나, 타나가 입을 길게 찢어 웃으며 거대한 낫을 들어 올려 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

바로 이 순간. 이 순간이었다.

꿈에서 보았던 장면.

수도 없이 곱씹어 보며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판단해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지금이다!’

꿈속에서 본 것처럼 타나가 거대한 낫을 들어 올렸다. 그 끝이 데몬을 향하는 것이 보였다.

엘리제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정령의 힘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하여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몸 안에서 무언가 폭발하듯 푸른빛이 터져 나오더니 그동안 그녀가 예지몽을 꾸며 경험했던 것처럼 눈앞의 장면이 마치 필름처럼 스쳐갔다.

슬로 모션으로.

천천히 앞으로 재생되는 영화의 한 장면에 그녀 혼자만 들어와 있는 듯이, 소리와 공간 그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원하는 일을 하기에 충분하도록.


‘이렇게 막으라는 거였구나!’

아! 그동안 꿈을 통해 경험했던 것들은 역시 오늘을 위한 준비였던 것인가 보다.

고개를 들어 엘리제는 이 순간 숨이 끊어질 듯 간절하게 보고 싶은 한 사람이 아닌, 다른 이를 향해 달렸다.


“뭐, 뭐야!!”

타나는 갑자기 시야에 나타난 검은 형상에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데몬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두 사람 모두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서 전투 중이었고 주변에 느끼지 못하는 기척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향기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타나의 커다란 낫은 데몬을 향해 휘둘러지는 중이었고, 그자가 정확히 타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XX!”

그 순간, 눈앞에 강력한 푸른빛이 터지며 달콤한 장미 향이 가득 퍼졌다.


‘이, 이건!’

익숙하고 아득한 향기에 데몬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이곳에 그녀의 향기가 존재하면 안 된다. 그건 눈앞의 검은 인영이 엘리제라는 뜻이 되는 것이니까.

그때, 가공할 위력의 바람이 순식간에 데몬의 몸을 밀어내고 동시에 낫의 반경 안에 대신 가냘픈 허리가 자리를 잡았다.

스걱.

타나의 낫이 사신의 것처럼 가냘픈 몸의 일부를 관통했다.


“엘리제!!!!!!”

눈앞에서 검은 후드가 벗겨지며 데몬 앞에 빛과 같이 찬란한 은빛 머리칼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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