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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빛과 어둠의 전투 (87/126)


87. 빛과 어둠의 전투
2022.09.01.



 
잠든 로안을 둘러업고 타나가 날 듯이 밖으로 나오자, 황궁의 입구에 진을 치고 기사들과 병사들이 막아섰다.

가장 앞에 흰옷을 입은 헬리오와 사제들이 서 있었다.


“황제 폐하를 데려갈 수 없다!”

외치는 헬리오를 향해 타나는 대답 대신 웃었다. 어디 막을 테면 막아보라는 듯이 그녀가 로안을 업은 채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헬리오와 사제들이 일제히 타나를 향해 빛을 쏘아댔다.

프시케는 황후궁에 갇혀 바깥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성하께서 계시니 황제 폐하께서는 무사하실 것입니다. 지금 나가시면 위험해지십니다!”

황후궁의 시녀들과 기사들이 막아선 탓에 방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자니 애가 닳았다.


“그래도 내가 가야 한다. 비켜서라!”

“폐하! 아니 되십니다!”

그녀를 지키려는 이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프시케를 안전하게 지키고 싶었다.

혹시라도 황제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프시케가 미로니카에는 반드시 필요하니까.


“하아. 내가 가봐야 하느니라.”

헬리오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헬리오와 방법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타나가 공격해올 줄 알았으면 엘리제에게 열쇠를 주지 않았어야 했을까?


‘하지만 성하께 성검을 사용하시라 드릴 수는 없다.’

그를 잃는 것이 가장 큰 상실이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로안을 잃는 것 역시 모든 것의 상실이나 다름없어!’

프시케는 뭔가 달라진 이번 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음번 생에 지금과 같은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로안을 구하고, 이번 생도 지켜야만 했다.


‘데몬!’

성하께서 계시지만, 그가 있다면 지난번처럼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가 황궁에 거대한 방어막도 치고 타나의 팔도 잘라내지 않았는가.

그런데, 임시이긴 하지만 헬리오가 분명 황궁에 결계를 쳤을 텐데 지난번도 이번도 어떻게 타나는 손쉽게 황궁으로 들어온 것일까.


‘사실 확인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당장 데몬이 필요하다.’

“크레미언 대공가에 연통을 넣어라. 대공이 있어야 해!”

프시케의 명을 받고 시녀가 빠르게 전보를 작성하여 전서구를 날렸다.

***

데몬의 방 침대 위에 엘리제와 데몬이 하나의 그림자처럼 포개어져 있었다. 입맞춤만으로도 뜨거운 숨결과 열기로 방 안이 점점 훈훈해지고 있는 참이었다.

엘리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깊어진 입맞춤에 이어 서로를 새기듯 손길과 눈길로 훑어가고 있는데 급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각하, 제레미입니다.”

이 늦은 시각에 가주의 방에서 데몬과 엘리제가 함께 있다는 것을 제레미가 모를 리 없었다. 더구나 두 사람을 응원하는 집사였지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엘리제, 죄송하지만 중대한 일인 것 같습니다.”

데몬이 맞추던 입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 네.”

그녀가 황홀한 얼굴과 촉촉해진 눈으로 대답했다. 아득해진 정신을 부여잡으며 엘리제 역시 몸을 일으켰다.


“쉬고 계십시오. 제가 나갔다 오겠습니다.”

데몬이 그녀의 어깨를 눌러 다시 눕힌 후에 방 밖으로 나갔다. 엘리제는 조금 전까지 빠르게 오르내리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아아.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그와 함께 나누는 시간은 왜 이리도 빠르게 흐를까. 흐르는 것이 아쉽고 소중해서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심정이다.

밖으로 나가 제레미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데몬이 엘리제 근처로 와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급히 황궁에 다녀와야 할 것 같으니, 먼저 주무십시오.”

“이 늦은 시각에요?”

황궁에서 급히 부른다니 벌써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엘리제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함께 가게 해주세요.”

“……엘리제, 황궁에 함께 가는 것은 다음이 좋겠습니다.”

청혼한 이후로 그는 이제 둘만 있을 때는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


“위험한 상황인 거죠?”

“아닙니다.”

데몬이 엘리제를 말리기 위해 거짓을 입에 담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사라지셔서 찾고 있다 합니다.”

“네? 가출하셨다는 말씀이세요?”

“잠시 혼자 있고 싶어 근처 산책을 가신 것일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지금 함께 가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그녀가 어쨌든 당분간은 궁에 오지 않고 안전할 수 있겠지.
대공가에 도착한 전서구의 서신에는 흑마법사가 로안을 납치하려 하니 속히 와달라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데몬이 서둘러 황궁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엘리제에게 고한 거짓이 사실이 될지도 몰랐다.

로안이 궁에 없는 현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데몬이 제복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엘리제가 그를 배웅하였고 밖에서 기다리던 미카일과 합류하여 각자 말을 타고 급히 출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엘리제의 곁에 마가렛이 다가왔다.

하임의 지휘하에 대공가의 사병들도 뒤이어 출발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역시 큰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데몬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다. 미리 꿈에서 그 전투 장면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의 말에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데몬과 미카일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엘리제에게 마가렛이 들어가자며 말했다.


“각하께서 토리, 로떼와 함께 엘리제 님의 곁을 지켜드리라 하셨습니다. 방으로 함께 가셔요.”

“응, 고마워. 들어가자.”

물론 갈 것이다. 방이 아닌 황궁으로. 마가렛을 안전히 재운 후에.

***



“헉! 크헉!”

“으윽! 성하!”

타나의 힘은 막강했다. 헬리오와 사제들이 쏟아내는 신성력을 그녀의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검은 연기를 마신 사제들과 병사들이 낙엽처럼 쓰러지며 피를 토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거나 튕길 때마다 불꽃이 일고, 낫을 휘두를 때마다 건물이 흔들리는 폭발이 이어졌다. 황궁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 와중에 그녀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헬리오의 빛뿐이었다.

타나의 몸 여기저기가 찢겨 터지고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여전히 여유로이 웃는 얼굴이었다.

헬리오의 하얀 옷 역시 찢기고 피가 튀어 참혹하였으나, 다행히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그의 몸이 신성력으로 보호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프시케는 폭발음과 굉음, 비명을 참지 못하고 황후궁 밖으로 나오기 위해 말리는 신하들을 밀치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의 경호를 맡은 기사들이 앞을 막아섰다.


“비키라는 명령이 안 들리느냐!”

“하오나, 폐하! 황후 폐하마저 다치시면 정말 큰일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 폐하께서 다치기라도 하셨다는 거냐?”

로안이 무사한지 물었더니, 타나의 곁에서 아직 인사불성이라는 말에 프시케는 이성을 찾기 어려웠다.


“비켜라. 그 말은 지금 군을 통솔할 최고 결정자가 나 외에 없다는 말이 아니냐!”

“!”

황제가 정상적인 명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총 책임과 지휘권은 프시케에게 있었다. 그 말에 프시케의 앞을 막아섰던 기사들도 앞을 트고 대신 그녀를 보호하며 곁을 따랐다.

그리고 드디어 프시케의 눈에 참혹한 현장이 들어왔을 때, 정말 부자연스러운 한 장면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모두가 피를 흘리고 절규하며 온통 신음과 고통이 가득한 이곳에, 두 사람이 오롯이 서서 대적하고 있었다. 타나와 헬리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이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타나의 뒤에 누운 로안이었다.


‘어째서 이 혼란 속에서도 잠들어 계신 것이지?’

그 모습이 너무도 이상해서 순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성수 때문인가? 성수에 이렇게 강력한 수면 효과가 있단 말인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장의 한복판인데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저렇게 깨지도 않고 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타나에게 당한 것일 수도 있고, 혼절하신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절체절명의 시기에 잘못된 판단은 독이다. 프시케는 성급히 판단 내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애를 써서 이성을 부여잡았다.


“모든 군은 성하를 보호하라!”

기사와 병사가 아무리 진을 쳐서 황궁의 입구를 막는다 하여도 타나가 공중으로 이동해버리면 그만이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녀를 땅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사람은 헬리오뿐이었다.

그러니 헬리오가 지금으로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데몬이 도착하면 훨씬 승산이 있을 것이었다. 그때까지 최대한 헬리오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는 큰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보였으나, 문제는 타나 역시 그렇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타나는 지난번처럼 공격이 목적이 아니라, 그녀가 로안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헬리오가 막으니 상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황제 폐하를 놔두고 여길 떠나라!”

지금의 헬리오는 타나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 오직 빛의 검만이 흑마법사의 목숨을 완전히 거둘 수 있으니까. 그러니 무의미한 싸움과 희생을 피하고 로안을 구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건 싫은데? 이 정도면 많이 놀아줬으니 이제 그만 비켜.”

타나가 순순히 그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헬리오가 그 말을 듣고 두 손을 모아 빛을 끌어모았다.

곧 눈을 뜰 수 없이 밝은 빛과 검은 연기가 맞부딪혔다. 너무나 밝은 빛이 연달아 터져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프시케는 헬리오와 타나가 어떤 모습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빛과 어둠의 전투가 이어지자 어디선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두 사람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고 프시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성하께서 지치셨어!’

한눈에도 헬리오가 버거운 것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 타나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가는 순간, 헬리오의 뒤쪽에서 폭발이 터졌다.


“억!”

“!”

프시케의 동공이 최대로 열리며 흔들렸다.


“안 돼!”

빛을 모으는 자세 그대로 헬리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있었다.


 

***

엘리제는 자신의 힘에 수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지난번 시에델에서 자이드를 치유하면서 알게 되었다. 얼마나, 어떻게 사용했을 때 그 효과가 탁월한지도.


‘미안해, 마가렛.’

가족과도 같은 마가렛을 억지로 재우고 떠나려니 마음이 무거웠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엘리제는 바로 방으로 돌아와 마가렛과 토리, 로떼에게 어서 자자고 재촉을 한 후에 힘을 일으켰다.


“엘, 엘리제 니임…….”

“뀨우우…….”

마가렛과 토리, 로떼가 외마디와 함께 속수무책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엘리제는 예전에 미리 준비해 둔 서류와 물건들을 꺼내었다. 서신을 마가렛의 머리맡에 두고, 토리와 로떼가 좋아하는 견과류 선물상자도 함께 놓았다.

마지막으로 프시케에게 받은 열쇠를 챙겨 들고 검은 망토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대공가의 저택 뒤쪽에서 예상대로 사병들이 마차에 무기를 싣고 말에 서둘러 오르고 있었다.


“선발군 먼저 출발! 각하와 사제님의 뒤를 최대한 빨리 쫓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이랴!”

누군가의 명령에 맞춰 수십의 병사가 먼저 출발했다. 무기를 실은 마차 안으로 검은 후드와 망토 차림의 그림자가 몸을 숨겼다.

***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프시케는 마구 달려 나갔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헬리오를 감싸 안았다.


“황후 폐하! 위험합니다!”

호위 기사들이 그녀를 쫓아와 헬리오와 프시케를 에워쌌다.

그러거나 말거나 타나는 로안을 다시 업고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이제 발목을 붙잡던 헬리오의 신성력이 없으니 날아서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아, 안 돼! 로안!”

프시케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제발 로안, 일어나! 정신을 차려!

이렇게 로안을 잃을 수는 없다.

절망으로 가득 찬 프시케의 눈에 로안을 업은 타나가 공중에서 거대한 낫을 들어 올리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비치는 순간.

콰과광! 콰광!


“으윽!”

공중에 있던 타나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거대한 굉음과 함께 엄청난 바람이 불어 주변이 흔들렸다.

프시케가 눈을 감았다 뜨자 조금 전까지 분명 하늘에 있었던 타나가 바로 눈앞에 떨어져 있었다. 로안과 함께.


“으악!!! 빌어먹을 데몬!!”

분노에 찬 그녀가 낫을 집어 들고 달려 나갔다. 붉은 눈의 인영 역시 저 멀리서 타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재빠르게 프시케는 바닥에 쓰러진 로안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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