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사랑에 빠진 남자, 신께 홀린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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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사랑에 빠진 남자, 신께 홀린 여자
2022.08.29.
평생 미카일을 보아왔지만 저런 표정과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본래 무언가를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것 자체를 잘 못하는 성품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과 자신의 반응을 그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이겠군.’
그의 오랜 친우가 무언가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곤란한 상황이거나 불쾌한 경험 때문이라면 미카일은 분명히 선을 긋고 잘 대처할 성격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깔끔하고 예의에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미카일의 동요는 분명.
‘본인 마음이 예상 밖의 상태가 된 모양이군.’
쿡. 그런데 왜 웃음이 날까? 흐뭇함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데몬의 모습과 소리에 엘리제가 바로 반응했다.
“각하, 무슨 즐거운 일 있으셔요?”
동그랗고 큰 금안이 자신을 향해 눈부시게 반짝였다. 밤사이 새로 내린 눈처럼, 하얗고 고운 얼굴에 적당히 홍조가 돌아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저 작고 달콤한 입술로 무슨 일이냐 묻는 이 순간이 데몬은 갑자기 무척이나 가슴 벅차게 느껴졌다.
마치, 지금 이 순간만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찰나인 것처럼.
“예. 당신께서 곁에 계시니 즐거운 일이 늘어갑니다.”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한술 더 떠서 데몬이 환하게 웃자, 방 안의 세 사람 모두 처음 보는 그의 밝은 미소에 깜짝 놀랐다.
***
“황궁…… 오늘…….”
뚝뚝 끊기는 남자의 목소리가 타나의 검은 수정에서 흘러나왔다. 그녀가 모시는 신의 음성이었다.
“아아……. 역시 나의 신께서는 기다림에 지치신 모양이군.”
그럴 만도 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바라고 원하시는 순간이 곧이라 하셨으니까.
그러니 타나는 자신의 신과 함께 그 순간을 지켜보며 앞으로 맞을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그녀의 신께서 바라시는 새로운 세상.
“아마도 흑마법이 최고의 힘으로 인정받는 세상이겠지?”
타나는 추측했다. 그녀의 신은 현신하시던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 기도를 드리면 음성만 들려주실 뿐이었다. 원하시는 세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신 바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지시하셨다.
「미로니카 황제 로안을 망가트릴 것」
죽여서도 안 되고, 홀려서도 안 되었다.
“차라리 없애라 하셨다면 쉬었을 것을.”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재미는 없었겠지만.
그래서인지 신께서 원하시는 바는 로안을 철저히 무너트려 스스로 망가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분의 악명에 어울릴만한 명령이라 더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목숨 하나 그냥 없애는 것은 시시하지.”
하지만 진정한 죽음과 소멸은 정신의 붕괴에서 비롯한다.
그러니 그녀의 신께서는 철저히 파괴할 생각인 것이었다. 로안을.
“불쌍한 미로니카의 황제께서는 어쩌다 이렇게 신의 눈 밖에 나게 되셨을까? 아하하하.”
이유 따위는 알 필요도 없었다.
그저 신께서 바라시는 바를 이뤄드리면 그만이니.
고개를 젖히며 웃던 타나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고 입안을 씹으며 음산하게 중얼댔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엔 기필코 너부터 죽여주마, 데몬.”
어두운 방 안에서도 그녀의 검은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그리고 곧장 같은 광채의 길고 날카로운 낫을 집어 들었다.
***
“폐하…….”
프시케는 난처함에 안색이 굳어졌다.
로안에게 질문하러 그를 찾았다가 위로만 잔뜩 하고, 본론은 꺼내지도 못한 채였다.
한참 우는 로안을 달래고만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헬리오가 성수가 담긴 물병을 들고 로안의 방에 찾아왔다.
“신성력을 담은 것이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지실 겁니다.”
“귀한 성수까지 내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추한 모습을 보여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황제가 힘겹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는 슬픔에 겨워 어제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밤이 되면 더욱 감성적으로 변해서인지 슬픔이 그를 집어삼키는
기분이었다. 엘리제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녀가 출궁하기 전까지 황궁에 없었던 기간이 제법 길어서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때는 그녀가 돌아올 거라는 기대로 버텨왔었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궁을 나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질문은 하나 마나 답은 엘리제겠구나.’
프시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헬리오가 전하는 성수를 단숨에 들이키고 로안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편안해지시니 어제 못 주무신 탓에 피로가 몰려오셨나 봅니다.”
헬리오가 안타깝게 로안을 바라보며 침대에 누운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을 프시케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헬리오는 로안보다도 젊은 얼굴이었지만, 꼭 이럴 때 보면 행동이 손주를 아끼는 할아버지 같았다.
‘아무래도 오랜 세월 살아오셔서인가 보다.’
프시케도 헬리오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함께 방을 나왔다. 아마 로안의 상태를 직접 보았으니 헬리오도 로안이 사랑하는 사람이 역시 아직 엘리제라 생각할 것이 뻔했다.
“성하께서도 이제 편히 쉬십시오. 저도 오늘은 일찍 쉬어야겠습니다.”
헬리오를 머무는 곳까지 배웅하며 프시케가 인사를 전했다.
심신이 지쳐왔다. 타나가 공격해왔을 때보다, 로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들이 더 힘든 듯했다.
“예, 그러십시오. 혹시 황후께도 성수가 필요하실까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저는 성수 없이도 푹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후에 프시케는 몸을 돌려 황후궁 쪽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헬리오가 조금 더 바라보고 있었다.
성수가 담겼던 하얀 병을 두 손에 들고.
***
밤이 다가왔다.
대공가로 와서 데몬과 정말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였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지만, 사실 나는 밤이 두려웠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만 놓고 보자면, 두근두근 설레고 기대되어야 당연한 밤인데.
젊은 두 남녀가, 그것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한 방에 함께 누워 잠을 청하는데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기대 대신 두려움이 들어차 있었다.
꿈 때문이었다. 또 그 꿈을 꿀까 두려워 오늘은 가능하면 깨어 있을 생각이었다.
미리 마가렛에게 부탁했던 빈 병 여러 개를 꺼내어 테이블 한쪽에 주욱 올려놓았다.
씻고 나온 데몬이 놓여 있는 병들을 보고 내게 조용히 물었다.
“주무시지 않고 일을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아, 맞다. 당연히 그가 싫어하겠구나.
충분히 쉬지 않으면 내일 낮에 분명 몸이 휘청이긴 하겠지.
확실히 시에델이 아닌 곳에서는 무리하거나 충분히 쉬지 않으면 어지러웠다.
물론 그럴 때마다 데몬이 마력을 불어 넣어주고, 재워주어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요.”
차마 잠을 자기 두렵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걱정할 것이니까.
그랬더니 더 두려운 말이 데몬의 입에서 떨어졌다.
“제 입맞춤을 이토록 갈망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
당장 입맞춤으로 재워주겠다는 의미로 들려 갑자기 마구 가슴이 뛰었다.
“잠이 오지 않으신다니, 저는 반갑습니다.”
“네?”
반갑다고요? 이번엔 당황으로 절로 내 목소리가 튀었다.
“곤하지 않으시니, 그만큼 제가 오래도록 입맞춤할 수 있지 않겠습니다.”
“!”
악! 어떻게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그렇게 야한 말을!
평소라면 두 손 들고 환영했겠지만 어쩐지 지금 기분에서는 곤란했다. 마치 내가 내면의 두려움을 밀어내기 위해 그의 사랑과 입술을 이용하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잘게요!”
얼른 몸을 던져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자 그가 소리를 죽이며 다가왔다.
“아쉽습니다. 저는 오늘 입맞춤에서 조금 더 나아가려 했는데요.”
“네에?”
아니, 말투와 목소리는 정중함에 극치인데 말에 뼈 대신 에로가 있는데요?
“시에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를 얼마든지 이용해주십시오.”
와, 역시 독심술 할 수 있는 거 맞다니까.
지금도 내 속마음을 다 읽었잖아!
그래 시에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는 다시 만나서 분명 지난번에 못다 한 것을 마저 이어서 하기로 약속했었지.
‘그래, 분명 약속했었어. 게다가 데몬이 이용해달라잖아?’
나는 내 안의 양심에게 속삭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데몬이 받을 상처와 슬픔도!’
양심이 지지 않고 내게 외쳤다.
쳇, 양심은 생각도 바른데 머리까지 좋다.
내가 침대에 누워 망설이고 있는데 언제 곁에 왔는지 데몬이 내 옆자리에 누워 고개를 한 손으로 받치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과 향기가 나를 간질인다. 마치 이런데도 안 넘어 올 거야? 유혹하듯이.
‘와. 이 정도면 그냥 에로의 신 아니냐?’
옆으로 길게 누워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멋져도 이건 반칙이다. 그냥 섹시함이 줄줄 흐르잖아.
여기서 이렇게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면 어쩌란 말이냐.
“치사하셔요. 혼자만 여유로우시니.”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얼굴이 달아올랐는데 그는 그저 동요 없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물론 붉은 두 눈이 달콤한 것은 티가 났다. 저건 누가 봐도 내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빛이니까.
“저는 본래 치사한 편입니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으니까요.”
“!”
데몬이 갑자기 고개를 확 숙이고 다가와서 나는 깜짝 놀랐다.
“당신께만 비밀로 했을 뿐입니다. 그래야 제 품에서 벗어나실 수 없을 테니까요.”
그가 내 치맛자락을 잡아 살짝 올리자 그 말의 증거라는 듯 그가 준 발찌가 드러났다.
“엘리제…….”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입을 맞추며 데몬이 몸을 붙여와 속삭였다.
“승낙은 언제입니까?”
“!”
붉은 강아지 눈을 한 그가 조르고 있었다.
‘어, 어떤 것에 대한 승낙이지?’
순간 내 눈이 떨리며 혼란스러웠다.
그가 말하는 것은 입맞춤보다 나아간 진도를 말하는 것일까, 아님 청혼에 대한 승낙을 뜻하는 것일까?
“아…….”
제대로 사고도,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게 그에게 홀린 기분이 되어 그의 두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자 열린 내 입술 위로 뜨거운 입술이 겹쳐지고 순식간에 그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
쓰르륵.
타나의 거대한 낫이 바닥을 끌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금속이 마찰하는 차르랑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밤이다. 그녀의 신께서 말씀하신 오늘, 밤.
오늘은 로안을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갈 작정이었다.
그곳에서 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차근차근 몸과 마음을 파괴하면 되겠지.
본래는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할 생각이 아니었으나, 지난번 싸워보니 황궁에 있어봤자 불필요하게 피곤해질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팔도 하나밖에 없으니, 여차하면 불리한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데몬을 없앤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목표는 우선 로안의 납치다.
모습을 감추며 황궁의 입구에 들어서자, 퉁! 헬리오가 임시로 걸어둔 투명한 빛의 결계가 타나의 몸에 부딪혔다.
타나가 결계에 대고 손가락을 튕기자, 황궁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가 쏟아지는 별빛처럼 녹아내렸다.
***
“흑마법사가 쳐들어왔다!”
둥둥둥. 둥둥둥.
간만에 황제와 황후가 일찍 쉬어서 곤히 잠들어 있던 황궁이 소란 속에 깨어났다.
“으악!”
적의 침략을 알리는 북이 울림과 동시에 비명이 터졌다.
타나의 앞을 막아서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몸이 자리에서 부서지거나 날아갔다.
그녀는 오직 한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 뿐이었지만, 사상자가 실시간으로 늘어갔다.
“비켜!”
순식간에 로안의 방 앞에 다다른 타나의 앞을 금색의 기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쾅! 쿠궁!
그녀가 커다란 낫을 한번 휘두르자, 폭발이 일며 기사들과 로안의 방문을 동시에 날려버렸다.
“끄으윽.”
피를 흘리며 쓰러진 금빛 기사단의 몸을 밟고 타나가 로안의 방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이 소란 속에도 로안은 그의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치 구원을 기다리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