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Propose
(84/126)
84. Propose
(84/126)
84. Propose
2022.08.22.
달칵.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리자 금색의 커다랗고 아름다운 열쇠가 눈에 들어왔다.
손잡이에 녹색 보석이 박혀 있어서 한눈에 보기에도 귀한 그 열쇠를 나는 상자를 열기 직전 미리 보았었다.
조금 전 꾼 꿈속에서.
놀랍게도 프시케는 내게 꿈속에서 본 창고의 열쇠를 선물로 주었다.
‘필요하면 바로 내어주겠다던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녀가 내게 한 약속은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이 이야기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물건을 이용하여 데몬을 구하라고.
예상했던 일인데도 온몸에 한 차례 더 소름이 돋았다.
나는 상자의 뚜껑을 내려 닫았다. 마음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금세 얼굴이 창백해지셨습니다. 선물에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데몬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마치 선물을 준 프시케가 아무리 황후이더라도 자기가 혼내주겠다는 듯이.
“훗.”
그의 마음이 고마워 웃음이 났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고 웃었다. 덕분에 웃으면서 눈에는 눈물이 고이는 희한한 상태가 되었다.
‘이게 되네?’
만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이 표정이 이런 상황에 지어지는 거였구나.
내가 이런 상황의 주인공이 될 줄은 미처 몰랐는데 말이다.
“그것 말고 다른 상자를 열어봐 주십시오.”
“다른 상자요? 황후 폐하께 선물은 하나만 받았는데요.”
내가 의아해하자, 데몬이 말을 이었다.
“시에델에서 못했던 것을 하고 싶다 말씀드렸었는데 기억하십니까?”
“!”
순간, 시에델 그의 공간에서 뜨거웠던 입맞춤이 떠올랐다. 전서구가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그와 더욱 가까워졌을 그 밤도.
‘설마, 지금 여기서 마저 하겠다는 말씀이신가?’
절로 눈이 커지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아니, 잠깐만.
“그게 상자와 무슨 상관이지요?”
뜨거운 밤을 보내는 데에 그게 왜 필요할까?마치 이게 그 답이라는 듯 데몬이 한쪽 무릎을 꿇고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아, 이 상자요?
“아!”
생각났다.
다녀와서 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었지! 그게 이거였구나!
뜨거운 밤을 연상했던 나를 재빠르게 반성했다. 머릿속에 든 게 이래서 죄송합니다.
반성하기 위해 두 손을 모았는데, 데몬이 상자를 열어서 내밀자 고이 모은 두 손이 절로 입을 가렸다.
‘아…… 안 울려고 했는데!’
겨우겨우 눈물을 참고 있었는데. 허무하게도 무너져 내렸다.
그의 눈 색과 똑 닮은 붉은색 보석을 품은 반지를 보는 순간.
“당신을 깊이 사랑합니다.”
“!”
“엘리제,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말도 안 돼. 그가 내게 청혼하고 있다.
마구 시야가 흔들리고 그 바람에 눈에 가득 담겼던 것들이 쏟아져 내렸다.
‘어, 어떻게 해.’
나는……, 나는 곧…….
그와 반지를 눈앞에 두고 대답을 차마 내어놓지 못한 채 나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
데몬은 반지를 든 채로 멈추어버렸다.
엘리제가 대답을 못 하고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막 로안에게서 독립을 한 그녀에게 바로 청혼이라니 당혹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저 작고 사랑스러운 머릿속에 자신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있는 꿈의 내용 역시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게 옭아매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데몬은 서둘러 청혼을 했다.
그래야 엘리제가 자신의 곁에 머물러 줄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하게 될 테니까.
“부디 제 곁에 있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됩니다.”
사실이다. 그녀 없는 삶은 이제 의미가 없다.
“그리고 놓아드릴 생각이 없음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계속 구애할 예정이었다.
“대답은 후에 하시더라도 반지는 받아주십시오.”
“아…….”
데몬이 반지를 꺼내어 그녀의 하얗고 긴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 끼워주었다. 엘리제는 말없이 차가운 금속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걸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아직도 고여 있었다.
‘싫다고 하지 않으셔서 다행이다.’
엘리제가 반지를 거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승낙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승낙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미로니카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꿈의 내용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무슨 내용일지 몇 가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추측일 뿐이었다.
황궁에 머무는 동안 데몬은 미카일과 하임을 데리고 성검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성하가 오신 직후 틈을 타서 다시 비밀창고에 갔을 때는 이미 새로운 자물쇠가 달린 후였다.
‘그곳에 아마 없을 것이다.’
데몬은 엘리제와 프시케가 단둘이 나눈 대화의 일부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력은 황궁 내의 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강력했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엘리제가 황국에 돌아오자마자 프시케와 둘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을 때는 그녀의 뜻을 존중하여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오는 엘리제의 표정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고 엘리제가 꿈 이야기마저 해주지 않자 알 수 있었다.
꿈의 내용과 황후와 나눈 대화에 연결지점이 있음을.
엘리제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엘리제가 황후를 두 번째 찾아갔을 때,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는 방 밖에 있는 데몬 역시 듣고 있었다. 엘리제를 지키기 위해 들어야만 했다.
아주 작게 프시케가 엘리제에게 속삭였을 때만 제외하고 모든 대화를 들었다. 어떤 물건을 엘리제가 빌려달라고 청했고, 프시케가 다음엔 언제든 빌려주겠다고 약조를 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내가 지킬 것이다.’
눈앞의 엘리제를 꼭 자신이 지켜내리라 되뇌며 반지를 낀 엘리제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 맞추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엘리제가 겨우 입을 열었다.
“예, 충분히 생각해주십시오.”
데몬이 엘리제의 손을 내려놓고, 대신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런 후에 제게로 와주시면 됩니다.”
지금처럼.
그리고 다시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자신의 진심이 그녀의 마음속 깊이 닿기를. 그리하여 그녀 혼자 짊어지려는 그 무언가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바라며 데몬은 자신의 숨결을 향기로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불어넣었다.
***
‘사용할 일이 없을 거다.’
프시케는 엘리제에게 그래서 열쇠를 주었다.
성검은 처음부터 황후의 방 아래에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방을 통해 내려갈 수 있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성검을 두고 자물쇠를 채웠다.
로안의 방 아래로 통하는 비밀창고에 두지 않았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창고의 존재와 길을 아는 이가 나타날 줄이야.
‘열쇠를 가지고 있어도 그곳으로 가는 길을 엘리제는 모르니 괜찮을 거다.’
엘리제가 혹여나 성검을 사용하고 싶어도 자신이 길 안내를 해주어야 장소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니 안심이었다. 그런데도 엘리제에게 열쇠를 전해주었던 이유는 그만큼 믿음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맙기도 했다.
로안의 곁을 엘리제가 떠나주어서. 그 덕에 로안이 프시케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토록 여러 생 동안 노력해도 되지 않았던 일이었거늘.’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엘리제의 독립은 프시케에게도 의미가 남달랐다.
‘기회가 된다면 엘리제의 사랑도 응원해주고 싶구나.’
분명 전에 다른 이를 연모하게 되었다고 했었다. 엘리제의 마음을 차지한 이가 누구인지 짐작은 갔으나 지금 당장 응원할 입장은 되지 못했다.
‘그가 황권을 두고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 되겠지.’
프시케의 녹안이 진지하게 물들고 있을 때, 시종장이 손님의 방문을 고했다.
“황후 폐하, 성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성하께서 직접?”
황후궁까지 자신을 만나러 헬리오가 찾아왔다니! 서둘러 마중을 나갔다.
“성하! 어서 오십시오.”
“미리 여쭙고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상심이 깊으신 듯하여 발길을 돌려 황후 폐하께 왔습니다.”
이런.
로안을 만나러 갔던 헬리오가 슬픔에 빠져 있는 로안에게 말을 꺼내기 어려운 주제가 있어서 대신 프시케를 찾아온 것 같았다.
“아닙니다. 되레 저희가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요. 부디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로안이 엘리제와의 헤어짐을 황국이 안전하지 않은 지금 상황과 연결하여 자책할까 걱정되어 그에게는 더욱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며 헬리오가 본론을 이야기했다.
“지난번과 같은 결계로는 흑마법사를 막기 힘들 것이라 판단 내렸습니다.”
생각보다 타나가 강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프시케였다. 그녀의 강력함과 잔인함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까.
“그리하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황후께서는 혹시 흑마법을 완전히 물리치는 힘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흑마법을 완전히 물리치는 힘이라고?
갑자기 헬리오가 되묻자 프시케는 당황스러웠다.
“외람되오나 그것이 신성력이 아니었는지요……?”
검은색 분수가 쏟아져 헬리오의 살을 녹였을 때도, 눈부신 빛을 사용하여 흑마법의 기운을 분명 직접 몰아내지 않았던가. 프시케는 의아한 얼굴로 헬리오에게 물었다.
“신성력이 분명 흑마법의 기운을 몰아내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몰아내는 것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혹시, 성하께서는 흑마법사를 완전히 없애는 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프시케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헬리오는 지금 찾고 싶은 물건이 있는 것이다.
“맞습니다.”
“!”
“황국을 흑마법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흑마법사를 결국 처치해야만 하겠지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긋나긋한 헬리오의 음성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성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성……검이요?”
엘리제가 꾸었다던 꿈이 예지몽이 맞긴 한가 보다.
이렇게 헬리오 역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을 보면.
프시케는 침착하게 헬리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검을 성하께서 사용하고자 하시는 날에는…….’
그건 안 되는 일이었다.
미로니카의 안전을 위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성하는 신성국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유일한 성인이자, 최강의 신성력이다.
성검을 사용하고 그가 잘못되는 날에는 미로니카는 물론, 이 세계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프시케는 표정과 말에 신중을 기했다. 아직은 헬리오가 자신에게 성검이 있다는 것을 알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 실은 본래 신성국의 물건이라 아주 예전부터 찾고 있었습니다만,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성검이 신성국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극소수이다. 그런데 헬리오는 황후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를 믿고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그만큼 성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어쩐다…….’
“혹, 성하께서는 그 검이 황국에 있을 것이라 여기시는지요.”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으니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실은 그렇습니다.”
“!”
프시케는 깜짝 놀랐다. 설마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황제 폐하께 말씀을 드리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기도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로안에게 성검에 대해 물어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니.
아까 로안의 상처가 염려되어 물어보지 못했다고 하시지 않았나?
‘설마 로안이 일부러 숨기고 있다 생각하는 것인가!’
하지만 로안은 성검의 존재를 안다면 가장 먼저 사용하자 주장할 사람이지, 숨기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황후께서 황제 폐하를 설득하셔서 성검을 찾아주십시오.”
“……그 말씀은, 폐하께 성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황제께서 성검을 찾는 열쇠인 것은 맞습니다.”
그가 열쇠라고?
“제가 반복적으로 간절히 기도를 드렸을 때만 가끔 듣게 되는 신의 음성이 있습니다.”
프시케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연달아 놀랐다. 오늘 헬리오가 그녀에게 이야기해주는 것들은 여러 생에 걸쳐 살면서 처음 듣는 내용들이었다.
“어제 미로니카에 와서 보니, 역시 아무래도 성검이 필요하겠다 싶어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신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
신께서 뭐라고 하셨기에 헬리오는 로안이 성검을 찾는 열쇠라 주장하는 것일까.
프시케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황제가 사랑하는 여인.”
“!”
말도 안 돼.
“그러니 황제 폐하께 누구를 사랑하시는지 여쭈어야 합니다.”
“맙소사!”
헬리오의 제안에 프시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