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 (83/126)


83.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
2022.08.18.



 
프시케에게 확실하게 약속을 받고 나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황후의 방을 나섰다. 여전히 문밖에서 데몬이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너무 계속 곁에 있어 주시니, 잠깐이라도 안 계시면 오히려 서운해…….’

세상에!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니까?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생각해 볼 때, 이게 가당키나 한 마음인가 싶어 나는 스스로의 욕심에 깜짝 놀랐다.

이러한 상황에도 그가 나만 바라봐주었으면 좋겠고, 대공가로 돌아가서 그가 하고 싶다는 무언가가 내가 기대하는 그 일이기를 바라다니.


‘내가 생각해도 나 좀 뻔뻔한 거 같다.’

하지만 정말 당황스럽게도 모든 것을 내려놓자 가장 간절한 것만이 내 마음에 남았다. 그것이 ‘데몬’이었다.

그의 마음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더욱 욕심이 났다. 그를 온전하게 나만이 가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와 모든 것을 다 나누며 함께 살아보았으면…….’

그의 연인이 되어, 그의 아내가 되어, 그의 곁에서 꿈꾸던 사랑을 나누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삶을 살아가게 될 누군가가 미칠 듯 부러웠다.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사랑하고,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평범한 일이라 여겼었는데.


‘이토록 어려운 일일 줄이야.’

어릴 적에는 미처 몰랐다. 살아보니 알겠고, 사랑해보니 알겠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너무 자연스럽게, 강렬하게 빠져들어서 사랑이 쉬운 줄 알았지.

너무 쉽게, 숨만 쉬면 살아져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었지.

이제 그 강렬한 사랑, 당연한 삶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황후 폐하와 말씀은 모두 마치신 겁니까?”

다정한 그의 물음에 나는 데몬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네, 일단은요.”

“그렇다면 어제 말씀드린 대로 지체 없이 대공가로 모시겠습니다.”

그래도 괜찮냐고 허락을 구하는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며칠만 신세 질게요. 감사드려요.”

그 후에는 시에델로 돌아갈 테니까. 잠깐이라도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다니 다행이다.

물론 그사이 흑마법사가 나타난다면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며칠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구나.’

그의 곁에 머무는.

그런데 내 대답을 듣고 데몬이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으로 말했다.


“며칠만…… 머무실 생각이십니까? 원하시는 것은 단지 며칠이십니까?”

“아…….”

“그리고 신세라니 당치 않습니다. 저를 위해 제 곁에 있어 달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말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커다랗게 보였다. 커진 붉은 동공에 아래로 내려간 눈꼬리.


‘세상에, 이렇게 보니까 정말 강아지 같잖아.’

붉은 그의 눈이 강아지처럼 보이다니,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그런데.


‘어, 어울린다.’

젠장. 이 모습마저 어울리면 어쩌란 말인가.

그는 부담 갖지 말라고 내게 하는 말이었겠지만, 새로운 그의 모습에 또 빠져드는 중이었다. 게다가 다정하고 듣기 좋아서 나는 구름에 앉은 듯 기분이 들떴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황제 폐하께도 미로니카에서 최대한 멀리 떠나겠다 이미 말씀드렸어요.”

그 말에 데몬의 강아지 같은 눈이 잠시 흔들렸다.

아. 흔들리는 그의 시선과 표정마저 좋다. 나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여 주고, 기뻐해 주고, 동요해주고, 소중하게 대해주는 그의 모든 모습이 마음에 든다.

이렇게 내 맘에 쏙 드는 남자를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현실에서는 아무래도 힘들겠지? 작품 속이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잠깐만……. 이렇게 완벽한 데몬을 놔두고 왜 이 작품 속 남주는 로안인 거지?’

너무나 당연한 의문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보통 남주에게 능력 몰빵, 외모 몰빵이지 않은가?


‘아 맞다! 설정값!’

갑자기 그 단어가 떠올랐다.

작품으로 치면 작가가 처음부터 정해 놓은 설정이나 이야기의 큰 흐름.


‘이 작품, 후회남주물이었지!’

보통 후회남주물은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잘못한 것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고 처절하게 구른 후 여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그래서 모두 함께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가?’

아아. 어쩌지? 맞는 거 같아.

제발 로안이 어서 빨리 자신의 마음이 프시케를 향해 있음을 깨달아야 할 텐데.

그래야 모두의 이 고생이 끝나고 해피엔딩이 될 테니까.


‘역시 내가 둘 사이에서 빠져주길 참 잘한 것 같다.’

오늘 외친 독립선언이 내심 뿌듯했다. 어쩌면 내가 독립선언을 외치게 된 것도 이미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 이야기는 정해진 대로 흘러가겠지.

벗어날 수 없고, 정체도 알 수 없는 그 어떤 힘이 이끄는 대로 내가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적어도 그 안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자.


“대신 머무는 동안에는 쭉 각하 곁에 있게 해주세요.”

그래야 후회가 없을 테니까. 그래야 떠나야 할 때 슬프지 않을 테니까.

나는 그를 바라보며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었다.

***

대공가로 향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마가렛이 이미 어제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준 덕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사하기 위해 로안과 프시케를 찾아갔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폐하. 부디 두 분 모두 건강하시어요.”

로안은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하긴, 저 싫다고 떠나는 여인에게 곱게 웃으며 보내줄 수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이 자리에 나와준 것이 어딘가 싶네.

슬쩍 옆으로 돌려진 그의 얼굴 어딘가에 상처받은 표정이 가득했다.


“건강해라, 엘리제. 날 보고 싶거든 언제든 궁에 와도 좋다.”

프시케가 나에게 말하며 슬쩍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황후를 모시는 시종 하나가 내게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네주었다.


“내가 주는 선물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거라.”

초록색 따뜻한 눈이 우아하게 휘며 나에게 닿았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제 폐하.”

나는 예법에 맞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드디어, 나는 애첩 엘리제에서 그냥 엘리제가 되었다.


“축하드립니다.”

날 기다리던 데몬이 날 안아 마차에 올리며 말했다. 무척이나 달콤하고 기쁜 눈을 하고.


“감사해요.”

원하던 대로 자유를 찾는 것에 성공했으니 축하받을 일이 맞지.

원래 엘리제가 대공가 소속이어서 참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데몬을 따라 대공가로 향하는 것부터가 어려웠을 뻔했네.


“그런데 각하께서 바로 황궁을 떠나셔도 괜찮아요?”

나와 함께 마차에 오르는 데몬을 향해 물었다.


“예, 폐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동안 밀린 대공가의 업무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황궁에는 성하께서 계시니 그사이 급한 일을 보고 오겠다 말씀드렸습니다.”

“성하께서 마침 와주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아니었으면 언제 흑마법사의 공격이 다시 있을지 모른다고 로안이 데몬을 놓아주지 않았을 것 같아.

붉고 달콤한 눈이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차가 덜컹하고 움직였다.


“앗, 마가렛은요?”

벌써 출발한다고? 아직 내 친구 마가렛과 반려동물도 안 탔는데요!


“마가렛은 토리, 로떼와 함께 바로 뒤의 마차에 타고 따라오고 있습니다. 하임과 미카일도 함께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왜요? 마차도 넓은데 함께 타지 않고…….”

말을 다 마칠 수가 없었다. 데몬이 맞은편에서 내 바로 옆으로 이동해 앉았기 때문에.

그가 가까이 다가와 내 허리를 감싸 안아서 내 입에서 절로 외마디가 뱉어졌다.


“앗!”

“허락해주신 며칠의 아주 잠시도 허투루 보내기 싫어서 그리하였습니다.”

“!”

“혹시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마차에 오직 그와 나 둘뿐이다. 공개된 장소도 아니다. 그의 붉은 눈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의 두 눈에 내가 가득 담겨 있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싫지…… 않아요.”

대답과 동시에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그의 눈을 바라보다 그만 아득해지는 기분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시야가 가려지자 뜨거운 숨과 숨이 얽히는 것이 느껴졌다. 시원하고 매력적인 그의 향기가 코끝을 통해 느껴진다고 생각했을 즈음,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아 더 안쪽을 파고들었다.

닿은 것이 입술뿐인데도 온몸의 감각과 세포가 오직 그가 주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에만 집중되는 기분이다. 눈을 뜨면 곧 그의 붉은 눈과 마주칠까 봐 뜨지도 못하겠다.

어느새 그가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감아올리는 탓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뜨겁고 아찔하게 달아오르는 숨과 미칠 듯이 부드러운 마찰만이 느껴질 뿐.

이제 거의 그에게 안겨 몸이 자꾸 아래로 내려갔다. 황홀한 느낌과 몸 안으로 들어오는 마력에 내 몸의 힘이 풀린 탓이었다.

내 긴 머리가 아래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그가 쏟아지는 은빛 물줄기를 끌어올리듯 내 몸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

대공가로 오는 내내 데몬의 입맞춤이 계속되었다.

덕분에 엘리제는 대공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그의 품에서 잠들고 말았다. 멈춘 마차에서 데몬이 엘리제를 안아 들고 내렸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각하! 어서 오십시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제레미가 먼저 달려 나왔다. 대공가의 모든 이가 오랜만에 돌아온 주인을 환영하였다.

데몬은 대공가의 귀빈실이 아닌, 자신의 방 쪽으로 엘리제를 안아 들고 이동했다.


“명하신 대로 각하의 처소 바로 옆방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지난번 엘리제가 대공가에 왔을 때 귀빈실에서 레이나와 함께 머물렀었고, 주술을 몰아내는 힘든 일도 그 방에서 겪었으니 다시 그곳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 내 방으로 모시고 가겠다.”

바로 옆방이라 해도,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심지어 눈을 감은 찰나에도 찾게 되니 밤사이에도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며 깨어 있을 생각이었다.


“미카일과 하임이 곧 도착할 테니 오는 대로 내 방으로 안내해주고, 그 외 용건과 서류 모두 내일 아침으로 미루지.”

데몬의 뒤를 따른 제레미가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곧 대공가 가주의 방에 오랜만에 불이 들어오고 문이 닫혔다.


“두 분께서 함께 다시 오시다니 좋은 일이구나.”

나이 든 집사가 혼잣말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데몬의 표정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평생을 모셔온 제레미에게는 보였다. 주군의 눈빛이 엘리제를 향할 때 어떻게 다르고, 어떤 빛인지를.

그런데 그 달콤하고 뜨거운 눈빛에 어째서 슬픔 한 조각이 있는 듯 느껴지는 것일까.

몸을 돌려 다시 현관으로 향하며 집사는 평생 해 온 대로 주군의 행복을 다시 한번 소원했다.

***

기운을 내서 밝게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허사였다.

데몬의 입맞춤이 너무 달콤하고 황홀하여 잊고 있었다.

내게 남겨진 역할이 어떤 것인지.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잊고 싶었어.

쏟아지는 잠을 통해 나를 찾아온 것은 며칠 만에 이어지는 꿈이었다.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이 끈질기게도 나를 잡고 늘어졌다.


‘허억, 허억.’

분명 꿈인데도 마치 현실인 것처럼 숨을 쉬기 어려웠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어둠 속을 헤집고 나아갔다. 덜덜덜 팔과 다리가 떨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찾아야 한다. 그래서 그를 구하러 가야 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그것이다. 타나의 퍼런 서슬의 칼날이 떠오르자 섬뜩함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길게 휘어진 그 칼날이 데몬에게 닿기 전에 내가 가야 한다. 막아야만 해.

더듬더듬 찾아 내려간 길 끝에 드디어 횃불과 문이 보였다. 그곳에 달린 자물쇠도.

어찌 된 것인지 내 손에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절로 몸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 물건을 찾았다.


“하아, 하아.”

“깨셨습니까?”

촉촉. 내 입술 위를 두드리는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지고 있다.

눈을 들어 올리자 붉은 눈의 그가 누워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심하십시오. 제 방입니다.”

“아…….”

눈물이 차오른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떠진 눈으로 차오른 것이 흘러내린다.


“……또 꿈을 꾸셨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떨리는 저음으로 그가 물었다.


“아녜요. 눈을 뜨니 당신이 보여서 너무 좋아서요…….”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사실이기도 하니까.

그를 볼 수 있어서 너무나 좋다. 눈물이 날 만큼.

나의 현실에, 내가 살아 있는 이 순간에 그가 내 곁에 있다.

그 안도감에 숨이 트이며 눈물이 왈칵 솟았다.


“계속 이렇게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네, 꼭이요.”

나는 부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맞춤 덕분인지 무거운 마음과 다르게 몸은 확연히 가벼웠다. 그러자 그가 조금 더 쉬라며 침대맡에 앉은 채로 다시 내 몸을 눕히려 했다.


“확인하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그래요.”

내가 웃자, 마지못해 나를 놓아주었다.


“혹시 황후 폐하께 받으신 선물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궁금해하실 거 같았습니다.”

아까 마차에 올라타서 바로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데몬이 곧장 입맞춤을 해와서 상자 속 내용물을 확인하지 못했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가 협탁 위에 올려놓았던 상자를 전해주었다.

프시케가 떠나는 나를 위해 준 선물이 무엇일까.

달칵.


“역시…….”

예상했던 대답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야기는 역시 그렇게 흘러가야만 하는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