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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징조 (82/126)


82. 징조
2022.08.15.



“미로니카에 가신 이유가 이전 신분을 정리하기 위함이시라면, 돌아오셨을 때 망설일 이유가 없으니 적극적으로 다가갈 생각입니다.”

자이드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레이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 뜻을 존중하나 자이드, 성급하게 다가가는 것이 상대에게 부담을 줄 수 있으니 신중하길 바란다.”

자이드의 사랑을 응원하는 입장이지만 그레이스는 엘리제도 소중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일방적인 사랑은 서로에게 고통일 수도 있었다.


“제게는 저만의 매력이 있으니까요.”

그가 모후에게 눈웃음 지으며 자신 있다는 말투로 말하자 그레이스는 웃음이 났다.


“그래. 대관식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고, 이후 노력해보자꾸나.”

엘리제가 성녀가 되고 나면 자이드와 더욱 가까워질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기왕이면 아끼는 엘리제와 사랑하는 아들 자이드 모두 행복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뜨거운 입맞춤으로 데몬에게 마력을 받았더니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어느덧 다정하게 바뀐 부드러운 입술에 정신을 잃듯이 잠에 빠져들었는데 깨어보니 다음 날이었다!


“배, 배가 너무 고파…….”

“어머나! 일어나셨어요? 스프부터 드릴게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마가렛이 나에게 부드러운 음식을 내밀었다.

마가렛의 발치에 있던 토리와 로떼가 내게 달려와 부드러운 몸을 마구 비벼댔다.


“토리 로떼! 둘 다 잘 놀았어?”

반가운 나의 반려동물들을 꼬옥 껴안아 주었다.


“끼니를 챙겨드리려 깨워드려도 못 일어나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걱정해줘서 고마워, 마가렛. 지금 아침이야?”

“점심때가 막 지났어요.”

앉은 자리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품에 안긴 토리와 로떼를 번갈아가며 들어보았다.


“토리랑 로떼 좀 살찐 거 같아. 배가 볼록한데?”

“방금 둘 다 식사했거든요. 황궁의 정원 돌아다니느라 아주 신났어요.”

“뀨우!”

“하하. 자기들 이야기하는 거 아나 봐.”

데몬 덕분인지 몸이 훨씬 가벼웠고, 웃으며 말하는 마가렛과 나의 귀여운 두 동물 덕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오랜만에 무척 좋다!”

“안색이 훨씬 좋으셔요! 다행이에요.”

생각해 보니 꿈꾸지 않고 잠을 잔 것이 무척이나 오래간만이었다. 매번 잠들 때마다 끔찍한 장면이 눈에 보이니 사실 무척이나 두려웠고, 당연히 자고 일어나서도 괴롭고 힘들었었다.


“나만의 수면제님, 최고다…….”

“그 수면제님께서 눈 빠지게 기다리고 계시는데 일어나셨다고 연락드려도 되지요?”

혼잣말이었는데 용케도 알아들은 마가렛이 내게 허락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리와 로떼를 위해 정령의 기운을 일으켜주자 두 마리가 기분이 좋은지 방방 침대에서 뛰어댔다. 방 안에 달콤한 향기가 일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토리와 로떼가 갑자기 혼비백산하여 내게 달려들었다.


“뀨! 뀨! 뀨우!”

“왜, 왜 그래?”

시에델에 흑마법의 기운이 있을 때와 같은 모습이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겁에 질린 모습으로 내 품에서 덜덜 떨기까지 했다.


‘안 돼. 아직 황후 마마께 검을 받지도 못했고, 데몬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욕심이었을까? 조금 더 힘을 사용하자 달콤하고 따스한 느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로떼와 토리의 떨림이 점점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지만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방문이 열리고 마가렛이 들어왔다.


“각하께서는?”

데몬이 근처에 있어서 바로 함께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이제 어느 순간에도 당연한 듯 그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데……. 아까처럼 긴장되는 순간에는 더욱.


“두 분 폐하께서 부르셔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요. 성하께서 황궁에 다시 오셨대요! 함께 마중 나가신 것 같아요.”

“와! 정말?”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져 불안하던 차에 성하께서 오셨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 그래서 토리와 로떼가 괜찮아졌을까?”

“지난번처럼 또 무서워했어요?”

마가렛이 놀라며 물었다.


“응. 그런데 잠깐이었어. 그리고 곧 괜찮아졌는데 성하께서 오셔서인가 봐.”

성하께서 황궁에 도착하시자 흑마법사가 기운을 바로 거둔 것일 수도 있겠다. 데몬에 의해 부상을 입었으니 그녀는 최대한 몸을 사리고 있겠지.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대로.


“당분간은 성하께서 계시니 황궁이 안전하겠구나!”

그럼 나도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토리와 로떼를 내려놓으며 기운 내어 일어났다.

***



“대공의 혼인에는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법이 언제 바뀐 거지?”

미카일이 하임에게 물었다. 함께 모종의 일을 도모해서인가 둘의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다.


“법도는 바뀐 적이 없는데요?”

“!”

미카일은 실로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럼 데몬은 설마 엘리제와 몰래 결혼식을 올릴 생각인 건가?”

물론 엘리제가 원해서 첩의 자리에서 놓아준 것이라 하여도, 로안이 그녀에 대한 마음을 금세 정리할 리가 없다. 아니, 감정이 정리되었다고 해도 그녀가 데몬과 이루어지는 것을 로안이 허락할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각하의 성격을 아시지 않습니까? 허락받기 어려울까 봐 몰래 결혼하실 분으로 보이세요?”

“……데몬이라면 황제를 협박해서라도 승낙을 받겠지.”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하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이라면 도대체 무엇으로……?”

“각하만이 아시겠죠?”

하임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무시무시한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청혼을 한참 전부터 준비했을 리 없었다.


“가끔은…… 내 친구지만 무섭군.”

미카일이 진지하게 말하자 하임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저 제가 각하의 편인 것이 천만다행일 뿐입니다. 전장에서는 더 무시무시하십니다.”

미카일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친우여서 참 다행이었다. 그런 대공이 협박한다면 아무리 황제라도 결혼을 승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듯했다.


“사제님, 두 분 폐하께서 모셔오시라 하셨습니다. 성하께서 곧 도착하신다 합니다.”

시종의 말에 미카일과 하임 역시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동하였다.

***

하얀 옷의 헬리오와 사제 일행은 며칠 사이 더욱 단출해진 모습으로 황궁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지고 갔던 구호품과 식료품을 모두 나누어주고, 갈 때 타고 간 황궁의 마차를 이용한 덕에 로안의 요청을 받자마자 황궁으로 서둘러 돌아올 수 있었다.

무너진 황궁의 모습을 보고 정문에서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로안과 프시케의 손을 잡고 다치지 않은 것이 신의 은총이었다며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었다.


“얼마나 심려가 크셨습니까. 그 공포에서 온전히 벗어나도록 해드렸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헬리오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그가 마지막 주문까지 결계를 완성하고 갔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로안과 프시케에게 한없이 미안해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앞으로 두 분 폐하의 곁에 계속 같이 있겠습니다. 흑마법의 기운을 완전히 물리칠 때까지요.”

“성, 성하!”

헬리오의 말에 로안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안 그래도 그는 심신이 지쳐 있었고, 엘리제에게 실연당한 상처로 마음이 만신창이나 다름이 없던 차였다.

그러니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곁에 있어 주겠다는 헬리오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되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하.”

프시케도 허리를 굽혀 예를 다했다. 이토록 황국을 위해 정성을 다해주는 그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프시케의 뒤를 이어 데몬과 미카일, 하임 역시 헬리오에게 정중하게 예를 다했다.


“안으로 어서 드시지요.”

프시케가 헬리오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새벽에 로안과 함께 비밀창고에 다녀왔었고, 없어진 물건이 없음을 함께 확인하였다. 창고에는 결코 쉽게 부술 수 없는 자물쇠가 새로 달렸다.

역시 누군가가 성검을 노린 것일까? 프시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이렇게 헬리오가 와주니 마음이 놓였다. 프시케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성하께서 계시니 검을 사용할 일이 없을 것이다. 엘리제도 무사할 수 있을 것이야.’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엘리제에게 그녀가 해줄 대답을 찾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



“저분께서 성하시구나!”

나는 마가렛과 내 방 발코니를 통해 하얀 옷의 몇 명이 로안, 프시케와 함께 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제법 거리가 멀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의 교황님처럼 연세가 제법 있으신 분일 줄 알았는데 젊고 키가 커 보여서 깜짝 놀랐다.


‘데몬을 보고 싶어서였는데 어쩌다 보니 주요 인물을 뵙게 되었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성하가 어디쯤 등장하셨더라?


“등장을 하긴 하셨었나?”

분명 주요 인물이면 기억이 날 텐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도움을 주는 조연쯤이셨는가 보다. 프시케를 괴롭히던 악역이라면 오히려 기억이 날 텐데 그것도 아닌 것을 보면.

그래도 성하께서 와주셔서 참 다행이다. 흑마법사가 날 저주하기 위해 데몬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 성하께서 계시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에 빠져 있는데 데몬이 방으로 날 찾아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 나는 그가 걱정해주는 게 왜 이렇게 좋을까? 욕심인 줄은 알지만 이렇게 계속 오래오래 그가 날 걱정해주었으면 좋겠다.


“덕분에요. 정말 몸이 확연히 가벼워졌어요.”

고맙다고 말하는 내 얼굴이 마구 화끈거린다. 어쩔 수 없다. 그를 보기만 해도 너무나 좋은걸. 그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못하겠다는 것은 이미 인정했다.

이대로 성하께서 흑마법사를 물리쳐주셔서 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계속 그를 사랑해도 괜찮다면 얼마나…….


“황후 폐하께서 엘리제 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하셨습니다. 지금은 성하와 함께 계시니 잠시 후에 모시고 가겠습니다.”

“네. 아 참! 아까 아주 잠시이지만 토리와 로떼가 갑자기 떨면서 불안해했었어요.”

“!”

데몬의 두 눈이 잠시 커지더니 이내 가늘어졌다.


“혹시 언제 즈음인지 기억하십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때 마가렛이 성하께서 오셔서 각하께서도 마중을 나가셨다고 했어요. 마침 성하께서 오셔서 흑마법사가 도망친 것 아닐까요?”

“…….”

이야기를 듣던 데몬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내게 한 발자국 더 다가와 살며시 손을 잡아주었다.


“성하께서 두 분 폐하의 곁에 늘 함께 계실 예정이시니 당분간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엘리제 님께는 제가 있어 드리겠습니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그를 감싸 더욱 눈이 부셨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붉은 두 눈이 햇살을 받아 속이 들여다보이는 루비와 같은 빛을 띠었다.


‘아……, 데몬의 눈이 저런 색도 되는구나.’

다정하고 따뜻한 손과 음성에 몸이 나른해지면서 동시에 설레는 묘한 긴장감이 몸에 흘렀다.


“그리고 황후 폐하와 가능하면 오늘, 하실 말씀을 모두 나누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왜……요? 혹시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물론 황궁에서 빨리 나가는 것이 여러모로 좋았다. 그편이 로안이 마음을 정리하기도 좋을 거고. 마침 성하께서도 계시고. 하지만 데몬이 그런 이유로 서두를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 밤에는 대공가로 모실 생각입니다.”

“!”

그의 저택으로 간다니, 그것도 밤에! 어쩐지 가슴이 설렜다.

그런데 다음 말은 나를 더욱 떨리게 했다.


“지난번 시에델에서 못 했던 것을 하고 싶습니다.”

 

***

데몬이 한 말 덕분에 이후로 내내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그가 말하는 지난번에 못 했던 것이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것일까?

얼굴뿐만 아니라 귀까지 홧홧하다. 그래도 프시케에게 가서 검을 받아야 하니 도리질을 하며 이성을 찾고 서둘러 황후의 방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도 데몬의 에스코트를 받았는데 나는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느라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걸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 프시케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엘리제, 어서 오너라.”

안으로 들어서자 프시케가 두 손을 꼭 잡고 카우치에 나를 앉히더니 따뜻한 차를 내어주며 마치 친언니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네가 부탁한 물건은 사용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성하께서 계시지 않느냐.”

그 말은 맞지만…….

정말 괜찮을까?


“하지만 혹여나 폐하……. 혹시라도 필요하게 되면 어쩌지요?”

꿈에서 본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도 좋겠어. 하지만 만에 하나 성하께서 계시는데도 흑마법사가 다시 공격해온다면, 그리고 성하께서도 그녀를 완전히 물리치지는 못하신다면 누군가는 성검을 사용해야 했다.


“그렇게까지 나빠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조짐이 좋고, 성하께서도 방법을 찾아주신다 하셨으니까.”

프시케가 확신이 있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어쩐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더 긍정적으로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내가 마음을 놓지 못하자 프시케가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엘리제.”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내게 조금 더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혹시라도 다음에 네가 검을 달라 말할 때는 내가 주저 없이 내어주마.”

깊고 다정한 녹색 눈이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말하고 있었다.

사용할 일이 없을 테니, 약속해 줄 수 있다고.


“예, 폐하. 꼭 그리해주셔야 해요.”

“약속하마.”

내 손을 잡아준 프시케의 손이 그녀의 두 눈과 마찬가지로 흔들림 없이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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