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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황제의 실연 (81/126)


81. 황제의 실연
2022.08.11.



 
프시케는 서둘러 로안의 방으로 향하였다.

조금 전 들른 비밀창고는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모르는 이는 절대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황궁 내 두 곳, 로안의 방과 황궁 서재에 특별한 장치가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공간이 열리고 계단을 통해 미로와 같은 암흑을 지나야 비밀창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입구와 길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고서(古書)를 찾기 위해 비밀창고를 찾은 프시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물쇠가 부수어져 있었다. 누군가 황궁의 혼란을 틈타 보물을 노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애초에 이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길을 아는 이는 나와 로안뿐인데…….’

두 사람이 가까이 둔 사람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프시케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알고 있는 황가의 보물들을 떠올리며 도난 여부를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모두 제자리에 있어.’

없어진 물건이 없는 듯했다. 로안에게도 가서 그가 알고 있는 물건 중 없어진 것이 있는지 확인을 해봐야 했다.


‘만약 없어진 물건이 없다면…….’

그렇다면 누군가 찾는 물건이 있어 그곳에 갔다가 물건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누가 찾는 것일까?’

혹시나 그 누군가가 노리는 것이 성검이라면 큰일이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 엘리제가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가 무슨 생각을!”

프시케가 이마를 짚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폐하께 고해주게.”

로안의 방 앞에 도착한 프시케가 시종장에게 명하자 그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혼자 계시고 싶다 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엘리제가 다녀갔습니다.”

백작의 신분인 시종장이 엘리제를 낮춰 부르는 한 마디에 프시케는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다.

엘리제는 이제 더 이상 로안의 첩이 아니다. 황궁의 사람도 아니었다.


“……폐하께서 술을 찾으셨는가?”

“…….”

그가 쉽게 대답을 못하고 망설였다.

휴. 한숨을 내쉰 프시케가 시종장을 타이르며 로안의 방문을 열었다.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 걱정 말게. 가서 폐하를 위로해 드려야겠네.”

방 안으로 들어서자 독한 술 향기가 가득 풍겨왔다. 몇 걸음 들어가 로안을 부르자 곧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로안이 프시케에게 몸을 날렸다.


“황! 후우!”

“폐하!”

흠뻑 취한 그가 프시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슬피 울기 시작했다.

***



“엘리제 님!”

데몬이 엘리제를 안아 들고 들어오자 마가렛은 엘리제가 또 쓰러진 줄 알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다행히 그녀는 정신이 온전한 상태였다. 다만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얼굴을 붉히고 있을 뿐.


“마가렛, 엘리제 님께서 간단히 요기하실 만한 것을 만들어 와다오. 쉬신 후에 짐을 챙겨 대공가로 향할 것이다.”

이제 황제의 첩이 아니니 최대한 빨리 궁에서 나가야 하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 데몬은 엘리제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싶었다.

그런 후에 자신의 품 안에서 온전히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알겠습니다.”

상황을 알아차린 마가렛이 방을 나갔다.


“대공가로요? 각하, 저는 아직 황후 폐하께 드릴 이야기가 남았어요. 그리고 말씀을 낮춰주세요. 저는 이제…….”

엘리제 님이 아니다. 대공인 그가 자신을 높이고 존대할 이유는 없었다.


“제게는 달라질 것이 없다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엘리제를 침대 위에 앉혀놓고 무릎을 꿇어 그녀의 손끝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이곳은 공개된 곳이 아니니 괜찮으신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대답이 떨어지자 그가 자신의 입술을 작고 연약한 입술 위로 포개었다.


“!”

놀란 금안이 커지는 것이 보였지만 데몬은 그녀를 감싸 안았다.

곧 쓰러질 듯 위태롭고 창백해 보여서 시에델을 출발할 때부터 줄곧, 그녀에게 얼마나 자신의 숨결을 불어 넣고 싶었는지 모른다.

바로 곁에 있지 않으면 쓰러질까, 눈을 감으면 사라질까, 품에 안으면 바스러질까 두려워 바짝 뒤를 따르고 옆에서 지켜 섰었다.

깊어지는 입맞춤에 숨이 차는지 엘리제가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돌려왔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부족했다. 그녀의 생명이 꺼져가는 듯 느껴져 불안하고 더욱 간절했다.

하얀 두 손으로 그녀가 데몬의 가슴을 밀어내자, 금세 다시 마력을 불어 넣어줄 생각으로 잠시 입술을 떼었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그녀의 붉어진 얼굴이 두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물이 가득한 두 눈도.


“!”

설마, 싫었던 것인가?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나 제가…….”

잘못을 한 것인가 싶어 물으려는 차에 엘리제가 눈을 접어 올리며 웃었다. 그 바람에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입맞춤을 부탁드려요.”

“!”

그 말에 더욱 붉어진 두 눈이 커지고 미간에 주름이 졌다.

순식간에 그녀를 쓰러트린 데몬이 엘리제의 입술을 뜨겁게 삼켰다.

***



“마가렛!”

하임이 여동생을 반가운 얼굴로 불렀다.


“오라버니! 그동안 무탈하셨지요?”

며칠 전에도 서신을 주고받았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그녀가 대공가를 떠난 이후 처음이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상봉한 오누이는 밝게 웃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제님. 마가렛입니다.”

하임 뒤를 쫓아온 미카일에게 마가렛이 예를 갖추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미카일입니다. 혹시 데몬이 안에 있습니까?”

세 명은 엘리제의 방 앞에 섰다.


“안에 계실 것입니다. 저도 지금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음식을 준비해 온 마가렛이 방문을 두드렸다.

곧 안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그리웠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데몬!”

“각하!”

그가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을까 봐 전전긍긍했던 미카일과 하임은 데몬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반가움에 절로 탄성을 뱉었다. 그런데.


“쉿!”

그의 한 마디에 재빠르게 문 앞의 세 사람 모두 숨을 죽였다.


“엘리제 님께서 잠드셨으니 조용히.”

“…….”

마가렛이 말없이 방 안으로 쏙 들어가고 데몬이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각하!”

“정말 걱정했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임과 미카일이 데몬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미카일이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아직 자네가 부탁한 일을 달성하지 못했네만.”

“…….”

성검을 못 찾았다는 말이었다. 데몬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서둘러야만 했다.

흑마법사가 다음번 공격을 해오기 전까지 찾아야만 하니까.


“우선 엘리제 님께서 황후 폐하와 마무리 지을 일이 있다고 하니, 그전까지 다시 찾아보는 것이 좋겠군.”

“그 후에는 어찌할 생각인가?”

“대공가에 하루 이틀 머물고 바로 시에델로 향할 생각이야.”

“시에델에 다시?”

엘리제는 시에델로 돌아가 대관식을 올려야 했다. 그전에 대공가에 데리고 가려는 이유는 그녀가 시에델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하임, 지난번 명한 것은 대공가에 준비되어 있는가?”

“서류 말씀이시라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반지가 사실…….”

하임의 낯이 창백해졌다. 주군의 명으로 분명 준비해놨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서 안 그래도 찾느라 피골이 상접해 있던 참이었다.


“반지는 내가 이미 가져갔다.”

아, 어쩐지!

가져갔으면 가져갔다 말씀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안도와 동시에 하임은 울상이 되었다.


“반지? 데몬 자네…….”

“그래, 청혼할 거야.”

데몬은 심장 근처로 손을 올렸다. 상자가 있는 자리.

대공가에서 가져와 시에델 책상 서랍에서 넣어두었던 작은 상자는 이제 자신의 품 안에 있었다.

***



“황, 후우!”

프시케는 아직 로안을 토닥이는 중이었다. 머릿속에 고민이 가득이라 당장이라도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어깨에 눈물을 쏟아내던 황제는 이제 아예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었다.


“엘리제가……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 하더이다!”

끅끅. 실연을 당한 남자가 슬픔에 겨워 서럽게 울었다. 예상했지만 역시 상처가 큰 모양이었다. 하긴 사랑하는 여인에게 실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말을 듣고 멀쩡할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확실히 끊고 싶어서 엘리제가 폐하께 모질게 말했구나.’

어영부영 여지를 보였다가는 로안의 집착을 끊어낼 수 없을 테니 되레 그의 진심을 이용하여 단호하게 이별을 고한 것이겠지. 엘리제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이별을 고할 때만 단호했던 것이 아니었다. 프시케는 자신에게 성검을 빌려달라 말할 때의 엘리제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녀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보였던 것이 프시케는 더 걱정이었다.


“하앙! 황후우!”

술기운 때문인지 로안은 평소보다 더 아이처럼 프시케의 품을 파고들었다.


“상심이 얼마나 크십니까, 폐하…….”

황제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도 황후의 역할이었지만 사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혹시라도 성검을 손에 넣고자 하는 이가 흑마법사라면 정말 큰일이다.’

창고에 침입이 있었다고 어서 로안에게도 말을 하고 확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폐하, 마음을 조금만 추슬러보십시오. 지금 저와 급히 가보셔야 할 곳이…….”

로안의 방은 비밀창고로 내려가는 공간과 연결된 곳이다. 이곳에서 다른 이는 모르게 로안과 바로 가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황제가 슬픔에 취해 인사불성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아. 이래저래 큰일이구나.”

혼잣말을 뱉고는 시종을 불렀다.


“폐하께 드릴 따뜻한 물과 정신을 맑게 할 차를 가져와다오.”

“예, 황후 폐하.”

프시케의 조급한 마음도 모르고 로안이 울다 지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황후…… 황후는 절대 짐을 떠나면 안 되오.”

“!”

여러 생을 거치며 처음 듣는 말에 깜짝 놀라 프시케의 눈이 저절로 열렸다.


“황후마저 없다면, 난, 나는…….”

뒷말을 잇지도 못하고 로안이 울상이 되었다. 취기에 잠이 쏟아지는지 울어서 빨갛게 충혈된 벽안이 자꾸 감기고 있었다.


“염려 마십시오. 떠나라 하시어도 곁에 있을 것입니다.”

“……역시, 내게는 황후밖에 없구려.”

그가 뭔가를 알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알면서도 프시케의 몸이 떨려왔다. 엘리제를 잃은 후의 로안이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수십 번의 생을 거치며 로안과 번번이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엘리제였다. 엘리제가 있어서, 엘리제가 죽어서 두 사람은 수십 번을 결국 헤어졌었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엘리제가 스스로 로안을 떠났고, 자신과 로안은 여전히 애증의 관계였지만 흑마법의 위기에 대항하며 그 어느 생보다 돈독해진 상황이었다.


‘어쩌면 이번 생에……!’

그동안과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절박하게 원하고, 간절하게 기다려왔던 일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 생각이 프시케의 심장을 세차게 뛰게 했다.


 

***

시에델은 엘리제의 대관식 준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그레이스가 열심히 식의 모든 것을 총괄하여 준비하였다.


“어마마마, 도와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자이드가 건강을 되찾고 제법 예전처럼 왕궁의 일을 함께하고 있었다. 루시아도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그레이스는 이 모든 것이 엘리제의 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이드에게 생명의 은인인 그녀를 앞으로 성심껏 보필하라고 명했다.


“성녀가 되신 후에 우리 자이드와 연을 맺어주신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겠다만…….”

그레이스가 기도를 올리듯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자이드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엘리제가 욕심이 났다. 하지만 엘리제가 싫다고 한다면 우선 그녀의 가까이에서 자주 만남을 갖고 모시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굳이 성녀께서 반드시 한 분의 지아비를 두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자이드가 야릇하게 웃으며 모후를 바라보았다. 생각지 못했던 말에 그레이스는 제법 놀랐다.

하긴, 왕은 본처를 맞이하여도 얼마든지 후궁을 둘 수 있다.

성녀는 정령의 힘이 신앙인 시에델에서 또 다른 의미의 ‘왕’이었다.


“따지고 보니 그렇구나.”

말하자면 자이드가 그녀의 남편이나 ‘후궁’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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