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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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이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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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이미 늦었다
2022.08.08.
로안의 첫사랑이 그대로 끝사랑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는 점점 커가며 모든 것이 바르고 분명한 프시케가 답답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을 때는 대놓고 다른 영애에게 관심을 보이기까지 했다.
뭐든 뜻대로 하고 싶은 철부지 황태자를 둔 황제는 고심하였다. 자식은 로안 하나여서 다른 형제들과의 경쟁도 없었고, 황권이 튼튼한 시기라 이렇다 할 위기의식도 없었다.
로안은 안일한 황국의 주인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고 나태하고 무능력한 군주가 나라를 이끌 때 예정된 미래는 뻔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약혼녀인 프시케가 무척이나 훌륭한 황후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점이었다.
황제는 결국 로안에게, 프시케와 결혼해야만 황위를 물려주겠다 선포했다.
황태자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는 미로니카의 황제가 되었다.
처음 생은 당연히 두 사람 사이의 삐걱거림이 잦았다.
로안이 엘리제를 첩으로 둔 후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현명한 프시케였지만, 로안과 엘리제의 뜨거운 사이를 확인할 때마다 흔들렸다. 이성과 감정은 전혀 다른 영역인지 프시케가 마음을 다잡아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엘리제가 황후의 음식에 독을 탔을 때, 프시케는 참을 수 없었다.
감히 황국을 위험에 빠트리려 한 그녀를 더는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법도에 따라 참형을 내렸다.
애첩을 잃은 로안과는 당연히 극복할 수 없는 골이 생겼고, 결국 사랑은 포기한 채 프시케는 황국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업무에 매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로안이 이혼장을 내밀었다.
둘 사이의 종지부를 찍자며 그가 서류를 내민 사실보다,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 흔들릴 미로니카가 더 걱정되어 그를 만류하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다시 생각해 보자며 황제의 팔을 붙잡았지만 로안은 매몰차게 그녀의 팔을 뿌리쳤고 그 바람에 프시케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순간, 주변이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첫 회귀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귀여운 금발의 미소년이 자신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붉게 물든 볼, 수줍은 미소, 빛나는 금색 머리와 깊은 바다색의 두 눈까지.
분명 어린 시절의 로안이었다.
그 뒤로도 회귀는 계속되었다. 로안과 이루어지지 않거나, 헤어지게 될 때마다.
***
“하지만 엘리제…….”
회상에서 빠져나온 프시케가 두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네 뜻은 알겠지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이전 생들의 엘리제와 눈앞의 엘리제는 너무도 달랐다.
그녀를 용서했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엘리제는 자신의 손에 죽었다.
시기와 방법만 달랐을 뿐 어떻게든 엘리제는 황후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
이렇게 로안의 품이 싫어 도망치겠다고 외치는 엘리제는 이번 생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솔직하고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프시케 역시 그녀를 선의로 도울 수 있었다.
지켜봐 온 모습들을 통해 프시케는 이번 생의 엘리제가 좋아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생각보다 더 깊이 엘리제를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이렇듯 그녀가 성검을 내어달라 부탁하는데 선뜻 그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다시 생각해 보려무나. 네가 검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다행이나, 이후엔 어찌하려 그러느냐.”
온몸이 망가질 것이다. 그토록 마력이 강했던 데몬도 성검을 사용했던 생에는 몸이 망가져 오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었다.
물론 며칠 전 타나와의 전투로 볼 때, 데몬이 지금까지의 생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마력을 가지게 된 것이 분명했지만 성검을 사용한 후에도 괜찮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물며 엘리제는 그보다 훨씬 연약한 몸인 것을.
“제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엘리제가 살며시 웃어 보였다.
가만히 엘리제를 들여다보던 프시케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다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엘리제가 곱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프시케는 엘리제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아.”
터지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녀의 죽음을 수없이 지켜봤지만, 이토록 그녀가 안타깝고 가여워 보인 적은 없었다.
‘이번 엘리제는 어떻게든 살리고 싶구나.’
고민에 빠졌다.
물론 성검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다른 방도가 있지는 않을까? 엘리제가 다치지 않는.
‘다시 비밀창고로 가봐야겠다!’
창고 안에 로안이 정령석을 숨겨놓았다는 사실도 얼마 전까지 자신은 모르고 있지 않았던가.
귀한 보물들의 양이 너무 많고, 공간의 내부도 크고 복잡하여 창고 내 모든 물건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곳에 가서 고서(古????)들을 다시 살펴볼 생각이었다.
잠시 후 창고에서 자신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채, 프시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제 황제 폐하를 뵈러 가시겠습니까?”
진지한 붉은 눈빛과 꿀에 절인 듯 달콤한 저음으로 데몬이 내게 물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로안에게 가야 했다. 가서 독립을 먼저 해야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이 순서대로 진행될 수 있으니까.
“네.”
애써 밝게 대답했는데도, 그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간단히 요기부터 하심이 어떠십니까?”
하긴 미로니카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너무 졸리고 마치 바닥에서 날 끌어당기듯 몸이 무거워서 눈을 들어 올리는 것도 힘에 겨웠으니까.
마가렛이 때마다 간신히 날 깨워 음식을 먹여주었지만, 그것도 비몽사몽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폐하께서 바로 오라고 하셨으니 뵙고 먹을게요. 각하께서도 시장하시겠어요.”
내가 답하며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랬더니 데몬이 내 손을 잡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음식은 괜찮습니다만 다른 것이 무척이나 간절합니다. 혹시 엘리제 님의 입술을…….”
“!”
거기까지 듣고는 기겁하여 두 손을 들어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
“여기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작게 외쳤다. 물론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멀리 보이는 경비병들도 있고, 황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언제든 입 맞출 수 있게 해주신다는 조건으로 오셨지 않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힘들어 보이니까 마력을 나누어 주려는 거겠지.“조금만 참아주시면 안 될까요? 적어도 공개된 장소는 아니었으면 해요.”
“제 기준은 공간의 개폐 여부가 아니라, 엘리제 님의 상태입니다.”
“아아.”
감탄과 동시에 피식 웃음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아, 이 와중에도 이렇게 달콤하게 말해버리면 어떡해. 마음이 자꾸 약해지려 하잖아.
“그렇다면 제 몸은 조금 더 버틸 수 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있으니 제 의견을 조금만 반영해주시면 안 될까요?”
붉은 눈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기다리던 답이 들려왔다.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깊고 그윽한 음성으로.
“뜻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고마워요. 덕분에 기운이 났어요.”
사실이었다. 그의 말과 눈빛, 나를 배려하는 행동과 내 뜻을 따라주겠다는 대답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고마웠다.
“자, 이제 갈까요?”
힘을 내어 말했다.
“독립 선언하러.”
***
예상했던 대로 로안이 펄쩍 뛰었다.
“절대, 나는 용납할 수 없느니라!”
자신이 뱉은 약속은 잊고 엘리제를 첩의 자리에서 내칠 수 없다 주장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저만 알고 있는 폐하의 신체 비밀이나, 저와 나누었던 대화, 있었던 일들을 차례로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지요.”
결국엔 엘리제가 과거의 일부를 줄줄 읊었다. 기억이 돌아왔음을 증명해주는 무척이나 개인적인 정보들로.
로안은 붉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방에 둘뿐인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이었다.
“한데도, 너는 나를 떠나겠다는 말이더냐.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는데!”
“저는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어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
그 말에 로안의 얼굴이 급격히 잿빛으로 변했다.
“사……실이더냐? 짐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합니다. 폐하를 사모하기 위해 노력은 했습니다.”
“그게 노력하는 모습이었다고?”
로안은 믿을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 그녀가 거짓으로 사랑을 속삭이고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고?
‘누굴 놀리는 것인가? 누가 봐도 그건 분명 나를 사랑하는 모습이었는데!’
“잊으셨을지 모르겠으나, 처음 저를 데려오셨을 때 저는 분명 첩이 되고 싶지 않다 말씀드렸었습니다.”
“!”
그랬었지. 그 후엔 자신에게 달콤한 말들을 쏟아내는 그녀 덕분에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 뿐.
“하지만 분명! 나중에는 네 입으로 나를 원한다 하지 않았느냐!”
“폐하를 유혹한 요부라 욕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
“하지만 잃어버린 모든 기억을 되찾고 보아도 지금 저는 폐하의 곁을 떠나고 싶습니다. 본래 제 신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대공가의 하녀 엘리제로.
“그런!!”
로안이 푸른 눈을 무시무시하게 치켜떴다. 자기가 갖지 못한다면 다른 누구에게도 주기 싫다. 엘리제가 대공가로 다시 돌아가 데몬의 사람이 되는 것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놔주신다면, 가능한 미로니카에서 최대한 멀리 떠나겠습니다.”
“그게 무슨……!”
미로니카를 떠나겠다는 말에 로안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말은 곧 대공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황궁도 고향도 버리고 떠나고 싶을 만큼…… 자유를 찾고 싶다는 말이더냐?”
로안이 쓸쓸해진 눈빛으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도 내 품이 싫더냐. 내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 살고 싶을 만큼?’
“그렇습니다. 보내주시어요.”
엘리제는 단호했다. 그리고 동시에 간절하게 청했다.
“짐이…… 약속을 어기고 보내기 싫다면 어찌하겠느냐?”
로안의 벽안이 붉게 충혈되어 이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서럽고, 고통스럽고 동시에 분했다. 자신을 사랑한 적 없다 말하는 엘리제가 고약하여 미웠다.
“폐하, 이미 제가 궁에서는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
로안의 동공과 손이 마구 떨렸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동물들이 우리에 갇혀 결국 어떻게 될지는 뻔하지요.”
그녀의 눈빛 속에 순식간에 절망과 체념이 스쳤다. 그 공허한 눈빛과 표정에 로안은 얼어붙고 말았다.
“!”
황제는 크나큰 슬픔과 동시에 충격을 받았다.
죽더라도 내 곁에서 죽으라 명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짐은…… 약속을 지키겠다.”
한참 만에 그가 겨우 답을 내놓았다.
그녀가 기억을 찾아 돌아온다면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던 과거의 어리석은 자신을 증오하며.
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진정으로 자유를 원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그녀를 황궁에 가두어 여전히 첩으로 둘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엘리제는 정말 망가져 버리겠지.
‘그런 엘리제를 지켜볼 자신이 없구나.’
수없이 칼로 베어낸 듯 아리고 쓰라린 마음이 이제는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엘리제를 미로니카 황제의 첩 자리에서 제한다.”
무거운 음성을 로안이 뱉어내자, 밖에 있던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와 명을 받들었다. 엘리제가 감사 인사를 하며 방을 나갔다.
***
“가능한 한 가까운 시일 내에 궁에서 나가겠습니다. 이제 제 호위를 맡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제 폐하의 첩이 아니니까요.”
엘리제가 방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데몬에게 작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제게는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로안의 첩이어서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이제 마음껏 다가가겠습니다.”
“!”
이제는 그녀를 얽매는 굴레도, 속박도 없다.
“지난번 시에델 제 방에서 못다 한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
붉은 눈동자가 엘리제의 하얀 얼굴을 가득 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엘리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 기분이었다.
데몬이 엘리제의 치맛자락을 잡아 살짝 들어 올렸다.
“앗!”
그녀의 발목에 여전히 그가 준 발찌가 차랑거리며 반짝였다.
잠시 붉은 눈이 발찌를 내려다보고는 치마를 놓으며 말했다.
“시에델에서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은 눈빛과 진한 음성에 머리가 멍해져 엘리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게서 도망치고 싶으셔도 이미 늦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