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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검을 빌려주세요 (79/126)


79. 검을 빌려주세요
2022.08.04.


시에델에서 미로니카로 오는 꼬박 하루 반나절 넘는 시간의 대부분 엘리제는 마치 죽은 듯 마차 안에 잠들어 있었다.

저러다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데몬과 마가렛은 당연히 무척이나 마음을 졸였다.

가끔 잠든 그녀가 끙끙대며 어여쁜 얼굴을 찡그릴 때면 데몬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들여다보고 싶어 속이 탔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정령의 힘이 없으셨더라면 저리 힘들지도 않으셨을 텐데.’

하지만 그 힘이 곧 엘리제가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이유였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신 역시도 그 정령의 힘이 없었더라면 이미 한차례 예정된 폭주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곁에 있었을 그녀를 다치게 했을지도 몰랐다.


“하아.”

그녀를 위해 계획하고 있던 미래가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좋다.

지금까지 자신이 준비하고 있던 것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해도 상관없다.

그저 그녀가 살아 숨 쉬며 자신의 곁에 있어만 준다면.


‘내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날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계시겠지…….’

그러니 성녀가 되어달라는 제안도 그리 빠르게 수락한 것이겠지.

로안이 그녀를 데려오라 명했으나 엘리제에게 맞춰 천천히 돌아올 생각이었지 이렇게 안전하지 않은 황궁으로 바로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미로니카에 가봐야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그것은 무언가를 아는 이의 눈빛이었다.


 

***



“그리하라.”

황제보다 황후를 먼저 만나겠다 청하는 애첩에게 로안은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대공이 바래다주고, 다시 데려오라.”

황후와의 대화를 마친 후엔 꼭 다시 자신에게 와달라 엘리제에게 명하고 로안은 몸을 돌렸다. 신하와 시종들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엘리제는 프시케와 함께 황후의 방으로 향했다. 데몬이 두 사람의 뒤를 따르고 마가렛은 토리와 로떼를 데리고 엘리제가 기거하던 황궁의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시에델에서 고생이 많았던 것이냐. 고왔던 얼굴이 많이 상했다…….”

“황후 폐하께서 더 큰일을 겪지 않으셨습니까.”

프시케가 엘리제의 손을 잡고 황후의 방으로 들어섰다.

황후궁은 그나마 안쪽에 위치하여 전투로 인해 생긴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각하께서는 잠시 밖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엘리제가 데몬에게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데몬을 복도에 남겨둔 채, 문이 닫혔다.


‘비밀리에 할 말이 있구나.’

눈치 빠른 프시케는 방 안의 시종들을 모두 물렸다. 이제 엘리제와 프시케 둘뿐이었다.

편안한 자리로 엘리제를 이끌며 프시케가 말했다.


“이제 말해도 된다, 엘리제.”

“우선 황후 폐하께 말씀드렸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힘 말이더냐?”

엘리제는 준비해온 작은 화장품을 꺼내어 프시케에게 내밀었다.


“시에델에서 제법 성공하였어요.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프시케가 아니었더라면 로안에게서 벗어나자는 목표도 막막하고, 경제적 독립은 막연했을 것이었다. 엘리제에게 계기를 준 사람이 프시케였다.


“사업의 시작과 성장 모두 스스로 일궜는데 그게 어찌 내 덕이겠니. 대견하다.”

프시케가 곱게 웃었다. 가식이 전혀 없는 아름다운 황후의 미소였다.
그 모습을 엘리제가 빤히 바라보았다.


“기억도 되찾았다고 전해 들었는데, 그렇다면 곧 황제 폐하께 독립을 요구할 생각이겠구나.”

아무리 로안이어도 뱉은 말이 있기에 엘리제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 맞습니다.”

엘리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고 얼굴빛은 창백했다.


“왜 그러니? 원하던 목표를 이루게 생겼는데 전혀 기뻐 보이지 않으니…….”

무슨 걱정이라도 따로 있는 것인가 싶어 프시케가 엘리제에게 성큼 다가갔다.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이 힘겨워 보이는 엘리제를 향해 프시케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보려무나.”

엘리제가 경제력을 갖추고 돌아온다면 그녀가 로안의 품을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이미 약조했었다.

게다가 이렇게 이웃 나라에 가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고 약속의 조건을 달성하고 왔으니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

엘리제가 어렵게 운을 떼었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무슨 부탁이기에 이리 어렵게 말을 꺼내느냐.”

로안에게서 독립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설마, 기억을 되찾더니 마음이 행여나 바뀐 것인가?

로안의 기대대로?


“부디, 제게 검을 빌려주세요.”

“검?”

뜬금없는 소리에 프시케의 머리가 멍해졌다.

갑자기 그녀가 빌려달라는 검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투할 때 사용하는 무기를 의미하는 것인지, 정치적으로 자신이 사용할 ‘사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아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이냐? 검이라니…….”

엘리제가 고개를 들어 눈물이 곧 쏟아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프시케를 바라보았다.


“엘……리제?”

프시케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눈물을 가득 담은 금안과는 정반대로 매우 비장한 표정으로 엘리제가 답했다.


“빛으로 된 검 말씀입니다, 폐하.”

“!”

깜짝 놀란 프시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쓰고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쓰고 돌려주겠다고?

엘리제는 침착하게 다음 말을 뱉었지만, 프시케는 침착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녹안이 마구 흔들려 평소에 현명하던 그녀조차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로안도 모르는 그걸 어떻게 엘리제가!’

“맙소사!”

입에서 절로 비명과도 같은 외마디가 터졌다.


“누가 이야기해 준 것이냐?”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그 사실을 아는 이 중 남아 있는 이는 분명 없을 텐데.


“아니, 그보다 엘리제. 그걸 설마 네가 사용하겠다는 것이냐?”

프시케는 이제 엘리제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보다, 그걸 엘리제가 사용하고 돌려주겠다고 말한 부분에 더욱 기가 막혔다.


“설마 무엇을 위한 물건인지도 알고 있는 것이냐?”

엘리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시에델에 가서 제게 정령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

정령의 힘?

그 힘이 사람에게도 있다고? 프시케는 미로니카 황궁에 존재하는 정령석을 떠올렸다.

그리고 정령석의 힘에 지배를 받는 크레미언 대공도.


“그곳에서 그레이스 왕후 마마의 조언으로 정령의 힘을 각성하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엘리제는 시에델에서 정령의 힘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했다. 프시케의 눈이 경악에서 놀라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게 시에델 왕가의 힘이 흐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냐.”

그래서 그레이스 왕후는 엘리제를 양녀로 들이고 싶어 했던 것이구나! 프시케는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맞춰지지 않는 퍼즐 조각이 있었다.


“네가 그 힘을 갖게 된 것과 지금 내게 검을 달라 청하는 것이 연관이 있는 것이구나?”

“맞습니다. 힘이 열리면서 예지몽을 꾸게 되었어요.”

“예지몽이라고?”

프시케의 입이 다시 한번 벌어졌다. 눈앞의 엘리제가 단지 로안의 품을 벗어나고자 애쓰는 첩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의미가 되어 돌아왔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열쇠가 되어줄.


“그 꿈에서 보았습니다. 흑마법사의 몸을 가르는 빛으로 된 검을요.”

“!”

엘리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 검의 용도를 엘리제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설마 네 꿈속에서 그 검을…… 내가 사용하고 있더냐?”

그래서 내게 검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날 찾아온 것인가?

하지만 미안하게도 프시케에게는 그 검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알고 찾아왔단 말인가.


“그 검을 황후 폐하께서 누군가에게 전해주려 하셨어요.”

그래서 프시케에게 검이 있다는 것을 엘리제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아. 그 검은 갖게 된다 하여도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프시케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눈앞의 엘리제는 이제 ‘아무나’가 아니다.


“!!”

‘그렇구나! 정령의 힘을 가진 자이니, 너도!’

성검을 사용할 수 있다.

현명한 황후의 내면에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엘리제!”

프시케의 얼굴에 순식간에 슬픔이 들어찼다.

엘리제가 왜 그토록 슬픈 얼굴로 눈물을 머금고 자신에게 검을 빌려달라 청하게 되었는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는…… 알고 있구나.”

검을 사용한 사람이 치르게 되는 대가(代價)를.


“예. 그래서 더욱 제게 빌려주셨으면 해요.”

다정한 황후는 엘리제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안타까움에 절로 한숨이 터졌다.

그리고 말을 잇지 못하고 결국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

수십 번의 황후 인생을 되풀이하며 살아왔다.

로안을 구하기 위해 데몬을 잃은 경험을 왜 해보지 않았겠는가.

프시케는 여러 번의 생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얻은 결론은 로안도, 데몬도 있어야 ‘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데몬을 잃어가며 로안을 택했던 삶, 미로니카의 예정된 결말은 ‘멸망’이었다.

제국 최강의 마력을 가진 데몬이 사라지자 미로니카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는 프시케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친우로든, 대공으로든.

어떤 연유로 인해 성검을 자신이 가지고는 있으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제게 없었다.

그리고 성검을 사용한 자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잔혹했다.

그래서였다.

성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데몬에게 내어줄 수가 없었다. 그를 지키고 싶었으니까.

상황은 조금씩 달랐으나 무슨 경우이든 황제의 태도는 같았다. 로안은 황국이 위험해지면 데몬이 어찌 되든 상관없이 그를 최전선에 내밀었고, 대공은 말없이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이전부터 대공가를 족쇄처럼 묶고 있는 ‘약속’ 때문이었다.

흑마법이 황국을 위협한 것은 이번 생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무척이나 오래전 일이었다. 그래서 엘리제가 주술에 걸리고 황궁이 공격당했을 때 프시케는 신성력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었다.

게다가 이렇게 흑마법사가 나타나 로안을 직접적으로 노리고 공격해 온 것은 처음이었다.

어쨌든 흑마법을 무찌를 성검을 황후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로안이 안다면, 이번 역시 당장 데몬에게 사용하게 하라 명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번 생, 프시케는 로안에게조차 비밀로 했다.

그렇게 흑마법을 물리치는 대신 데몬을 잃으면, 어차피 미로니카는 멸망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게 된다면 다시 그날로의 회귀겠지.’

수십 번에 걸쳐 겪어온 바와 같이, 로안을 처음 만나게 되는 어린 시절의 그 순간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여섯 살, 황태자의 생일 파티 날로.

***



“인사드려라, 프시케. 황국의 주인이 되실 황태자 전하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프시케 로즈벨입니다. 탄생일을 축하드립니다.”

로즈벨 후작가의 첫째 딸 프시케는 태어나기 전부터 황태자비로 정해져 있었다.

로안이 태어나고 2년 후, 로즈벨 후작가로부터 회임 소식이 들리자 황제는 그 아이가 딸이라면 자신의 첫째 황자와 맺어주고 싶다 말했다.

후작가는 대공가 다음으로 황가가 아끼는 가문이었고, 대대로 황국의 재상과 같은 미로니카의 주요 관리들을 배출해내어 귀족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제국 유일의 후작가였다.

프시케는 후작과 후작 부인의 엄청난 기대와 사랑 속에 태어났다. 물론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도 함께였다.

어릴 적부터 황태자비가 될 모든 교육을 받았고 황궁의 예의범절과 법도에 조금도 어긋남 없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다. 프시케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미래가 정해진 삶을 살았다.

그리고 여섯 살이 되던 해, 아홉 살이 되는 로안과 처음으로 만났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귀한 황태자는 어린 프시케의 눈에도 참으로 멋져 보였다.


‘저분께서 나의 남편이 되실 분이시구나.’

프시케의 하얗고 말랑한 두 볼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녹안은 어려도 빛이 깊고 이지적이었다.

그녀의 앞에 선 세 살 위의 남자아이는 이 나라의 황제가 될 귀한 몸이었고, 동시에 자신의 약혼자였다.


‘어떻게 하면 이분께 도움이 되는 아내일 수 있을까?’

프시케는 어머니인 후작 부인이 늘 자신에게 해주던 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황태자의 배필로 흠이 있어선 안 되며,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늘 고민하라던 말.

그 말을 늘 염두에 둔 어린 프시케는 옷차림과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동시에 귀여웠다. 말 한마디,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모두 고우면서도 자연스러웠다.

황궁에서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유롭게 자라온 로안의 눈에도 프시케는 사랑스럽고 어여뻤다. 그녀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황태자의 얼굴 역시 붉어졌다.

마치 햇살이 드리워지면 그 빛깔의 그늘이 생기듯, 당연하게 정해진 자연법칙처럼.

귀한 미소년의 마음속에 프시케가 들어왔다.

그에게는 첫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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