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구원(救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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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구원(救援)
2022.08.01.
서로에게 구원(救援)인 존재.
데몬은 엘리제와 자신의 관계가 운명(運命)을 넘어선 숙명(宿命)이라 믿었다.
그렇게 커다란 의미의 여인을 붉은 눈이 빠짐없이 담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찰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엘리제는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인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자신은 데몬에게 사랑하면 죽음을 안겨줄 이였고, 곧 사라지게 될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자신의 마력으로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인가요?”
그가 거짓을 말할 리는 없지만 엘리제는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마치 ‘살아도 된다’ 허락하는 것과 같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각하의 마력이…….”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구멍이 따갑고 뜨거웠다.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엘리제는 입안을 씹어야 했다.
“제 마력이 엘리제 님께서 가지신 정령의 힘에 도움이 됩니다. 동시에 엘리제 님의 힘이 제 마력을 안정시킵니다.”
그 말은 즉, 데몬이 곁에만 있다면 그녀는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어차피 그를 사랑하기에 데몬의 곁이 아니면 삶의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아예 몸부터가 그의 곁이 아니면 죽는 운명이라니!
“마력의 안정화만 놓고 보아도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
데몬의 말이 엘리제의 온몸을 울리고 심장을 때렸다.
그가 ‘당신이 필요하다.’ 말하고 있었다.
“아아.”
참으려고 애를 써도 결국 눈물이 차올랐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그리고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하지만 조금 전 꿈에서도 분명…….’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 또 하나의 예지몽을 꾸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데몬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물론 꿈에 달라진 점이 있어 반드시 확인을 위해 미로니카로 가야만 했다.
그래서 대관식 전에 독립을 핑계로 미로니카에 다녀오겠다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데몬의 곁에서는 살 수 있다고?’
데몬의 말이, 엘리제에겐.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살아도 된다는 구원인 셈이었다.
***
그녀에게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마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녀가 필요하다니.
말도 안 된다.
‘그녀에게 정령의 힘이 없었더라도 그녀를 사랑했을 테니까.’
하지만 루시아에게 ‘그런 말’을 들은 엘리제가 어떤 생각을 할지 너무나 뻔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지.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없는 삶 자체가 그에게는 더 위험했다.
그녀가 보고 싶어 미칠 것이 분명했고, 그녀가 잘 지내는지 끊임없이 걱정하고 불안하여 하루도 참지 못할 것이었다.
‘그게 어떻게 안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정말 뱉고 싶지 않았던 말이지만 그녀가 마치 도구로 필요한 듯 말을 꺼냈다.
그렇게라도 붙잡아야 했다. 사랑 외에도 자신에게 묶여 있을 이유가 더 있다고 토로하며.
“마력의 안정화만 놓고 보아도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 말을 뱉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바위라도 얹은 듯 무겁고 답답했다.
눈앞의 크고 빛나는 금안에 슬픔과 희망이 동시에 비치며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데몬은 태어나서 신께 기도드린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간절하게 절로 빌게 되었다.
그 누군지 모를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를 향해.
그녀의 눈에서 행복의 눈물이 흐를 수 있도록.
부디, 그녀를 지킬 힘을 제게 달라고.
***
“그러니 미로니카에 가고 싶으시다면 그곳에선 언제든 제가 입 맞추도록 허락해주십시오.”
“!”
눈물로 흠뻑 젖은 엘리제의 금안이 흔들렸다.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든 입 맞추겠다는 말 한마디로도 이렇게 동요할 거면서, 어떻게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정리하겠다 모질게 마음을 먹었을까.
‘속을 짓씹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계시겠지.’
절대 그를 마음에 두어선 안 된다 자책하시면서.
루시아와 엘리제의 대화를 통해 엘리제의 마음의 깊이를 알게 된 것은 기쁘고 감사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니 기쁘고 감격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되레 사랑해서는 안 된다니,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 말조차 안 되는 속박을 깨주어야 했다.
그래서 입맞춤을 해도, 자신을 사랑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엘리제가 깨달을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과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녀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다.
“혹시 어제와 오늘 사이, 주무실 때는 편안하셨습니까?”
그녀가 이토록 루시아의 말에 휘둘리는 이유가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몰랐다. 예를 들면 예지몽과 같은.
마가렛이 이미 그녀가 겁에 질려 울며 잠에서 깬 적이 있음을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엘리제가 그 꿈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위험해지는 꿈이겠지.’
그래서 이토록 루시아의 말에도 흔들리는 것일 테고.
“네, 어제, 오늘 잘 잤어요.”
그녀는 아직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자신에게 말 못 할 내용의 꿈이 무엇일까.
잠시간의 침묵 후에 데몬은 듣지 못한 답을 얻기 위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엘리제 님……, 말씀드린 미로니카에 가기 위한 조건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상처가 될까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부디 저를 위해 받아들여 주십시오.”
저는 당신이 필요하니까요.
흔들리던 금안이 잠시 후 진정이 되고 그녀가 드디어 허락의 말을 내놓았다.
“……네.”
“감사합니다.”
다행이었다. 붉은 눈을 살며시 접어 올리며 그가 미소 지었다.
***
미로니카의 황제 로안은 갑작스레 내일 방문하게 될 두 사람의 소식에 심정이 복잡했다.
헬리오와 엘리제가 내일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나마 성하께서 오신다는 날에 엘리제가 돌아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성대하고 화려하게 맞이하고 싶었건만…….’
본래는 기억을 되찾고 돌아오는 그녀를 위해 파티를 열고 싶었으나, 그 계획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파티는커녕 온전한 상태조차 되지 못하는 황궁으로 엘리제가 돌아오게 생겼다.
‘성하께도 면목이 없구나.’
몇 날 며칠, 얼마나 헬리오가 공들여 결계를 쌓아 올렸는지 알고 있었다. 주문 하나하나가 빛의 글자가 되어 결계는 조금씩 높이가 높아지고 문의 형상을 이루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거기에 문과 문을 연결하여 견고하게 하는 주문까지 다 하려면 정말 많은 정성과 시간이 들어갔다.
그런데 그 결계가 모두 박살이 나고 없었다.
물론 흑마법사가 그리한 것이지만 그래도 헬리오의 노고를 생각했을 때 로안의 마음이 무거운 것이 당연했다.
“폐하.”
언제 곁에 왔는지 프시케가 로안에게 다가왔다. 다정히 그의 어깨를 감싸며 황후가 안부를 물었다.
“곤하시지 않으십니까? 내일 성하께서도 오시는데 이만 쉬십시오. 오늘도 무리하셨습니다.”
무리는 프시케가 하고 있었다. 로안은 그녀가 실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프시케는 완벽하게 황후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그 이상이다.’
그녀를 황후로 맞이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로안은 프시케의 뛰어난 능력과 강인함에 다시 한번 놀라고 있었다.
그런 로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시케가 어쩐지 난처한 눈빛으로 로안을 불렀다.
“폐하, 노파심에 드리는 말입니다. 오해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무슨 일이오?”
로안이 현명한 황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경험상 프시케의 말은 흘려듣지 않는 것이 좋았다. 전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니까.
“내일 엘리제가 어떤 말씀을 올리더라도 너무 놀라거나 심려치 마셨으면 합니다.”
“응?”
로안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기억을 되찾고 돌아온 엘리제가 내게 무슨 안 좋은 말이라도 할 거란 말이오?”
뭐야. 마치 그러길 바라는 것 같지 않은가. 로안의 심기가 틀어졌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억을 되찾은 사람이 느낄 감정이나 마음 상태가 저희의 예상과는 다를 가능성도 있으니 미리 말씀드리는 것뿐이…….”
프시케의 말을 자르며 로안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완벽한 황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구려.”
그 말을 들은 프시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예상은 했지만 역시 못 알아듣는구나. 아니, 들을 생각이 없으시다.
“나의 애첩에게 시기 질투하는 마음은 아무리 황후라 하더라도 버려지지 않는가 보군.”
로안은 이제 안타깝다는 듯이 프시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완벽한 황후라 속으로 칭찬했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그 모습에 프시케는 한숨을 한 번 더 쉬고 이렇게 말했다.
“혹시 필요하시다면 다음 후궁과 첩을 들이실 때 동의해드리겠습니다.”
“!”
그 말에 로안이 깜짝 놀라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짐이 황후의 속이 좁다 평한 것에 대인배의 면모를 보여 모면하려는 것이라면 이미 늦었소만?”
프시케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이렇게만 말을 하고 로안의 방을 나왔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제 어깨는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어깨?”
로안의 눈이 의아함에 휘둥그레졌다.
황후의 어깨를 내가 빌릴 일이 있을 리가.
‘그 가녀리고 부드럽기만 한 어깨를 내가 왜?’
로안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
다음 날, 엘리제는 시에델 왕궁 곳곳에 놓을 상당량의 정령수를 만들어 놓고 미로니카로 향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데몬, 마가렛이 곁에 있었고 토리와 로떼도 함께 출발했다.
“돌아오시면 바로 대관식을 올리실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놓겠습니다.”
페르만과 그레이스가 약속했다. 자이드와 루시아는 아직 상태가 좋지 않아 각자의 방에서 안정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레이스가 민망한 듯 말했다.
“배웅에 부족함이 있어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다녀오겠습니다.”
엘리제 일행이 탄 파란색 시에델의 마차가 왕궁을 출발하여 미로니카로 향했다.
급히 많은 양의 정령수를 만들고 온 탓에 엘리제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고 말았다.
그래서 엘리제가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타나의 공격에 처참하게 무너지고 뒤집어진 황궁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또다시 돌아왔다. 미로니카에.
“엘리제! 나의 엘리제!”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변함없이 로안이 뛰어오며 그녀를 반겼다.
저 멀리 프시케도 일행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무너진 궁 사이로 나타난 로안에게 엘리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 무사하시어 다행입니다. 얼마나 놀라셨어요.”
그녀의 다정한 음색에 로안의 녹안이 감동으로 커졌다. 요 며칠 생사를 위협받고 힘들었던 시간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자신과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해 안타깝고 서운하고 서러웠던 감정들이 눈 녹듯 녹아내리고 있었다.
“폐하.”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로, 마음을 녹일 만큼 달콤한 음성으로 엘리제가 로안을 불렀다.
“오! 그래, 나의 엘리제.”
저 붉고 예쁜 입에서 자신을 위해 그녀가 다음으로 뱉을 말을 기다리며 로안의 마음이 설렜다.
‘기억해 내지 못했던 우리 둘의 숱한 낮과 밤의 뜨거운 속삭임이 아쉽겠지.’
그래서 엘리제가 자신에게 미안해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당장이라도 그동안 못했던 그 달콤한 사랑의 말들을 그녀가 쏟아낼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대로 로안의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서신으로 미리 말씀드린 것처럼…….”
하지만 기다리던 로안은 다시 급격히 상처받은 얼굴이 되었다.
“황후 폐하를 먼저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