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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예지몽의 의미 (75/126)


75. 예지몽의 의미
2022.07.21.



 
엘리제는 두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시아가 자신을 향해 쏟아내는 말이 심장을 찌르고 생살을 후벼 파는 듯 끔찍했다.

눈앞이 어질하고 속이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지끈거리며 머리와 배가 아팠다.


‘이대로 차라리 숨이 끊어진다면, 내가 대신 죽는다면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차라리 그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그만큼의 고통을 안고 살아갈 텐데.


“엘리제 님, 괜찮으세요?”

마가렛은 엘리제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절박한 루시아는 계속해서 엘리제에게 애원하는 중이었다.


“제발 그분을 살려주세요. 그분은……!”

그를 살려달라니. 엘리제가 그를 죽이기라도 할 거란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루시아의 말을 듣다 말고 더는 참지 못한 마가렛이 공주를 향해 일갈했다.


“그 정도 말씀하셨으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엘리제 님께서 힘들어하시는 것이 보이지 않으세요?”

공주는 울며 매달리다 말고 마가렛의 말에 멍해졌다.

한낱 하녀가 자신을 향해 꾸짖듯 말하는 것에 기분이 나빴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엘리제가 정말 충격을 크게 받은 모양이었다.

루시아의 눈에도 하얗게 질린 엘리제의 몸에 미세하게 경련이 이는 것이 보였다. 찡그린 얼굴에 핏기가 없고 배를 움켜쥔 모습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실, 실례했습니다. 엘리제 님.”

엘리제가 겨우겨우 기운을 차리고 루시아에게 답했다.


“공주 마마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았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이만 나가 주시겠어요? 죄송하지만 좀 쉬어야겠어요.”

곧 쓰러질 것 같은 엘리제의 모습에 루시아도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그럼 편히 쉬시어요.”

마가렛은 루시아가 나가자마자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엘리제를 얼른 편히 눕혀주었다.


“엘리제 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셔요.”

“괜찮아, 마가렛. 각하는 아직 전투 중이실지도 모르는걸…….”

이 정도 힘든 것쯤이야, 그분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야.
 


“그는 너 때문에 죽을 거야!”

 
조금 전 루시아가 울며 매달릴 때, 엘리제는 마치 그녀가 자신에게 그렇게 외치는 것처럼 느꼈다.


“공주 마마 말씀은 너무 괘념치 마세요.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흑마법사가 거짓을 말했을 수도 있고, 공주 마마가 잘못 알아들었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공주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엘리제는 자신이 꾼 꿈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루시아의 말이 엘리제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엘리제가 꾼 꿈과 내용이 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데몬의 죽음.


“내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별일 없으실지도 몰라…….”

하지만 사랑하는 이를 당장 사랑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고 그게 어디 뜻대로 바로 되는 일인가. 그러나 엘리제는 이미 마음을 다잡는 중이었다. 그를 사랑해선 안 된다고.

그런 생각과 다짐만으로도 엘리제에게 숨 막히는 고통이 밀려왔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 폐부를 찌르는 듯 끔찍이 아팠다.


“그런! 엘리제 님…….”

이제야 겨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애정을 쌓아가고 있던 두 사람에게 이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니, 말도 안 돼요.”

마가렛까지 덩달아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

벌떡.

간절하게 기다리던 따뜻하고 매혹적인 저음이, 고통으로 무너지던 엘리제를 단번에 일으켜 세웠다.

***



“각하께서 무사하시냐고요?”

미카일의 물음에 하임이 답했다.


“무사하시다 마다요! 조금 전 황제 폐하를 모시고 긴급회의까지 마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계신지 찾아뵐 수가 없어요.”

그가 무사하다니! 미카일은 신께 감사드리며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흑마법사를 대적하고도 다치지 않을 수 있었지?


“아니, 대공가에서도 늘 이렇게 저를 골탕 먹이셨습니다. 적어도 어딜 가시면 간다, 왜 간다, 말씀이라도 해주셔야…….”

하임은 주군을 향해 푸념 중이었다. 물론 그 역시 주군이 무사한 것이 누구보다 기뻤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투덜대고 있으면 꼭 귀신처럼 뒤에서 나타나셔서…….”

이러고 있으면 매번 꼭 데몬이 ‘그래서 그 귀신의 맛 좀 보겠느냐’고 물으며 갑자기 나타났었다. 그래서 이렇게 투덜대고 있는데 오늘은 주군의 모습이 아직이었다.

그때 데몬 대신에 황궁의 시종 하나가 하임과 미카일에게 달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대공 각하께서 급히 시에델로 떠나시며 두 분께 남기신 서신이 있습니다.”

“!”

“예?”

미카일과 하임 두 사람 다 깜짝 놀라 눈과 입이 모두 열렸다.


“지금 이 비상사태의 미로니카를 두고 시에델로 다시 가셨다고요??”

 

***



“다녀왔습니다.”

엘리제의 방문을 열지도 않은 채, 밖에서 데몬이 말을 이었다.


“걱정하실 것 같아서 우선 들렀으나, 방에 가서 씻고 오겠습니다.”

“!”

평소 같으면 그가 하는 말대로 씻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제는 그가 무사한지 꼭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정리하더라도, 일단 지금은 무사하신지 봐야겠어!’

엘리제가 바로 달려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

엘리제의 눈에 당황한 얼굴의 데몬이 들어왔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상처투성이였다.


“각하……!”

아아! 그래도 살아 있는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니.

기쁨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동시에 쥐어짜듯 고통스러웠다.

그 순간, 엘리제는 자신이 간절하게 되뇌던 기도를 떠올렸다. 그가 살아 돌아올 수만 있다면 대신하여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던 기도.


“다치지 않고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데몬이 미안해하며 웃었다.

엘리제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조금 전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 다짐했었는데, 스스로와의 약속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못한다.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설마 제게…… 상처를 감추려 하신 거예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금안을 무섭게 뜨며 엘리제가 화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데몬에게는 그 모습조차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창백한 얼굴, 한참을 울었는지 빨간 눈, 떨리는 음성.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며 기다렸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미안했다. 그녀가 보고 싶어 조금이라도 빨리 오려고 하임과 미카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긴급회의를 마치자마자 말을 달렸다.

몸의 여기저기가 찢겼지만, 보통 사람보다 회복 속도가 몇 배 이상 빠르니,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었다.

상처가 쓰라리고 아픈 것보다, 피가 흘러 몸이 불편하고 힘든 것보다 엘리제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그녀의 미소를 보게 되면, 고통이든 아픔이든 씻은 듯 사라질 것만 같았다.

데몬을 한참 바라보다, 엘리제가 무언가 결심한 듯 그의 손을 잡고 방 안에 데리고 들어왔다.

당황한 데몬이 그녀에게 끌리듯 딸려갔다.


“하지만, 먼저 씻고…….”

“여기서 씻으세요. 안 계시는 동안 왕궁에 흑마법의 기운이 있었거든요.”

“!”

“그리고 상처 치유는 제게 맡기세요.”

데몬의 귀 끝이 붉어졌다. 엘리제는 그의 귀를 보며 아련하게 웃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에게 닿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몰랐다.


 

***

데몬이 엘리제의 방 욕실에서 씻는 동안, 엘리제가 마가렛에게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아까 루시아 공주가 하고 간 이야기 각하께는 당분간 비밀로 해줘.”

“네에? 어쩌시려고요.”

“……부탁이야. 각하께서 아시면 걱정하실 거야.”

엘리제의 말도 맞았지만 마가렛은 사실 엘리제가 더 걱정되었다.


“하지만 각하께 말씀드리면 좋은 방도를 찾아주실지도 모르잖아요.”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을 해줄 수도 있고.


“그러실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에 하나, 각하께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방법을 택하시면 어떡해?”

“!”

엘리제는 자신이 염두에 둔 방법을 데몬 역시 선택하는 가능성을 고려했다.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선 안 될 것이었다. 엘리제를 위해 데몬이 혹여 무모한 선택을 하는 일만은 절대 안 된다.


“내가…… 거리를 두어볼 생각이야.”

“어, 어떻게요?”

“시에델에서 제안한 걸 받아들이려고.”

“제안이요? 성녀가 되시게요?”

성녀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핑계로 거리를 좀 두면 어떨까.

그리고 그 후엔 성녀가 되어 시에델에 남고, 데몬은 미로니카로 돌아간다면 떨어져 있게 되니 그를 향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벌게 될 것이었다.


“응. 그럴까 해.”

하지만 거리를 둔다고 해서 마음이 정리될 거라는, 데몬이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루시아 공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자신이 지금 당장 데몬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리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엘리제는 조금 전 그를 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못한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아……! 어떡해…….’

사랑하지 않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일까?


“어휴, 그 흑마법사가 왜 엘리제 님을 저주하는 건지 그 이유만 알아도!”

잠깐만, 이유?

마가렛이 던진 한마디에 엘리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흑마법사가 자신을 저주하는 이유는 알지 못한다. 물어볼 수도 없다.

하지만, 꿈을 꾸는 이유라면 어떨까.


‘내게 예지몽을 보여주는 이유는…….’

그 미래를 바꾸라는 것 아닐까?

엘리제의 큰 눈이 더 크게 열리며 흔들렸다.


‘데몬의 죽음을 막으라는 뜻이구나!’

 

***

그 언젠가.

내가 빙의한 이 소설의 이야기가 이대로 괜찮은 건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이야기에게 혹시 의지가 있다면, 원작은 원작대로 흘러가고 싶지 않을까 하는.

프시케는 황후로, 로안은 황제로, 데몬은 대공으로.

각자 이 소설에서 맡은 역할이 있었고 이들은 결말까지 살아남는 인물이었다.

그들의 관계나 인물의 감정 상태에 조금 변화가 있다고 하여도 어쨌든 그들은 원작 속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입장이 좀 다르다 생각되었다.

로안의 첩인 것은 그대로이지만 엘리제는 본래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나는 죽음을 피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래서 늘 한편으로 불안했고,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었다.

‘이 소설 안에 있는 이상, 내게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지지 않을까?’하는.

원작 속 엘리제는 ‘결말을 보기 전에 죽는 인물’이니까.

그 말이 어쩌면 ‘결말을 보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인물’은 아닐까?

정령의 힘이 열리고, 예지몽을 보게 되었을 때 그 힘이 내게 과거도 보여주고 미래도 보여주는 것이 처음에는 의아했었다.

하지만 곧 무언가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곳이 이야기 속이라는 걸 몰랐다면, 아마 나는 그 무언가를 ‘운명’이라 이름 붙였겠지.

그러나 나는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그걸 ‘운명’ 대신 ‘이야기의 의지’라 명명했다.

원작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물질’과 같으니, 가시가 박히면 절로 밀어내는 자가 치유와 같이 소설이 나를 밀어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등장인물의 입장에서는 그게 죽음이거나 이야기의 흐름에서 사라지는 것이겠지?’

하.

절로 바람 빠지듯 웃음이 흘렀다.

아등바등 살아도 무언가 결정되어 있다니, 결국 현실 세계에서 내가 아무것도 이뤄보지 못하고 스물넷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가.


“아니지, 다르지.”

적어도 하나는.

현실이나 작품 속에서나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 만나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엘리제의 결말.


‘그렇다고 내 결말을 신파로 끝낼 생각은 없어.’

그렇다면 너무 억울하잖은가.

스물넷 꽃다운 나이에 죽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엘리제에 빙의했는데!

그리고 정말 꿈만 같게도 데몬과 사랑하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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