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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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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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
2022.07.14.
“엘리제 님!!”
헉헉.
“엘리제 님, 괜찮으세요?”
마가렛이 내 손을 잡았다.
“허, 허억…….”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온몸이 마구 덜덜덜 떨렸다.
두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앞이 온통 하얗다.
후두둑 후두둑.
눈을 가득 채웠던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쏟아졌다.
너무 두려워 눈조차 깜박일 수가 없다.
“엘리제 님! 숨 쉬셔야 해요. 뱉어내세요.”
“컥.”
마가렛이 내 손을 잡고 등을 쓸어주었다.
“네. 괜찮으니 이제 편히 숨을 들이마시셔요.”
당장 그를 구해야 해.
그가, 내 눈앞에서 분명!
“얼마나 안 좋은 꿈이었길래 이렇게 비명까지 지르시고…….”
“마, 마가렛…….”
“악몽이라도 꾸신 거예요?”
“악……몽?”
꿈.
그래, 꿈일 거야.
그렇게 끔찍한 일이 사실일 리가 없어.
아직도 떨리는 몸에 말이 절로 더듬어졌다.
너무 놀라면 오히려 말이 나오지 않는다더니, 정말 그랬다.
“데……, 데몬이!”
“대공 각하요?”
마가렛의 얼굴을 보며 그의 이름을 입으로 부른 것만으로도 다시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이 밀어닥쳤다. 눈물이 순식간에 차올라, 터진 둑처럼 쏟아졌다.
***
잠자던 엘리제가 까무러칠 만큼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자던 마가렛도 기겁하며 일어났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얗게 질린 그녀는 몸을 떨며 숨조차 쉬지 못했다.
마가렛이 그녀를 진정시키려 하자, 말까지 더듬으며 눈물을 쏟아냈다.
행여, 누가 죽는 꿈이라도 꾼 것일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엘리제의 꿈은 평범하지 않으니까.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꿈.
그녀가 울면서 데몬의 이름을 겨우 뱉었을 때 마가렛은 심장이 철렁했다.
엘리제를 이곳에 두고 미로니카로 떠난 대공이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부디, 각하께서 무사하셔야 할 텐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엘리제의 손을 잡고 마가렛도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었다.
***
마치 한꺼번에 수십의 천둥과 번개가 치듯 눈앞에 무수히 많은 폭발이 일었다.
미로니카 황궁의 모든 이가 눈과 귀가 멀만큼 강력한 폭음과 포화의 현장 속에 놓여, 믿어지지 않는 전투를 목격 중이었다.
황궁 전체를 보호하는 마력의 막 안에서 마치 투명한 돔 안에 갇힌 것처럼, 로안과 프시케가 돔 밖의 두 사람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전투를 벌이는 두 사람은 엄청난 위력으로 거의 날듯이 서로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흑마법사 타나와 크레미언 대공이었다.
우열을 판단할 수 없는 흑마법과 마력의 대결이었고, 타나의 무기가 데몬의 몸에 닿기도 전에 강력한 힘과 맞부딪혔다.
폭발과 동시에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졌다. 누가 누구에게 가하는 공격이고 방어인지 다른 이들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저게 데몬이라고? 말도 안 돼.’
로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크레미언 대공의 실력이 아니었다. 훨씬 더 강력해진 데몬의 모습에 로안은 넋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강해진 거지?’
최근에는 폭주도 없었는데.
“폐하, 괜찮으십니까?”
프시케가 먼저 정신을 가다듬고 로안을 불렀다. 지금 데몬이 어떻게 강해졌는지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프시케 덕에 이성을 되찾은 로안이 주변을 살펴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보호막이 깨지게 되는 순간 이어질 공격에 대비한다!”
황제의 명령에 기사들이 속히 희생자와 부상자를 옮기고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모두, 다시 타나를 상대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이 조금 전 겪은 흑마법은 악마의 힘이라 불릴만했으니까.
일반 사람의 힘으로 흑마법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죽겠다고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그들 모두 황제의 명령이라 불복할 수 없을 뿐, 흑마법에 대항하다 허무하게 스러진 또 하나의 주검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서 크레미언 대공은 구원자였다.
지금 이 순간 목숨을 걸고 흑마법사를 대적하고 있는 이는,
황제도 성하도 아닌 대공이었다.
“역시 너! 마음에 안 들어!!”
공격을 퍼부어대며 타나가 데몬을 향해 소리 질렀다.
그래, 내가 언젠가는 너를 손봐주고 싶었었지. 사사건건 방해하는 장애물.
공중에서 퍼지는 소름 끼치는 미성이 전장을 울렸다. 황국의 기사들만 상대할 때의 여유로웠던 모습의 타나는 이제 없었고 데몬은 그저 말없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낼 뿐이었다.
‘어디인가.’
아무리 강력한 상대라 하더라도 허점이나 약한 부분 하나는 있기 마련이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그가 매번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나게 강력한 마력 때문도 있었지만, 적의 약한 부분을 찾아 숨통을 끊어내었기 때문이었다.
붉은 두 눈이 그녀를 상대할 때마다 쉼 없이 움직이며 지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흑마법사는 좀처럼 허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예상보다 더 쉽지 않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반드시 처치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황국은 물론이고, 시에델에 있는 엘리제까지 위험할지도 모른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공격과 방어를 이어나갔다.
한참의 전투가 더 이어지고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자 어느새 양쪽 모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드러난 팔과 어깨가 터졌으며, 나부끼는 대공의 망토는 찢어졌고, 상처들 사이로 조금씩 피가 흘러나왔다.
“이 몸을 상대로, 제법이구나 데몬.”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거칠어진 타나의 숨소리가 여실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쳐가는 것은 데몬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더…….’
두 눈을 붉게 물들이며 데몬은 타나의 손이 누르는 곳을 응시하였다.
***
엘리제는 마가렛의 품에서 조금씩 진정되어갔다.
그래 꿈일 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꾼 꿈이 지금 미로니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면 어찌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미로니카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봐야겠어. 도와줘, 마가렛!”
엘리제의 말에 마가렛이 대공가에 있는 오라버니에게 연통을 넣었다. 하임에게서 연락이 늦어지거나 오지 않는다면 그레이스를 직접 만나 미로니카의 상황을 알아봐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째깍째깍.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숨통을 조여왔다.
하임의 연락을 기다리며 엘리제와 마가렛은 진실로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몇 시간 후, 대공가로 날린 전서구가 다리에 서신을 달고 돌아왔다.
황궁이 공격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으며 대공가에서도 조금 전 알게 되어 황궁으로 도우러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아!”
“엘리제 님!”
내용을 확인한 엘리제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대공 각하께서는 무사하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가렛이 쓰러지는 엘리제를 붙잡으며 말했다.
“각하께서 돌아오시면 걱정하시지 않도록 저희도 잘 버티고 있어야 해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가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어야 한다. 그게 기다리는 이들의 몫이니까.
하지만 자꾸만 숨이 막혀왔다. 꿈 때문이었다.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본 그의 죽음 때문에 엘리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불안했다.
“가, 가봐야겠어.”
“어디로요? 설마 미로니카에요?”
가면 방해만 될 뿐이겠지. 아니, 오히려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알고 있다. 그러니 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전쟁터에 사랑하는 이들을 보내고 남은 사람들은 이렇게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겠구나.
이 고통과 불안을 어찌 감당하고 그들은 살아갔을까.
‘제발! 그를 살려주세요. 살릴 수만 있다면 차라리 제가 대신하여 죽겠어요.’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앞둔 이들이 신께 매달리며 절로 하게 되는 소원을 엘리제 역시 빌고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그녀의 간절한 기도가 밤새 이어졌다.
***
데몬은 여전히 말없이 타나를 바라보았다. 그 붉은 눈에는 분노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저 무심하게 계속해서 적을 관찰하여 파악하는 눈빛.
‘저기다.’
분명 처음 그가 마주했던 타나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이미 데몬과 타나 모두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애초에 가지고 있는 약점이 없다면, 전투를 통해 생긴 부상 중에 치명적인 것을 노려야 했다.
‘하지만 함정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것이 치명타가 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되레 역으로 공격당할 것이다.
“우리가 이럴 필요 전혀 없잖아? 내가 원하는 건 황국 전체가 아니라 그저 로안일 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었다.
엘리제의 몸을 마음껏 취하라 말했던 그때.
“그리고 네가 원하는 건 엘리제니까 우리 서로 하나씩 나눠 갖자고.”
나는 로안을 가지고, 너는 엘리제를 가지고. 왜 싫다는 거지?
“내가 오히려 너를 도와주는 셈 아닌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타나가 데몬에게 달콤한 제안을 던졌다.
“도대체 나를 방해하는 이유가 뭐야. 그래봤자 네가 얻는 건 없을 텐데. 그래서 그토록 원하던 엘리제는 가졌나?”
데몬의 마음을 흔들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전투를 입으로 하는군.”
데몬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의 마력으로 엘리제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순간이 떠오르자, 그동안 미동이 없던 잘생긴 얼굴에 미세하게 균열이 일었다.
그 모습을 타나의 검은 눈동자가 놓치지 않고 담아냈다. 붉은 입이 길게 위로 솟았다.
“아아, 역시.”
네 약점은 엘리제구나.
타나의 웃음을 본 데몬이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아직도 엘리제를 갖지 못하다니, 멍청하긴!”
아하하하하하. 입을 벌려 웃으며 그녀가 커다란 낫을 휘익 들어 올렸다.
“아마 넌, 평생 엘리제를 갖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을 테니까.
데몬의 손에서 응집된 마력이 빛을 마구 쏟아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데몬과 타나의 몸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동시에, 빛이 폭발하며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굉음이 공간을 흔들었다.
“꺄아악!”
“폐, 폐하!”
데몬이 만들었던 보호막도 흔들리고 있었다.
프시케와 로안이 불안한 눈빛으로 공중의 포화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자욱한 연기 사이로 무엇인가가 하늘에서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곧이어 누군가의 몸도 함께 떨어졌다.
그것을 바라본 로안과 프시케의 얼굴이 경악과 절망으로 물들었다.
***
“황궁에 사상자가 많으니 대공가의 치료사와 의사는 모두 급히 와달라는 전갈입니다.”
대공가에 비보(飛報)가 전달되었다. 황궁으로부터 온 전갈에, 데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미카일은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황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미카일과 하임이 탄 마차가 속도를 내어 황궁으로 달렸다.
두 사람의 굳게 다문 입술은 말이 없었고, 슬퍼 보이는 눈은 정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미카일은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마차를 타고 출발하기 전 하임은 시에델에 있는 마가렛에게 한 번 더 전서구를 날렸다.
훈련된 새는 달리는 마차보다도 빠르게 창공을 가르며 시에델로 향했다.
***
“엘, 엘리제 님! 전서구가 또 왔어요!”
마가렛이 여전히 울며 기도하고 있는 엘리제를 불렀다.
소식이 한 차례 더 왔다는 말에 엘리제가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신을 읽은 두 여인의 동공이 최대로 열리는 그 순간.
“뀨! 뀨!”
“!”
갑자기 토리와 로떼가 마구 날뛰며 엘리제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같은 시각.
시에델 왕궁 공주의 성에 나타난 검은 연기가 물 흐르듯이 스르륵 공주의 방 문틈으로 들어갔다.
“끄으으으윽. 루……시아.”
소름 끼치는 소리에 곤히 자던 공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너무도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루시아의 앞에 검은 연기가 다시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무, 무슨……!”
자신은 지금 누굴 저주하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는 누굴 저주할 생각도 없다.
그저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왜 갑자기 부른 적도 없는 자가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저주……해. 당장…….”
천천히 형상을 갖춰가며 목소리가 명령하고 있었다.
“당장, 저주를, 다시…….”
“무, 무슨 말이에요!”
루시아는 다시 한번 기겁했다.
마냥 온통 검기만 했던 연기의 모습이 점점 더 구체적으로 여인의 모습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여인.
“다시, 엘리제를 저주하라고! 어서!”
“싫, 싫어요!”
엘리제를 저주하면 자이드가 아프고 데몬이 죽게 될 것인데 그 저주를 어떻게 다시 하란 말인가! 절대 할 수 없다.
“저주해! 그래야 그 빌어먹을 놈을 죽일 수 있다고!”
이제 형체를 완성한 연기가 점점 실체를 드러내며 분명하게 외치고 있었다.
루시아의 눈이 두려움으로 점점 커졌다.
그러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흑마법사를 보자 덜덜 떨던 루시아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검은 옷에 온통 피투성이인 그녀는, 한쪽 팔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