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데몬, 기어코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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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데몬, 기어코 네가
2022.07.11.
로안과 프시케는 여전히 타나와 대치 중이었다.
두 사람을 보호하는 기사들도 전투 대열을 유지 중이었으므로 미로니카 황궁의 모든 이들은 긴장으로 온몸이 땀에 젖었다. 반면에 여전히 타나는 매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크레미언 대공에게 전갈(傳喝)이 잘 도착했을까?’
프시케는 초조했다. 시녀를 시켜 전서구를 보낸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연락을 받았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니 만약을 위해 서둘러 성하께도 연락을 드려야 했다.
이럴 때 미카일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이미 대공가로 떠나고 없었다.
“이봐 로안.”
타나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할 필요 없어. 그저 한마디만 하면 된단다.”
타나가 검은 눈을 접어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요염한 붉은 입술과 검은 옷차림은 치명적인 유혹을 속삭이는 악마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저 내 것이 되겠다는 한마디면 충분해.”
타나의 말을 들은 로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황제에게 누군가의 소유가 되라니!’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치욕스러운 일일뿐더러 황국을 누군가에게 넘겨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태생부터 황족이었던 그는 누군가를 소유하는 게 당연했지, 소유되는 입장이라니 기가 차서 우습지도 않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로안이 비통하게 중얼대자, 그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이 타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바로 그거야.’
곁에서 듣고 있던 프시케가 바로 화를 냈다.
“감히, 지금 황국의 폐하뿐만 아니라 모두를 농락하는 말을 하고도 네가 무사하기를 바라느냐!”
프시케의 외침에 로안도 정신이 번쩍 들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타나를 노려보았다.
“어머! 정말 나에게 대항할 생각이야? 모두 죽어도 상관없나 봐?”
타나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끄어어어억!”
그녀의 손이 올라가면서 동시에 황궁의 기사들 뒤에서 덜덜 떨고 있던 사제 한 명의 몸이 공중으로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목이 졸린 듯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그가 비명을 질렀다.
“살, 살려주십시오!”
“이게 무슨 짓이냐!”
로안이 외쳤다. 그 사이 목이 졸린 사제가 거품을 물고 혼절하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
“너희는 내게, 손가락 하나면 충분해.”
타나의 말은 사실이었다. 눈앞의 상황에 모두가 다시금 공포에 질렸지만, 로안은 이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해보겠다?”
여전히 비아냥거리며 타나가 위협해왔다. 로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황궁의 모두가 황제를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
자신이 타나에게 항복하는 순간 그들의 목숨이 지금 당장은 보전될 수 있겠지만, 과연 흑마법사의 손에 들어간 황국이 안전할 수가 있을까.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뭐, 꼭 죽고 싶다면야 말리지는 않으마.”
‘데몬이 오기까지만 버텨도 어쩌면…….’
승산이 있을 수도 있었다. 더 이상은 물러설 곳도 없었다. 비장한 로안의 표정을 읽고 프시케도 마음을 굳혔다. 손을 뻗어 로안의 손을 잡자 움찔 놀랐던 로안 역시 프시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전원 공격하라!”
로안이 전력을 다해 외쳤다. 동시에 타나의 눈이 매섭게 올라갔다. 그녀의 입이 만족스러운 식사를 앞둔 야수처럼 활짝 열렸다.
“아하하 하하하하!”
“황국을 위하여!”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전의를 담은 함성이 동시에 공간을 가득 채웠다.
***
콰과광! 콰앙! 쾅!
땅을 울리는 진동과 굉음이 타나의 손길을 따라 번졌다. 그녀가 손가락을 하나씩 들어 올릴 때마다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사방에서 비명과 함께 피가 튀었다. 손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흑마법사와, 칼을 든 기사들의 전투라니 상대가 될 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국의 금색 기사들이 타나를 향해 달렸다.
불속에 타죽게 됨을 알면서도 숙명을 거스르지 못하는 불나방처럼.
“두 분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긴박한 상황 속에 황제와 황후를 보호하는 기사들이 두 사람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며 피신시켰다. 연이은 폭발로 인해 연기가 자욱하여 앞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갈 수 있다면 가 봐 로안. 나는 숨바꼭질도 좋아하니까.”
타나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로안과 프시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하늘 아래 타나의 손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이 있을 수 있을까!
절박한 상황에 헬리오가 간절하게 떠올랐다.
“아니, 데몬이라도 와준다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명과 파편들 속에서 로안이 외쳤다. 프시케 역시 같은 생각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때, 저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어슴푸레 다가오고 있었다.
“크, 크레미언 대공……!”
콰과광 광!
로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바람같이 몸을 날린 데몬이 황제와 황후의 앞에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끌어 올려진 마력으로 주변에 엄청난 진동과 굉음이 일었다.
“데몬!”
로안이 부르짖었다.
그의 도착만으로도 황궁 전체를 에워싸는 보호막이 형성되었다.
귀를 멀게 했던 폭발음이 순간 모두 멈췄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로안이 눈앞의 데몬을 바라보았다.
살아생전 데몬이 이토록 반가운 순간이 올 줄이야.
“늦어서 죄송합니다.”
말을 맺으며 그가 마력을 최강으로 개방했다.
쉬이이잉.
바람이 일듯이 눈앞의 포화와 연기가 걷히며 시야가 넓어졌다. 로안의 눈에 선명하게 자신을 부둥켜안은 프시케와 앞에 선 데몬의 펄럭이는 망토가 들어왔다.
“와주어서 고맙소, 대공.”
프시케가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그러나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어느새 보호막 밖으로 밀려난 타나가 저 멀리서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세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데몬, 기어코 네가!”
언젠가 들어봤던 그 말이었다.
타나의 검은 눈을 바라보는 데몬의 붉은 두 눈이 가늘어졌다.
***
“잘 도착하셨을까?”
나는 마가렛과 함께 이불을 끌어 올려 덮었다. 데몬이 조금 전 시에델을 떠나면서 나를 방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러면서 가능하면 항상 마가렛, 로떼, 토리와 동행하라고 당부했다.
혹시 위험할지 모르니 잠도 마가렛이랑 한 침대에서 같이 자라고 했다.
그래서 함께 침대에 누운 나와 마가렛 사이에 로떼와 토리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괜찮으실 거예요. 각하께서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가셨다면서요.”
마가렛이 내 베개를 두드려 폭신하게 만들어주며 안심시켜 주었다.
“최강의 마력을 가지셨잖아요.”
“그래. 그렇겠지?”
그 말을 들으니 걱정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토리, 로떼 잘 자네.”
“그러게요. 안전하다는 뜻이니 참 다행이에요.”
자이드가 지난번 쓰러졌던 것 외에는 흑마법에 관한 다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원래 주술의 목표는 누구였을까?”
“그러니까요. 저는 엘리제 님일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아, 마가렛!”
너무 고마워서 마가렛의 손을 꼬옥 잡았다.
“마가렛이 내 곁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저도 엘리제 님을 모시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요.”
마가렛이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내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내가 마음으로 사귄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또 친구를 꼽으라면 미카일이 있었고, 프시케도 떠올랐다.
자이드와도 기회가 된다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레이스 마마와도.
루시아는 지금 생각지 말자. 그 아이는 내겐 어려운 퍼즐이자 미로니까.
‘아! 로안과는 아무래도 힘들겠지만.’
나는 로안을 친구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가 집착을 내려놓고 날 친구로 대할 수 있을까?
“엘리제 님, 이제 불을 끌게요.”
마가렛의 말과 동시에 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대공 각하께서 무사하셔야 할 텐데…….’
걱정하는 사이, 빠르게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또 그 꿈이 시작되었다.
***
눈앞의 장소는 누가 보아도 전장(戰場)이다.
비명과 절규, 포화와 연기가 가득한 낯익은 장면이 펼쳐진다. 꿈이라는 걸 알고, 여러 번 봐서 괜찮아진 거지 처음에는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웠던지.
솔직히 말해서, 그렇다고 완전히 괜찮아졌다고 얘기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장면이 괜찮아질 수 있겠는가. 선혈이 낭자하고 사람들이 쓰러지며 죽어가는 장면인데.
‘나다!’
전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내가 마치 그 상황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서 있다. 온몸이 찢기고 상처투성이인 모습으로.
‘나 최후에는 전쟁터에서 죽나 봐. 근데 누구랑 누가 싸우는 거야?’
이번에는 잘 봐둬야지. 누가 싸우는 건지를 알아야 말리지.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 전쟁을 일으킨 양쪽을 다투지 않게 하면 내가 죽는 상황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항상 자욱한 연기 사이로 두 사람의 인영이 언뜻만 보이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보여주려면 붉은 옷 여인 때처럼 제대로 자세히 잘 보여달라고요!”
그래야 전처럼 조심하거나 피하거나 뭐라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근데 내 말을 듣는 대상이 있긴 할까? 내 꿈속인데 내가 듣겠지, 뭐.
알 수 없으나 일단 원하는 바를 외쳤다.
그랬더니 신기하게 연기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뭐야! 그동안엔 꿈속에서 내가 명령을 안 해서 원하는 장면을 못 봤던 거야?”
그건 또 아닌가 보다. 연기가 걷히다 마는 걸 보니.
그런데!
“악! 안 돼!”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걷히는 연기 사이로 보이는 사람이 데몬이었기 때문이었다.
“안 돼! 제발!”
나는 마구 외치며 미친 사람처럼 달려 나갔다.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이 데몬이라서가 아니었다.
자욱한 연기가 걷히며 드러난 데몬이.
입으로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는 황국 최강의 마력을 가졌기에 그동안 전쟁을 수도 없이 치렀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은 어쩌면 과거의 한 장면이거나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그냥 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절로 몸이 움직였다.
꿈속이라 하더라도 그가 무사한지 꼭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저번에 꾸었던 꿈은 이렇지 않았잖아!!”
눈물이 마구 쏟아져 자꾸 앞을 가렸다. 내 앞에 너무나도 소중한 그의 모습이 자꾸만 뿌옇게 흐려졌다.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꾸었던 그 꿈이 아니다.
내가 상처투성이로 전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전에 꾼 꿈은 곧 눈부시게 하얀 빛이 이어질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작 전쟁하는 주체가 누군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었다.
그런데 지금 꾸고 있는 꿈에서는 데몬이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예지몽이 아닐 거다. 제발, 아니라고 누가 말 좀 해 줘. 쓰러지는 것이 데몬이 아니라고.
아니, 이건 그냥 꿈일 뿐이라고!
미친 듯 달렸더니 이제 곧 데몬과의 거리가 지척이었다. 내가 두 팔을 뻗어 그를 안으려는 순간!
번쩍.
눈앞에 섬광과 함께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렸다.
“데몬, 기어코 네가…….”
고개를 들자,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사신의 낫을 들고 입을 길게 찢으며 웃었다.
“……내 낫에 죽는구나.”
서걱.
“꺄아아아악!”
비명을 토해내며 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