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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죽더라도 이 품에서 (71/126)


71. 죽더라도 이 품에서
2022.07.07.



“그렇다면 혹시 지금……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이번에는 내 눈이 마구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주변이 일렁인다.


“허락이야 하지만……. 지금, 여기서요?”

마가렛이 욕실 안에 있는데요? 물론 거기선 잘 안 들리겠지만.

방 안에는 토리와 로떼도 있고.

아니 이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제 방이 좋겠습니다.”

“그래요……, 네?”

그의 낮은 목소리에 더욱 정신이 없어졌다. 가슴이 떨려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잠깐, 그러니까 내가 조금 전, 장난처럼 유혹을 했어.

근데 이분께서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하신 건가?


‘그럼, 오늘 우리……! 설마! 혹시??’

“마가렛, 오늘 토리와 로떼를 부탁한다.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내 방으로 연락하도록.”

“예, 각하! 알겠습니다.”

그가 욕실 안에 있는 마가렛을 향해 외치더니 그대로 나를 들어서 안고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탕 안에 물을 받다 말고 대답하는 마가렛의 소리가 멀어졌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물론 그를 사랑하고 무척이나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래도 되나?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성과 본능이 마구 서로 싸운다.

그래, 이제 때가 되었지 싶다가도.


‘아냐, 그래도 아직은 완전히 자유도 못 찾았는데…….’

조심스럽다가도.


‘아니 근데 이러다 내가 자유 찾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와 더 가까워질 수조차 없게 될 텐데 그때 가서는 지금 다가가지 않은 걸 후회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로 무모해졌다.


‘사랑은 타이밍이 생명인데!’

게다가, 아끼고 소중히 하고 싶다고 말하던 그의 표정이 분명 어딘가 슬프고 미안해 보였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래,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이실지도…….’

기회가 있을 때 단 한 번이라도 서로의 모든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


‘설마…… 내가 꾼 꿈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러니 그가 그 꿈을 알고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독심술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내 딴에는 나름 합리적 의심이었다.

그가 놀라우리만큼 사람의 속내를 잘 읽을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그만큼 감이 좋은 데몬이기에, 마치 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듯한 눈치로 느껴졌다. 그래서 한편으로 무척이나 갑작스러웠지만, 동시에 정말 간절했다.

안겨 있는 그의 품이.


‘죽더라도 이 품에서 죽었으면…….’

절로 소원이 빌어졌다.

나를 안아 든 단단한 팔과 넓은 어깨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너른 가슴이 편안하고 아늑했다. 그의 품은 따뜻했고, 고르게 오르내렸다. 어디선가 둥둥 빠르게 북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데몬의 심장 소리…….’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고개를 돌리면 내 귀가 그의 가슴에 닿아서 빠르고 강렬한 고동 소리가 더 잘 들렸다.


‘내가 없더라도 이 심장은 계속해서 힘차게 뛰어주었으면.’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이겠지. 그의 성정상 한동안은 잊지 못해 힘들어할 수도 있고. 내 이기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날 잠시라도 기억해주면 좋겠다.’

물론, 안 죽으면 가장 좋겠지. 하지만 얼마 전 불길했던 그 꿈은 분명 누군가가 죽는 꿈이었는걸.

선혈이 낭자했고, 누군가의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이어졌었다.

쓰러지는 이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나와 관계된 상황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뒤는 온통 하얀 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나의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예지몽이라 생각했다.

루시아 공주의 미약을 미리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꿈이 미리 일어날 일을 보여준 거라고. 그게 가까운 미래인지 먼 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처음에는 두렵고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면서 의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미 한 번 죽어봐서인가? 아님, 언젠가는 죽게 될 거라 나도 모르게 초연해지게 된 걸까?’

아니면 부정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이건 꿈이고 사실이 아닐 것이라 애써 외면하며.

어쨌든 그 꿈을 꾸고 나니, 살아 있을 때 데몬과 더 가까워지고, 마가렛과도 이것저것 추억을 쌓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싶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니까.


‘생각해보니 난 아직 지난번 꿈속에서 날 다그치며 혼내던 그 선생님은 아직 못 만났네.’

모든 꿈이 다 예지몽은 아닌가 봐?

아니면 그건 원작 속 진짜 엘리제의 기억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데몬의 품에 여전히 안긴 채로 그의 방에 도착했다.


 

***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와 한 단계 더 가까워지는 거겠지?’

콩닥콩닥. 아,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데몬에 의해 문이 열렸다. 동시에 시원하고 매력적인 향기가 확 밀려왔다. 뭘 한 것도 아닌데 벌써 취하는 기분이 들어 몽롱했다.

물론 처음 온 것은 아니다. 지난번 데몬이 루시아의 미약을 마셨을 때, 그의 방에 왔었다.

그땐 데몬의 상태가 다급했기에 방의 분위기를 느낄 새가 없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방에 도착하자 온통 그의 향기가 방 안 곳곳 가득했다.
마치 가만히 방에 혼자 서 있어도 그의 품에 안긴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깔끔하고 단조로운 색상의 방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커다랗고 하얀 침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침, 침대가 있네요?”

아차, 당연한 말을!

이미 저 침대에 그를 직접 자빠트려 본 적까지 있으면서!


“아니, 잘 정돈되어 있네요.”

속이 타니 자꾸 헛소리가 나온다. 저 하얀 침대에서 손이 묶인 채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던 과거의 그가 떠올랐다. 꿀꺽, 나도 모르게 긴장으로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때 데몬이 한 손으로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싸 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더 다가가도 되겠습니까?”

이미 내 입으로 허락을 뱉었는데 이제 와 무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시금 확인하는 물음을 통해 그가 얼마나 나를 아끼며 배려하고 있는지 충분히 느껴졌다.


“……실은 방에 와도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요…….”

“천천히 하겠다고 했지,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

그러니까, 오늘 뭔가 하긴 하겠단 거잖아. 가슴이 떨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그의 간절한 눈빛을 보니 나 역시 굶주린 욕망이 불꽃처럼 일었다.


‘내가 이렇게 밝히는 여자였다니!’

놀라웠으나 나는 빠르게 내 마음을 인정했다.

나는 지금. 그를 원한다.

고개를 들어 데몬을 바라보았다. 붉은 눈이 평소보다 깊게 일렁였다.


“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의 시선이 얽히고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아름다운 붉은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 눈이 절로 천천히 감기고 있었다.

탁탁탁! 탁탁탁!


“!”

그때 급하게 창문을 무엇인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다다닥! 타다다다닥!

조금 더 빠르고, 긴박하게.


‘누구야, 이 중요한 순간에!’

방해한 자가 누구이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데몬이 감싸 안았던 내 허리에서 손을 스르륵 풀었다.

창문을 연속으로 두드리고 있는 것은, 비둘기였다!

***

미로니카 황국에서 그에게 비상시에만 보내는 초고속 전서구가 창문을 마구 쪼아대고 있었다.


“……전서구?”

엘리제는 어리둥절해졌다.

가만두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봤는데 사람이 아니라 비둘기였다.

이전에 읽었던 소설 속에서 비둘기들의 역할을 알고 있다. 주로 소식을 빠르게 전달해야 할 때, 또는 남모르게 전해야 할 것이 있을 때 사용하는 연락책.

훈련된 비둘기가 빠르게 창문을 쪼아대는 모습이 긴박해 보였다.

자신의 허리를 감았던 따스하고 단단한 팔이 풀리자 그 자리가 허전해서 더욱 서운하게 느껴졌다.


‘힝.’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아 무척 속상했지만 진지한 데몬의 표정을 보니 마냥 투정 부릴 수 없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데몬이 엘리제에게 다정하게 말하더니 창문을 열고 전서구 다리에 묶인 끈을 풀었다. 돌돌 말린 작은 종이가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무슨 내용인지 글을 읽는 데몬은 말이 없었다. 잘생긴 미간에 미세한 선만 생겼을 뿐이었다.


“급히 미로니카 황궁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심각한 일이에요?”

“다급한 일입니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걸린다고?


“그럼 저도 같이 갈래요!”

급한 일에 데몬을 부른다니 걱정도 되었고, 오래 걸릴 거라니 더욱 보내기 싫었다.


“시에델 왕가가 엘리제 님을 성녀로 모시고 싶다고 말한 상황에, 길게 자리를 비우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합니다. 게다가…….”

그게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위험한 곳에 절대 데려갈 수 없었다.


“아, 그러네요. 그리고요?”

“황제 폐하께서 엘리제 님이 기억을 많이 되찾은 것을 알고 계시니 미로니카에 가시려면 확실한 대책을 정하신 후가 좋습니다.”

미로니카에 어떤 상황이 펼쳐졌는지 모르는 엘리제는 그의 말에 수긍했다. 이곳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업이 있으니 적어도 어느 정도의 마무리는 하고 시에델을 떠나야 한다.


“그렇지만…….”

아쉬워하는 엘리제의 두 손을 잡고 데몬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지하고 그윽한 눈빛이 엘리제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데몬도 가기 싫구나.’

맞잡은 따뜻한 손과 눈빛에서 자신과 함께 있고 싶은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절대 다치시면 안 돼요!”

엘리제의 단호한 명령에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책상 쪽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으니, 꼭 무사히 돌아와서 전해드리겠습니다.”

“선물이요?”

이미 그에게 받은 것이 많은데 또 선물이라니. 선물 안 줘도 되니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는 속마음을 감추었다.


“약속하셨어요! 무사히 최대한 빨리 돌아와서 제게 꼭 주셔야 해요.”

“약속합니다.”

“선물도, 당신도 둘 다요.”

“!”

보내기 싫지만, 무척이나 보고 싶을 테지만 지금은 그를 믿고 보내주어야 했다.


“물론입니다. 다녀와서 조금 전 못다 한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네. 기꺼이요.”

엘리제가 활짝 웃었다. 그녀의 미소가 너무나 눈부셔 데몬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꽉 껴안고 싶은 것을 참아냈다. 빛처럼 눈부신 그녀를 자신의 붉은 두 눈에 더욱 깊이 담았다. 며칠간 보지 못할 것이니까.


“급하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가보세요.”

데몬이 아쉬운 마음을 담아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두 볼을 감싼 커다란 손도, 이마에 닿은 입술도 무척이나 따뜻했다.


“아!”

입술이 닿는다면 그녀도 그를 보내주기 싫어질 것이고, 그는 황국이 망하든 말든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들은 이마에 입술을 누르는 이 순간으로 만족했다.


 

***

데몬은 황급히 미로니카 황국을 향해 말을 달렸다. 미로니카 황국의 명운이 달린 위급상황이었다.

언제 돌아오게 될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반드시 무사히 돌아와서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했으니 그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먼저 미로니카를 위기에서 구해야 했다.

「흑마법사가 나타나서 두 분 폐하가 위험하십니다. 그녀의 힘이 매우 강력해 보입니다. 아직 공격당하고 있지는 않으나 매우 위급한 상황이니 속히 오셔서 도와주십시오.」

프시케가 이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쪽지를 보내 밀회를 요청했던 적이 있었다. 쪽지에는 흑마법사가 나타났고 그자가 여자라 적혀 있었다.

데몬은 이전에 엘리제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그 주술을 떠올렸다. 그리고 주술에 삼켜져 눈빛이 검게 변했던 엘리제도.


‘혹시 이전에 엘리제의 몸을 장악했던 그 존재일까?’

그런데.


‘이상하군.’

의아했다.


‘분명 엘리제 님은 주술의 목소리가 남자의 것이라 했었는데…….’

맨 처음 주술이 발동되어 목소리가 들린다고 했을 때, 그녀는 분명 어떤 남자가 자신을 부른다고 했었다.


‘목소리야 얼마든지 변화를 줄 수 있겠지.’

하지만 데몬의 감은 다른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최고 속도로 말을 달려 미로니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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