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성녀(聖女)와 사신(死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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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성녀(聖女)와 사신(死神)
2022.06.30.
시에델의 국왕 페르만은 왕후 그레이스와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왕태자 자이드의 목숨을 구해준 엘리제를 반드시 시에델에서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이미 시에델의 왕족도 귀족도 되기 싫다고 했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성녀(聖女)로 추존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레이스가 페르만에게 조심스럽게 동의를 구했다. 이미 귀족 중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기도 했다. 페르만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엘리제 님이 성녀가 되어준다고 하실지…….”
“솔직히 설득이라도 해야 할 판입니다, 전하.”
사실 두 사람은 그녀가 정령수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현상은 직접 보아도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에게 자신들보다 강한 정령의 힘이 있다는 것을 예상만 했을 뿐이지 그 정도로 초월적인 능력일 줄은 몰랐다.
정령의 힘을 물의 형태로 바꿀 수 있다니 들어본 적조차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그레이스는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그녀가 만든 정령수가 매우 강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시에델 왕국은 몰라도, 우리 왕가의 운명이 그녀의 손안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
시에델은 정령의 힘에 누구보다도 집착하고 그 정통성을 중히 여긴다. 특히 그 힘이 왕가의 핏줄에서만 내려오기 때문에 왕족이 되었고, 그 정령의 힘을 토대로 그동안 시에델을 지배해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왕가보다 더 강력한 정령의 힘을 가진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 존재가 곧 새로운 왕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니 현 시에델의 왕권은 그녀의 선택 하나로 그 운명을 달리할 수도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페르만을 향해 그레이스가 쐐기를 박는 한마디를 던졌다.
“전하, 혹시라도 엘리제 님께서 그 정령수를 왕가가 아닌, 다른 귀족에게 팔기라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
페르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만약 귀족들이 돈으로 정령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어느 귀족이 그들을 왕족으로 대하겠는가!
누구나 정령수를 가지면 ‘왕족’이 될 수 있는 것을.
그런 폐쇄적인 곳이 시에델이었다. 오직 정령의 힘을 통해 존재하는 왕국.
“그러니 반드시 엘리제 님을 왕가와 별개로 시에델이 추앙하는 존재로 만듦과 동시에 시에델에 묶어두어야 합니다.”
그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 ‘성녀’라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보기에 엘리제는 아직 각성을 모두 완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온전한 각성을 이루었을 때는 더욱 강력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때 가서 붙잡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지금이 성녀로 모시고 붙잡을 절호의 기회야!’
게다가 그녀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호위 기사인 대공이 있다.
무시무시한 최강의 마력이, 이 세계 최강 정령의 힘을 보좌하고 있는 셈이었다.
붉은 눈에 검은 제복을 입은 데몬이 적들을 대할 때는, 마치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온 사신(死神)과도 같아 보인다고 들었다.
그레이스는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엘리제 님을 왕후가 설득하여 주시오. 그럼 그 뒤에 회의를 소집하여 정식으로 왕가와 귀족들 앞에 엘리제 님을 성녀로 추존하고 대관식을 준비하겠소.”
“예, 그리해주십시오.”
이제 시에델의 왕가는 엘리제의 입김 아래 놓인 풍전등화임을 페르만도 인정했다.
***
우리가 만든 뒤보리 크림이 완전 히트를 치고 있었다. 사업 매출의 최대 기여자는 왕궁의 여인들이었다. 그중 루시아가 가장 많은 제품을 구매했다고 했다.
‘루시아가 단골이라니 왠지 기분이 묘한데?’
그 사실을 거래처 주인을 통해 전해들은 마가렛과 나는 일단 안심했다. 지난번 루시아의 선물이 ‘고객 불만 사항’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때, 왕후 마마로부터 연통이 왔다.
“엘리제 님, 왕후 마마께서 만나 뵙기를 청하시는데 혹시 괜찮으십니까?”
연락을 받은 데몬이 물었다. 내가 허락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마가 직접 날 찾아오셨다. 나는 우선 반갑게 맞이했다. 혹시 자이드 왕태자의 상태 때문에 오셨나?
“엘리제 님, 시간 내주시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마마께서 자리에 앉곤 자이드를 구해주어 고맙다고 다시 인사를 하더니 뜬금없이 내게 사정했다.
“부디 시에델의 성녀가 되어주십시오.”
“네? 제가 뭐가 되어요?”
너무 황당해서 예법에 맞는 말이 안 나온다.
뒤보리 부인이 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나더러 성녀가 되어달라고?
‘읽었던 작품 중에 성녀가 되었다가 괜찮았던 적이…….’
아…… 없었던 것 같은데.
황제의 치료제, 성하의 노예, 전장의 트로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성녀님들은 매일 밤 고통 속에 신음하셨었다고!’
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데몬이 그레이스에게 대신 정중하게 말을 해주었다.
“생각해보신 후 결정을 편히 하실 수 있게 엘리제 님께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충분히 고려해보신 후 결정해주십시오. 그러하나, 저는 간청 드리는 바입니다.”
왕후 마마께 인사드리고 배웅까지 해드렸더니 데몬이 내 볼을 감싸며 걱정해주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 이 따뜻하고 큰 손이랑 이 붉은 눈빛이 너무 좋다.
마치 얼었던 몸을 난로 앞에 두고 녹이는 기분이야. 마음이 노곤 노곤 말랑말랑해져.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서요. 제 독립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요?”
“시에델에 대대로 신성국처럼 서열이 있었다면 그랬겠지만, 지금으로선 나쁘지 않은 제안입니다.”
그런가?
“혹시 시에델의 왕이 되고 싶으십니까?”
“제가요? 아뇨!”
나는 자유를 원했지, 엄청난 책임이 있는 자리는 원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더욱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엘리제 님을 정령의 힘에 관해서는 왕실 이상의 가장 높으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내게 권위와 지위를 주고, 책임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환영이다.
“성녀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시에델에 성녀는 처음이니 엘리제 님께서 정하시는 대로, 그것이 성녀가 할 일이 될 것입니다.”
“!”
진짜로 나쁘지 않은데?
“제가 원하는 조건을 제시하고 그걸 받아주는 대신 성녀가 되어주겠다는 거래도 가능할까요?”
데몬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날 바라보며 웃었다.
“물론입니다.”
어째, ‘어디 가서 당하고 살지는 않겠군.’ 하며 안심한 표정이다.
“그렇다면 일단 잘 이용해봐야겠네요.”
긍정적으로 검토해봐야겠다.
***
미로니카 황궁의 한쪽.
“성하께서 말씀하신 곳이 분명합니까?”
결계의 완성을 위한 지점과 주문이 분명한데 주문이 발동하지 않는다는 사제의 말에 로안과 프시케는 망부석이 되어 있었다.
“예. 제가 분명 여러 번 확인하였습니다. 어제 성하께서 직접 이곳에 저희를 데리고 오셔서 말씀하셨으니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헬리오가 쌓아 올린 결계는 신성력이 담긴 빛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황궁 외벽과 궁 안 곳곳에 빠짐없이 존재하고, 그 형상이 문을 이루게 되면 투명하게 사라졌으니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곳에 결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니 정확히 어디가 결계의 마지막인지, 어디가 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로안과 프시케는 전적으로 사제들의 말을 믿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사제들이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이곳이 맞다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소가 잘못된 건 아닐 것이다. 뭔가 주문에 실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주문이 잘못되었을 리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 세상 단 한 명뿐인 신성국의 왕 성하께서 알려주신 주문인데.
틀렸을 리가 없다.
그러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로안은 초조해졌다.
이미 신성국 일행이 출발한 지 한참이 지났으나, 지금 사람을 시켜 쫓아간다면 오늘 안으로 헬리오의 답변을 듣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서 상황을 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안이 물었다.
“제가 조금만 더 시도해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땀까지 흘려가며 중년의 사제가 고전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성하께 직접 받은 명령과 주문이라 실수를 하고 싶지 않을 것이었고, 최선을 다해 일을 마무리 짓고 싶을 것이었다.
로안은 당장 사람을 보내어 헬리오에게 다시 장소와 주문을 확인받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흘렀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사제의 흰옷은 이제 종일 흘린 땀으로 얼룩이 질 정도였다. 주문을 외는 그의 모습이 정말 힘겨워 보였다.
“사제님…… 괜찮으신 것이 맞습니까?”
안 괜찮아 보이십니다. 프시케가 걱정되어 물었다.
“사제님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법입니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어 성하께 다시 확인을 받는 것이…….”
프시케가 말을 하던 중에 사제가 움찔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헉!”
뭔가 이상하다. 불안함을 느낀 로안이 다급하게 물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결! 결계가!”
헬리오가 정성을 들여 쌓아올린 결계가 드디어 하얀색 눈부신 빛을 내며 문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빛으로 된 문들이 마치 거대한 벽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아! 이곳이 결계가 맞았구나.’
다행이었다.
“드디어 주문이 발동하는 것입니까?”
로안이 기쁨에 들떠서 사제에게 물었다. 이제 마지막 주문을 외워서 결계가 완성되기만 한다면 그 긴 기다림이 끝날 것이었다. 황국을 흑마법의 위협으로부터도 지킬 수 있고, 그토록 보고 싶은 엘리제도 데리고 올 수가 있었다.
로안의 얼굴이 기대와 환희로 가득 찼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자신과는 정반대로 사제의 표정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제의 몸이 덜덜덜 떨려왔다.
지금 그들 앞의 결계는 완성을 위해 빛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뭐, 뭔가!”
온다. 무언가 결계의 빛을 넘어 다가오고 있었다.
둥둥둥 둥둥둥. 모두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큰 울림과 함께.
“으…… 으아악!”
사제들이 모두 뒷걸음질 치다 주저앉고 말았다.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결계의 문들 사이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로안과 프시케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안 돼! 폐하를 보호하라!”
프시케가 외쳤다. 완성 직전이었던 빛의 결계에 균열이 생기는 것이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로안과 사제들 모두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굳었다.
아무런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하얀 결계가 그대로 녹아내리듯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볼 뿐.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보호하라!”
기사들의 외침과 함께 로안과 프시케의 뒤에 있던 그들이 앞으로 쏟아져 나오며 두 사람을 보호했다.
콰르릉 쿵쿵. 드드드드.
커다란 굉음과 함께 황궁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동시에 눈앞의 밝은 빛이 무너져내린다.
결계가 무너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로안의 몸도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그때, 검은 연기 사이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아름다우면서도 서늘하여 절로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가.
“내 이름은 타나.”
검은 연기는 어느덧 덩어리처럼 뭉쳐져 여인의 형상을 이루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사신(死神)과 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에, 낫을 든 여인.
“너희들의 주인이 되어주마.”
연기와 함께 흩어지는 그 말에, 로안은 그만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돌처럼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