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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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미궁
2022.06.27.
자이드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점점 이성을 찾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이제 더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아직 예전처럼 생활이 가능해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죽었다 살아난 것으로 보일만 했다.
“천만다행이다, 자이드!”
“부왕과 모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기운 없는 목소리로 왕태자가 입을 열자, 페르만과 그레이스는 결국 오늘 자이드를 부둥켜안고 오열하고 말았다. 루시아 역시 곁에서 엉망이 될 만큼 울었다.
자이드가 목숨을 잃을까 봐 누구보다 두려워했던 사람은 사실 루시아였다. 자신 때문에 오라버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했으니까.
그런데 정말 우습게도 그 절망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이가, 자신이 저주했던 엘리제였다.
‘이제 어떡하지?’
오라버니가 아프지 않게 된 것은 정말 다행이지만, 그럼 주술은 어떻게 되는 건가?
‘혹시 엘리제 덕분에 주술이 멈춰진 건가?’
그럼 대공 각하께서 무사하시겠네?
루시아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물론 엘리제는 지금도 너무나 미웠지만 데몬과 오라버니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은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엘리제가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고 불행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그렇다고 해서 엘리제가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왜 엘리제를 누군가를 죽여가면서까지 없애고 싶다 저주했을까?
‘아, 아냐. 난 그런 적 없어.’
누군가가 죽기를 바란 적은. 그게 데몬이나 자이드이길 바란 적은 더더욱.
‘잠시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해.’
루시아가 도리질했다. 이제 그런 건 다 지나간 일일 테니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합리화했다.
그리고 멀리서 데몬을 지켜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는 그녀의 일상은 평화롭게 지속되는 듯 보였다.
***
“엘리제 님께서 왕태자님의 목숨을 구하셨다고요?”
“제가 직접 봤어요. 죽어가는 태자 저하를 살리시는 모습을요!”
궁의 여인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성녀(聖女)가 아니신가!”
“정령의 힘이 그토록 막강하신데 당장에라도 왕가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귀족들 사이에도 말이 퍼지며 의견이 분분했다.
엘리제는 이미 왕가의 일원이 되기 충분한 자격이 있었고, 왕후보다 더 강력한 정령의 힘으로 죽어가던 왕태자를 살렸다. 그런 존재에게 은혜를 입고도 왕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처사였다.
“엘리제 님을 시에델의 성녀로 모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왕후궁의 시종장으로 있는 백작 부인이 그레이스에게 귓속말해 주었다.
“나부터도 그렇게 해드리고 싶은 참이라네.”
무엇보다도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진 엘리제가 다른 나라가 아닌 시에델의 일원이 되는 것이 필요했다. 정령의 힘은 곧 시에델의 정체성이니까.
페르만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루시아가 들어왔다.
“어마마마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자이드의 병세가 나아지자 공주 역시 눈에 띄게 얼굴이 밝아졌다. 그레이스는 가엾은 딸이 오라비의 병환으로 한차례 더 마음고생을 한 것이라 여기며 측은하게 생각했다.
“전하를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급한 일이니?”
“귀한 선물을 받아서 어마마마께도 드리려고 왔어요.”
이미 차고 넘치게 귀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공주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
“보석인가 보구나?”
공주는 화려한 장식물이나 사치품을 좋아했다.
“보석은 아니지만, 어마마마를 더욱 아름답게 해드릴 것이 분명한 선물이어요!”
모후를 위해 아껴놓았던 선물을 내밀며 루시아가 수줍게 웃었다.
우아한 무늬가 그려진 고급스러운 보라색 상자가 열렸다.
“예쁘구나!”
“효과는 더욱 놀랍다고 해요.”
선물이 모후의 마음에 든 것 같아 루시아는 신이 났다.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병에 물건의 이름이 금색으로 박혀 있었다.
『뒤보리 크림』
***
미로니카 황국은 신성국으로 출발하는 헬리오를 정성스럽게 배웅했다.
“황국을 직접 방문해주시고 결계까지 쳐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하.”
로안은 헬리오를 향해 벌써 여러 차례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언제든 필요하실 때 찾아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프시케도 마음을 전하며 배웅하고 있었다. 헬리오가 빛처럼 투명하고 선한 웃음을 지었다.
“이토록 오랜 시간 함께 힘써주셔서 저도 감사했습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헬리오가 프시케 뒤에 선 미카일을 바라보았다.
“미카일 사제는 볼일을 마치는 대로 신성국으로 와 주면 좋겠구나.”
“예, 성하.”
그는 대공가에 용무가 있어 조금 더 황국에 머물다 출발하기로 했다. 인사를 마친 헬리오가 황궁에서 마련해준 화려한 마차에 몸을 실었다.
두 명의 사제가 헬리오 다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이후 식료품과 구호품을 실은 수레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맨 앞에 선 기사단장이 외쳤다. 마차 앞뒤로 성하의 일행을 신성국까지 모실 기사들이 하얀 말을 타고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황금색 마차와 수레들이 일렬로 신성국을 향해 움직였다.
로안과 프시케는 한참 동안 행렬을 바라보았다.
“저도 바로 대공가로 출발하겠습니다.”
“예, 사제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미카일도 로안과 프시케에게 인사하고 목적지로 향했다.
배웅을 마치니 벌써 점심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식사를 한 후에 오후가 되어 로안과 프시케는 남은 사제들과 함께 결계 앞에 섰다. 결계의 완성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헬리오가 마지막 주문을 맡긴 사제의 표정이 어딘가 좋지 않아 보였다.
“사제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프시케가 조심스레 다가가서 물었다.
“저…… 그게…….”
난처한 표정의 사제가 한참을 망설이다 대답했다.
“성하께서 말씀하신 지점과 주문이 분명한데…….”
“그런데요?”
“이상하게도 주문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미궁 속에 빠진 사람처럼 로안과 프시케는 어리둥절해졌다.
***
후드를 쓴 엘리제와 데몬이 상점을 나왔다. 물건을 납품하고 주문서를 받아서 나오는 길이었다.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는 일이지만, 엘리제는 데몬과 시장을 돌아다니고 싶어 그를 졸랐다.
“나온 김에 구경 좀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시장하지는 않으십니까? 뒤보리 부인.”
거래처 몇 곳을 돌았더니 어느덧 식사 시간이 가까워졌다.
풋. 데몬의 말에 엘리제는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네, 좀 허기지긴 해요.”
밖에서는 뒤보리 부인이라 불러달라 그에게 청했었지만, 막상 그가 부르니 기분이 묘했다.
“저도 다른 이름으로 불러드릴게요. 원하시는 이름이 있으세요?”
시원하게 웃으며 엘리제가 묻자 데몬이 잠시 후에 대답했다.
“……덴(Den)이라 불러주십시오.”
“덴 경.”
어딘가 퇴폐미가 흐르는 동시에 모든 것을 편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은신처와 같은 그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께서 불러주셨던 이름이기도 합니다.”
“아!”
그의 어릴 적 배경이 떠올라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렇게 소중한 이름을…… 제가 불러도 되는 건가요?”
“당신이시니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그 이름으로 불러주는 이는 없으니까요.”
누군가의 일생을 글 몇 줄로 대충 아는 것과 직접 들어서 알게 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과연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덴, 당신에 대해 더 많이 알려주세요.”
더 알고 싶다. 그래서 슬픈 과거가 있다면 들어주고, 슬픔을 함께 나누어 덜고 싶었다.
“저는 당신이 더 궁금합니다.”
데몬이 엘리제의 손을 잡아 올렸다. 붉은 두 눈을 그녀에게 그대로 고정한 채로,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찍듯이 천천히 눌러 입을 맞췄다.
앗. 그 느리고 뜨거운 움직임에 엘리제의 몸을 타고 전율이 흘렀다.
‘궁금한 게 무엇일까?’
혹시라도 그를 사랑하고 있느냐 묻는다면 당장 그렇다고 말해줄 텐데.
“일단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부인?”
부인이래!
진짜 그의 부인이라도 된 기분이라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예명을 뒤보리 부인으로 짓길 정말 잘했지!
‘굿 잡, 과거의 나 자신!’
시장 곳곳에 먹기 좋은 음식들이 많았다. 길 가던 사람들이 노점 앞에서 주문하고 식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잘 익은 야채와 고기의 향이 진하게 풍겼다.
“앗! 저기 닭꼬치!”
벌써 메뉴를 정한 뒤보리 부인이 노점을 향하고 있었다. 말없이 미소 지으며 데몬이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다.
***
‘다음 사업은 요식업을 할까?’
닭꼬치 사업이 좋을 것 같다.
이곳에서는 닭고기와 야채를 불에 구워 소금을 친 것이 다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무척 맛있었지만, 엘리제는 현실에서 먹던 고추장 맛과 간장 맛 닭꼬치도 먹고 싶었다.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우선 지금 사업으로 경제적 기반을 다진 후에 자본을 좀 여유 있게 마련하고……. 이곳 재료들을 이용하여 양념장을…….’
머릿속에 새 사업 구상이 가득한 엘리제를 말없이 따르던 데몬이,
갑자기 그녀 바로 뒤에 기척 없이 다가와 섰다.
“앗! 무슨 일이세요?”
수상한 자라도 나타난 건가?? 몸이 긴장으로 경직되었다. 그런데.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뒤에서 엘리제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응?’
“저 외에 다른 것만 생각하시는 것 같아 조금 속이 상합니다.”
“!”
그의 속삭임이 엘리제의 귓가에 닿으며 뜨거운 숨결 역시 목 뒤와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엘리제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내가 알던 그 데몬이 맞나요?
진지하고 진중한 성격의 그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니!
‘귀, 귀엽다!’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엘리제를 지켜보다 질투가 난 모양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쿡쿡 혼자 웃던 엘리제가 고개를 살짝 돌려, 검은 후드 안으로 보이는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와의 거리가 정말 지척이었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붉은 눈뿐만 아니라, 그녀가 사랑하는 잘생긴 미소가 더욱 빛났다.
‘이 달콤한 미소를 나만 알고 있다는 것이 가장 뿌듯해.’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꼬옥 잡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 엘리제에게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이 무척이나 고마워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 움직여 그와 깍지를 꼈다.
데몬이 잠시 움찔하더니 곧 깍지 낀 손을 더욱 꼭 잡아 빈틈없이 밀착시켰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녀와 그렇게 하나가 되고 싶다는 듯이.
***
그레이스에게 선물을 전하고 온 루시아는 만족스러웠다. 방으로 돌아와 남아 있는 보라색 상자 몇 개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가 효과가 좋더라고 말하면 더 가져다줄 여유분이었다.
오라버니 자이드는 곧 쾌차할 것이다.
‘대공 각하께서도 무사하시고.’
따지고 보면 자신이 위험한 흑마법을 끌어들인 것은 모두 엘리제의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무 일 없이 왕궁이 편안한 것도 엘리제 덕분이었다.
“쳇.”
혀를 찬 공주가 보라색 상자 중에 하나를 집어 들고 사람을 불렀다.
***
잠시 후, 시장에서 돌아온 엘리제는 마가렛에게 상자 하나를 받았다.
“루시아가 선물을 보냈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개과천선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마가렛, 혹시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는데 나만 모르는 거야?”
그럴 리가요. 마가렛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상자를 열어본 엘리제는 웃지 못했다.
“왜, 왜 그러세요? 그 안에 저주 인형이라도 들은 거예요?”
마가렛이 불안한 듯 상자와 엘리제를 번갈아 보며 묻자, 엘리제가 상자에서 크림을 꺼내어 보여줬다.
“아니. 이거.”
“!”
마가렛이 웃음을 참느라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들이 직접 만든 뒤보리 크림이었다.
저기요. 내가 이거 제조자이자, 이 기업의 회장입니다만?
루시아가 사용 중이라면 엄청 유명해졌다는 증거였다.
“우리가 만든다는 걸 알면서 보냈나?”
“!”
그렇다면 욕인 것 같았다.
“설, 설마요.”
의도가 무엇이든 공주의 머릿속은 엘리제에게는 미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