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아, 다정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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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아, 다정하신 분
2022.06.23.
“엘리제 님을 뵙고 싶습니다.”
그레이스가 엘리제를 찾아왔다. 문 앞을 지키고 섰던 데몬이 정중하게 거절하는 말을 꺼내었다.
“자이드 왕태자님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엘리제 님께 위험한 상황은 제가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레이스가 데몬 앞에서 무너지며 매달렸다.
“!”
“마마!”
그레이스가 무릎을 꿇자, 그녀를 따르던 모든 이들도 데몬 앞에 함께 무릎을 꿇었다.
“부탁입니다, 대공! 지금 시에델에서 가장 강력한 정령의 힘을 가진 사람이 엘리제 님인 것을 저는 알고 있어요.”
“!”
데몬을 비롯하여 시에델 왕궁의 시종들은 깜짝 놀랐다.
그 자존심 높은 왕후가 대공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많은 시종들이 보는 앞에서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엘리제의 정령의 힘이 더 강함을.
“아들의 목숨 앞에서 제 권위와 왕위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했던 그레이스였다.
그녀에게 새로 주어진 삶에서 정령의 힘도, 왕위도 중요했지만 그것들을 제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식’이었다. 그레이스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각성은 아이들이 열쇠였다.
“그저 단 한 번만이라도 자이드를 위해 엘리제 님께서 힘을 사용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너무나 간절한 어미의 요청이라, 지켜보는 모든 이가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였다.
데몬은 그만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아픈 자신의 곁을 지키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달칵 엘리제 방문이 안에서부터 열렸다.
“엘리제 님!”
밖으로 나온 엘리제를 보고 데몬이 놀라 외쳤다.
“괜찮아요, 대공 각하. 예전의 제가 아닌걸요. 지금은 각하께서도 곁에 계시고요.”
흑마법의 주술을 먹고 조종당하던 예전의 엘리제가 아니다. 지금은 데몬도 곁에 있었고, 정령의 힘도 있었다.
“엘리제 님, 제발 저희 자이드를…….”
그레이스는 이제 눈물마저 차오르고 있었다. 엘리제가 함께 무릎을 꿇고 왕후의 몸을 일으켰다.
“함께 갈게요. 왕태자님께서는 어디 계시나요?”
“!”
그레이스의 눈이 희망으로 환하게 열렸다.
***
데몬과 함께 자이드의 방에 도착한 엘리제는 먼저 자이드의 상태를 살폈다.
창백한 얼굴을 한 왕태자는 침상에 누워 안타까우리만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공께서 주술의 형태를 확인해주실 수 있으시죠?”
엘리제가 부탁했다. 데몬이 눈에 붉은빛을 내며 자이드를 바라보았다.
“왕태자께서 흑마법의 주술에 걸리신 것이 맞습니다. 제물로 선택되신 듯하니 주술을 건 사람이 진짜로 노리는 이는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지요?”
옆에서 듣던 그레이스가 물었다.
“자이드 왕태자님은 희생물일 뿐이고, 흑마법사가 목표로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흑마법사가 또 다른 누구도 노린다는 말이오?”
페르만은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애초에 흑마법 따위를 다루는 이가 어떻게 시에델에 마수를 뻗쳤으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누군가를 해치려 한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본왕이 부덕한 탓이오.”
페르만이 중얼거렸다.
“흑마법사가 노리는 그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그레이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자이드도 위험한 상태인데 그녀의 소중한 사람 중에 또 다른 누군가도 위험에 빠지게 될까 봐 너무도 두려웠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데몬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행인 것은 이곳이 시에델이고 왕태자께 정령의 힘이 있으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주술이 기체의 형태로 흡수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제의 경우는 액체의 주술을 마셨었다. 그래서 흡수되어 버린 후라 주술을 꺼내기가 매우 어려웠었다.
“기체의 형태이니 몸속에서 희석하거나 기침하듯 토해내기 수월하실 겁니다.”
마력이나 정령의 힘을 이용하여 자이드의 몸에서 밀어내어 토하게 하거나, 몸속에서 녹여버릴 수 있었다.
“제가 최선을 다해볼게요.”
엘리제가 말하며 자이드의 침상 머리맡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빈 물잔 하나만 준비해주시겠어요?”
곧 빈 크리스털 잔 하나가 엘리제에게 전달되었다.
쉬이익. 엘리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시원하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며 그녀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곧 손끝에서 주르륵 푸른색의 물이 흘러나와 비어 있던 잔에 담겼다.
“!!”
“세상에!”
처음 보는 놀라운 현상에 방 안 여기저기서 숨죽인 감탄이 터졌다. 순식간에 빈 잔을 푸른 물로 가득 채우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더욱 크게 놀랐다.
“정령의 힘이 담긴 물입니다. 이걸 왕태자님께 마시도록 해도 될까요?”
엘리제가 고개를 돌려 그레이스의 동의를 구하였다.
“물, 물론입니다. 엘리제 님, 제가 하겠습니다.”
그레이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잔을 받아 자이드의 입에 직접 정령수를 흘려 넣었다.
***
정령수를 마신 자이드의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기침을 여러 차례 하며 검은 연기를 토해내더니 잠시간은 정신도 차렸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며칠 더 마시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방 안의 모든 이들이 기적을 직접 본 것과 같은 표정으로 엘리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엘리제에게 무엇이든 다 내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레이스는 엘리제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었다.
그래도 그저 자이드의 짝으로만 욕심내었는데, 갈수록 엘리제의 성품에 더 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엘리제의 힘이 자신을 뛰어넘었을 때는 솔직히 시기심도 느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레이스에게 엘리제는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녀는 나와 그릇이 다르다.’
다행히 왕후는 기본 성품이 선하고 겸손할 줄 아는 이였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영혼이 가지고 있던 성격이기도 했다. 그저 작품 속의 인물이었다면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왕태자님을 우선 쉬게 해주세요. 저도 잠을 좀 자야 다음 정령수를 만들 수 있으니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엘리제가 할 일을 마치고 왕태자의 방을 나섰다. 페르만과 그레이스가 은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고, 데몬이 말없이 엘리제의 뒤를 따랐다.
***
“마가렛, 잠시만 토리와 로떼를 데리고 나가서 근처에 있어 다오.”
방으로 돌아온 엘리제의 뒤를 따라 데몬이 들어오며 말했다.
“예, 각하.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대공의 명령에 마가렛이 서둘러 두 애완동물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무슨 일이세요?”
엘리제가 어리둥절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문이 닫히자마자 데몬이 엘리제에게 바짝 다가왔다. 갑자기 진지해진 공기에 엘리제는 덜컥 긴장되었다.
‘혹시 화가 나셨나? 반대했는데도 결국 내가 왕후 마마의 부탁을 들어줘서?’
데몬은 엘리제를 흑마법의 기운이 있는 곳으로 내보낼 수 없다 강경하게 말했었다.
아무래도 그 일 때문에 데몬을 화가 나게 한 것인가 싶어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지난번 제가 원하는 대로 뜻을 들어주시겠다는 약속을 두 번 하셨었습니다.”
“?”
그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 맞아요. 한 번은 이미 들어드렸고요.”
그랬었다. 한 번은 사냥 대회의 우승 축하를 위해. 다른 하나는 데뷔탕트에서 구두 굽이 부러져 데몬의 도움을 받았을 때.
하나는 이미 사용했다. 미약을 마신 그가 엘리제에게 자신을 묶어달라 청했을 때 그 뜻을 들어주면서.
“남은 하나를 지금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지금이요? 되긴 하지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 물으려는데,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데몬이 엘리제를 와락 껴안고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퍼부어댔다.
“각……!”
하……. 엘리제의 말이 입안에 갇혔다.
무슨 일인지 그의 입맞춤은 열렬하면서도 동시에 애절했다.
엘리제의 몸을 감싸 안은 다정한 두 팔이 평소보다 더 단단하고 거칠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그의 마음이 맞닿은 숨을 통해 엘리제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왜 이토록 애처로이 입맞춤을 해오는 것일까. 마치 소중한 것을 잃기라도 할 사람처럼.
그의 마음과 열기에 뜨거운 입술까지 더해져 점점 몽롱해져 갔다.
한참의 입맞춤 후에야 데몬이 그녀의 허리와 입술을 놓아주었다.
“무,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그의 눈을 본 순간, 엘리제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데몬의 붉은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당신께 어디까지 말씀드려야 하겠습니까.’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야 할 것인가. 내 머릿속에 든 생각 전부를?
당신이 조금 전 자이드를 위해 정령의 힘을 무리하게 사용하는 것을 느꼈다고? 그것이 마치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당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기분이었다고?
그래서, 당신의 몸 안에 내 마력을 불어넣어 당신을 조금이라도 지키고 싶었다고?
‘그리고 너무나도 소중한 당신에게 잠시라도 더 가까이 닿아 있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그 무엇도 꺼낼 수 없었다. 그럴수록 엘리제가 속상해할 것이 분명하니까.
숨과 함께 속내를 삼켰다.
데몬이 잠시간 말없이 엘리제를 품에 안은 채 내려다보았다.
“저는 당신을 잃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한참 만에 그가 꺼낸 말이었다.
이제야 당신에게 마음을 전하였는데. 그리고 이제 곧 당신 앞에 당당히 나를 선택해달라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그리고 잃으실 필요 없어요. 저 어디 안 가요.”
간절해 보임과 동시에 불안해 보이는 그를 위해 엘리제가 안심하라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쪽. 그의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이 엘리제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확실해지면 말씀드리려고 했었습니다만.”
가능하면 최대한 늦게 말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미리부터 불안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엘리제 님께서 정령의 힘을 많이 사용하실수록, 그 힘은 강해지실 것입니다…….”
“그건 좋은 일이잖아요.”
엘리제가 일부러 웃어 보였다. 그가 이런 말을 어렵게 꺼내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겠지.
‘내가 힘을 쓸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나 보네…….’
엘리제 역시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사실 요즘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힘이 엘리제 님을…… 위험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데몬이 힘겹게 뒷말을 뱉어냈다.
엘리제의 두 팔이 천천히 단단한 그의 허리를 지나 넓은 그의 등 뒤에 닿았다.
아, 다정하신 분.
“당신의 품이 참으로 넓네요.”
미소 지은 얼굴을 그의 넓은 가슴에 묻고 고개를 돌렸다.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쿵쿵. 그의 심장이 소리를 내며 힘차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따뜻하고요.”
그녀가 사랑하는 그가, 지금, 이 순간, 이곳에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감사함에 순간 온몸이 전율하고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엘리제는 꾹 참고 다시 고개를 들어 데몬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좋은 품을 놔두고 제가 일찍 떠날 리가요. 최대한 당신 곁에서 오래오래 살 거예요.”
눈이 부실 만큼 환하게 엘리제가 데몬을 향해 웃었다.
그 모습에 데몬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 빛나는 미소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주고 싶다.
자신의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그 약속 꼭 지키실 수 있도록…….”
당신이 내 곁에서 오래오래 행복에 겨워 살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몸을 울리는 감미로운 저음이 갈라지며 끊겨 나왔다.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웃으며 대답하는 엘리제의 금색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흘러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