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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어디 한 번 죽어봐 (66/126)


66. 어디 한 번 죽어봐
2022.06.20.



 
그 고통이 오라버니의 것이 되라고 바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왜 오라버니가 고통의 희생물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루시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일단, 그녀를 불러야 해.”

흑마법사를.

방으로 돌아온 루시아는 모든 불을 껐다.

그리고 목놓아 간절히 부르고 정성 들여 기도하여 검은 연기의 여인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내가 그 여자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엘리제도!!”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저주를 뱉어내자 검은 연기가 손바닥에서부터 피어올랐다.


‘하, 이렇게 해야 오는 거였군.’

그녀를 부르는 방법에 대해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 누군가를 저주해서 왔었지.


“바쁜데 왜 부르고 그래. 이 모습으로 오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 줄이나 알아?”

검은 연기가 여전히 여인의 모습으로 날카롭게 신경질을 냈다.


“도대체 왜 엘리제의 고통을 위해 오라버니가 아프셔야 하는 거야!”

눈이 뻘게진 루시아가 고성을 질렀다.


“뭐야, 네 오빠…… 설마 엘리제 좋아했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무, 무슨 말이야?”

연기의 여인이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엘리제가 어떤 경우에 차라리 자신이 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겠어?”

차라리 자신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고통.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의 고통이었다.


“설, 설마 너, 너!”

“그래. 너도 알다시피 내가 건 주술의 주문은 ‘엘리제를 죽기보다 더한 고통 속에 빠지게 하라’였어.”

그러니, 그에 합당한 제물은 엘리제를 사랑하는 누군가의 고통이었다.


“안타깝게도 네 오라버니가 그때 가장 적합한 희생물이었나 보군.”

엘리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야 많았다. 데몬도, 마가렛도, 그레이스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주술이 접근하기 쉽고 약한 사람은 자이드였다.


‘아마도 데몬의 마력 때문에 주술이 엘리제 일행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나 보네.’

기감(氣感)이 좋은 토리와 로떼도 엘리제의 일행을 지키는 일에 한몫하고 있었다.

검은 여인은 추측했지만, 공주에게 그것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일단 엘리제가 충분히 고통스러울 때까지 너희 오라버니도 함께 고통스러워야 할 거야.”

“안 돼! 그런 건 싫어!”

“이게 네가 안 된다고, 싫어한다고 멈출 수 있는 건 줄 알아?”

“그, 그럼 어떻게 해?”

“조금이라도 오빠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다면 차라리 빨리 주술이 완성을 보게 만드는 것이 어때?”

“무슨 말이야?”

눈물로 얼룩진 루시아에게 여인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네 오라비가 희생을 치르고 있으니, 곧 주술은 엘리제가 사랑하는 이를 죽게 만들 거야.”

“!!”

그 말에 루시아의 몸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허! 기억 안 나?”

여인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에게 죽음보다 더 심한 고통을 주고 싶다고 한 건 너야.”

엘리제에게 죽기보다 더한 고통을 주기 위해 주술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이를 죽일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한 엘리제의 고통이 주술의 완성이었다.


“그건 안 돼! 엘리제는 대공 각하를 사랑한다고!!”

루시아가 절규했다.

엘리제가 자기 입으로 뱉은 적은 없었으나 이것은 여자의 감이었다. 대공과 엘리제는 분명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루시아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그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분만은!


“아차. 그랬어? 그 대공을 너는 사랑하고 있었고?”

마치 난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태연하게 연기가 웃었다. 표정이 없는데도 마치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주술을 걸어줬을 뿐이야.”

“……취소. 해줘.”

루시아가 눈물 범벅이 되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부탁이야, 제발. 차라리 다른 사람을…….”

“허? 네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이 철없는 공주야.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취소가 가능할 거라 생각해?”

“그, 그럼 어떡해?”

‘그냥 이대로 대공 각하께서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한다고?’

데몬이 죽으면 엘리제는 루시아가 원하는 대로 차라리 자신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고통을 루시아도 역시 겪게 될 것이었다.

풀썩,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내던 루시아가 얼룩진 얼굴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지난번 엘리제가 주술을 풀었다고 하지 않았어?”

“!”

그렇다면 이번 주술도 푸는 방법이 있다는 말 아닌가.

‘쳇, 쓸데없는 부분에서만 머리가 좋군.’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연기의 여인이 대답했다.


“그러긴 했지. 주술은 대가를 지불해야 풀려.”

그럼 이번 주술의 대가는 무엇인가!


“어서 말해줘. 내가 대가를 대신 지불할 테니, 당장 주술을 풀어달라고!”

왕궁을 달라고 해도 줄 수 있었다. 공주의 신분을 버리래도 할 수 있다. 그분을 살릴 수만 있다면.


“넌 절대 풀 수 없을 거야.”

“뭐? 어, 어째서……?”

검은 연기의 여인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지금 주술을 풀기 위해서는 대가(代價)로 ‘희생’이 있어야 하거든.”

“희생이라고?”

이번 주술은 말하자면 엘리제의 ‘사랑’에서 비롯한다. 엘리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고통 속에 빠질 것이며, 주술은 그녀를 사랑하는 누군가의 고통을 제물로 선택했다.

‘사랑’은 ‘희생’을 대가로 요구한다.

그러니 누군가 데몬을 대신하여 ‘희생’을 해야만 주술이 풀릴 거라는 이야기였다. 루시아에게는 뜬금없는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지금 그걸 이해하고 말고 할 때가 아니었다.


“희, 희생이라면 나도 할 수 있어!”

“그래?”

“그럼 어디, 데몬을 위해 죽어봐.”

“!”

“잊었나 본데, 주술이 원하는 고통은 죽음을 뛰어넘는 것이야. 그러니 희생 역시 최대치로 치러야 해.”

루시아는 공포에 질려 입만 벙긋거렸다. 대신 죽을 수 있냐는 말에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눈앞이 까맣게 점멸되는 것을 경험했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음을 선택한다니,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얗게 질려 덜덜 떠는 것 외에 루시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리제가 주술을 풀기 위해서는 데몬 대신 죽어야 할 거야.”

그 말은 곧,

엘리제든 데몬이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둘 다 죽으면 더 좋고. 아하하하 하하하하!”

마치 이것이 진짜 그녀가 원했던 바였다는 듯 검은 연기의 여인이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



“황후! 괜찮소?”

로안과 헬리오가 서둘러 프시케를 부축했다. 로안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가까운 카우치에 그녀를 앉히며 안색을 살폈다.


“잠시 뒤로 기대어 보십시오.”

옆에서 헬리오가 신성력을 사용하여 프시케의 안정을 도왔다. 그의 손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며 프시케의 온몸을 따스하게 감쌌다.

다행히 잠깐 현기증이 난 것이었는지 심호흡을 하며 프시케가 금방 본래의 혈색을 찾았다.


“잠시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그 말에 로안의 얼굴 역시 환해졌다.


“중대한 일로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용건을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프시케가 안정을 되찾자마자 일을 하겠다고 덤벼들었다.


“아니오, 황후는 좀 더 휴식을 취하시오. 재상을 불러 내가 처리하겠소.”

“아닙니다. 괜찮으니 말씀해주십시오. 어차피 재상에게 말씀하셔도 결국 제가 하게 됩니다.”

끙. 로안은 난처해졌다. 책임감이 무척 강해 매사에 철저하고 꼼꼼한 프시케의 성격을 잘 알다 보니, 지금 말을 미룬다고 될 것이 아님을 그도 알고 있었다. 나중에 결국 그녀의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실은, 내일 성하께서 신성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시오.”

로안은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헬리오도 옆에서 조금 더 덧붙였다. 프시케는 금세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감사드리고 있었는데, 보답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하.”

프시케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 목적이시라면 재화뿐만 아니라 기본 생활용품과 식료품도 함께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과연 프시케는 사려 깊고 현명했다. 헬리오가 빈민을 구제하러 가는 것이라면 그들에게는 당연히 음식과 생활용품 역시 절실할 것이었다.

사실, 헬리오가 황국을 방문할 당시부터 프시케가 준비해 두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성하와 그 사제들의 청빈함과 숭고함에 진심으로 감동했었고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었다.


‘빈민들이 걱정되셨다면 미리 황국에 부탁하여 구호품이나 식량을 보냈어도 되었을 것인데…….’

결계 완성이 막바지인데 주문 하나 남겨놓고 가겠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지만, 프시케는 그만큼 헬리오가 빈민에 대한 마음이 깊어 직접 가고 싶으신 모양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모르는 이유가 따로 있을 수도 있다. 직접 신성국의 왕이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성하께서 뜻하신 바이니 모두 그대로 이뤄드리겠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프시케가 공손하게 인사하고 로안의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헬리오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로안의 방에서 나온 프시케는 곧바로 황궁의 곡식 창고부터 둘러보러 가고 있었다. 내일 출발하는 헬리오 일행에게 전달할 물품들을 직접 확인하여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조금 전 로안의 방을 나오며 인사를 하는데 헬리오와 잠깐 눈이 마주쳤었다. 그런데, 그의 눈빛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성하께서 어딘가 아쉬워하시는 듯했는데 내 착각인가?’

자신의 대답에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것일까? 그분의 마음을 못마땅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필요할 만한 물건을 더욱 꼼꼼히 충분하게 챙겨야겠다 생각했다.


“후우…….”

아직 평소보다 숨이 찼다. 요 며칠 무리하여 일한 것도 있었지만, 사실 프시케가 생각할 때는 심리적인 영향이 더 컸다. 로안으로부터 들은 황국의 비밀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여러 번 로안과 함께 살면서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

지난 생 역시 미로니카의 황후였고, 우여곡절 끝에 로안의 마음을 되찾았었다. 데몬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그럼에도 황가와 크레미언 대공가 사이의 ‘밀약’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설마, 데몬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가…….’

그 신중한 성격의 남자가 황가에 정령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물어볼 정도면, ‘밀약’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 역시.


‘황가로부터의 독립인가? 크레미언 대공이 원하는 것이.’

골치가 아팠다. 그래서 옛 자료들을 뒤적이며 밤을 며칠 새었더니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낮에는 결계를 치는 헬리오의 곁을 지키고, 밤에는 잠을 줄여 정보를 찾았으니 몸이 버텨내질 못했다.


‘일단, 지금은 이 일이 우선이다.’

프시케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사이 커다란 황궁의 창고 앞에 다다랐다. 황후가 찾는다는 말에 재상 역시 창고 앞으로 뛰어왔다.


“성하께 실망을 드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 황궁의 모든 곡식과 구호품, 생활용품의 목록을 다 가져다주게.”

“예, 황후 폐하.”

프시케가 상념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서둘러 눈앞의 일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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