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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그는 왜 쓰러졌는가 (65/126)


65. 그는 왜 쓰러졌는가
2022.06.16.


데몬과의 서신을 통해 프시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제가 기억을 거의 다 되찾았지만, 여전히 로안의 첩 신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며, 완벽한 독립을 위해 열심히 사업을 성장시키는 중이라는 것을.


‘폐하가 받으실 상처를 어찌할꼬.’

언젠가는 받게 될 상처이긴 했지만, 그래도 로안이 크게 흔들릴 것이었다.

그가 엘리제에게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프시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왕이면 흑마법이라도 해결된 이후면 좋겠구나.’

황후의 근심이 깊어졌다.


 

***

미로니카의 결계가 완성되어 가는 시간 동안, 엘리제 일행은 데몬과 두 애완동물 덕분에 안전하게 왕궁 생활을 하며 무사히 사업을 시작했다. 첫 제품인 화장품을 몇 유명 상점에 시판하였고, 반응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셔요? 백작 부인 얼굴이 전보다 훨씬 화사하신데요.”

“좋은 일은요. 그저 화장품 하나 바꿔봤을 뿐이에요. 오호호호.”

“어머, 그 제품이 뭔데요?”

“요즘 엄청 유명한데 혹시 뒤보리 크림이라고 모르세요?”

엘리제의 화장품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시에델의 귀부인들은 우아한 무늬가 새겨진 예쁜 병의 모습에 반해서 물건에 관심을 가졌다. 뚜껑을 열어보고는 황홀한 향기에 순식간에 매료되었고, 사용한 후에는 다른 화장품을 쓸 수가 없었다.

바른 후에 마치 마법처럼 좋아지는 피부를 경험하게 되었으니까. 소량의 정령수여도 치유의 힘이 있으니 얼굴에 가져오는 재생력은 무척 컸다.

생명력이 담긴 크림을 꾸준히 바른 귀부인들의 피부에 뽀얗게 윤기가 흘렀다.

사용한 사람의 얼굴에 탄력이 생기고 생기가 돌기 시작하자 주변의 귀부인들이 당연히 너도나도 물었다.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지만 엘리제는 납품하는 물건의 양을 늘리지 않았다.


“어차피 더 많이, 빨리는 만들 수도 없고.”

두 사람 옆에 크림을 젓다 지친 토리와 로떼가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 쉬고 있었다.

옆에 떨어진 주걱을 엘리제가 주워들었다.


“어머나, 토리 로떼 조금만 기다려.”

엘리제가 간식을 한가득 쏟아주고 두 마리가 좋아하는 시원한 바람을 휘익 일으켜 주었다.


“뀨유~!”

행복해진 토끼와 다람쥐가 작은 입에 간식을 두 손으로 가득 밀어 넣으며 소리를 냈다.

이렇듯 가내 수공업 제품인데다가, 원재료가 유한했다. 알고는 있지만 마가렛이 걱정하며 물었다.


“폭주하는 주문에 어떻게 대답할까요?”

“재고가 전혀 없으니 기다리라고 해야지. 그리고 이제 가격을 올릴 차례야.”

어차피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귀족 대상의 소모품을 주력 상품으로 개발했던 거였다.


“진짜 돈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비싸도 사고 싶은 건 살 거거든. 그리고 한정 판매하면 원래 더 목숨 걸고 사게 되어 있어.”

“엘리제 님,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마치 다른 분 같으셔요.”

“이게 모두 마가렛 덕분이야!”

“제 덕분이라고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마가렛이 되물었다.


“응. 내 유능한 비서가 구해다 준 책들에 이런 비법이 다 담겨 있었다고.”

“네?”

그럴 리가요. 전에 제가 슬쩍 보았을 때 내용의 대부분이 주로 감탄사나 외마디 외침이었는데요?

똑똑똑.

그때, 방문을 열고 데몬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각하.”

반가움에 엘리제가 주걱을 든 채로 얼른 몸을 돌려 그에게 다가갔다.

따스하고 큰 손이 그녀의 팔을 다정히 감싸고 그보다 더욱 다정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조금 전까지 함께 있다가 방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잠깐 상황을 살피러 나갔다 온 사람이, 마치 한참을 못 본 듯이 말을 했다.


“네, 별일 없었어요. 각하를 보고 싶었던 것 빼고는요.”

마주한 금색과 붉은색의 눈이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찰떡처럼 대화하는 두 사람을 마가렛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천생연분이시구나.’

그동안 두 분 다 저렇게 표현하고 싶은 거 어찌 참고 사셨을까.

그런데 데몬을 바라보던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따스하고 달콤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그의 얼굴이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잠깐 열렸던 문틈 사이로 밖이 여전히 소란스러웠던 것이 떠올랐다.


“역시 밖에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잠시 말이 없던 데몬이 입을 열었다.


“……자이드 왕태자가 쓰러졌습니다. 심상치 않으니 두 분께서는 당분간 방에서 나오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소식에 엘리제와 마가렛은 깜짝 놀랐다. 자이드가 아프다는 말은 들었지만 감기 정도인 줄 알았는데.


“흑마법에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

하얗고 고운 손이 들고 있던 주걱을 놓쳐버렸다.

***

미로니카 황국은 신성력 결계의 완성을 이제 목전에 두고 있었다.


“황제 폐하, 성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시종장이 로안에게 아뢰었다.


“성하께서? 당장 안으로 모셔라.”

생명의 은인이자 황국의 수호자이신 성하께서 친히 자신을 만나러 와주시다니! 감격한 로안이 버선발로 달려가 헬리오를 맞았다. 이런 분의 신성력과 가호를 얻을 수 있다니, 황국은 신의 사랑을 받고 있음이 틀림없다!


“바쁘신 시각에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헬리오가 웃으며 로안의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말씀을요. 이렇게 오랜 시일 결계 완성에 힘써주시니 어떻게 감사함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필요하신 그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로안이 신께 경배를 드리듯, 두 손을 모으고 허리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바라는 것이요…….”

잠시 헬리오가 뜸을 들였다.

순간 로안이 숨을 참고 그의 뒷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바라는 것이 없고, 욕심 없으신 성하께서 며칠 사이 갑자기 바라는 것이 생기셨나?


“사실 의논 드리고 싶어서 왔는데, 마침 그리 말씀해주시니 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요하게 헬리오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괜찮으시다면 저는 내일 신성국으로 먼저 출발하고자 합니다.”

“내일이요?”

로안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물었다. 혹시 드디어 결계가 내일이면 완성되는 것인가?


“예. 내일이면 결계가 거의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하면 마지막 주문만 몇 명의 사제들에게 맡기고 저는 나머지와 먼저 신성국을 향해 출발하고 싶습니다.”

역시! 기대한 대로였다. 하지만 마지막 완성의 주문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성하께서 급히 먼저 황국을 떠나려는 이유가 무엇이지? 이번엔 로안의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미로니카 황국을 찾아오는 길에 빈민들을 만났었습니다. 사제 미카일에게 대충은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랬다. 미카일이 미리 그런 일로 하루, 이틀 도착이 늦을 수 있다고 예고했었고 실제로 헬리오는 빈민들에게 일행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고 나서야 다시 황국으로 발걸음을 옮겼었다.


“그런데, 그들 중 병환이 깊었던 이들은 제 신성력으로 낫게 하고 왔으나 가난한 이들을 모두 구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아……! 설마, 지금 이 숭고한 분께서 그들이 그사이 가난으로 목숨을 잃었을까 봐 급히 구원하러 가시겠다는 건가!’

소름이 돋았다. 로안은 자신과는 차원이 다르게 신성한 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앞의 헬리오는 삶이 희생과 봉사 그 자체인 듯했다.


“혹시나 황제께서 제게 결계를 친 보답의 의미로 약간의 재화(財貨)를 주신다면 서둘러 그들에게 가서 나누어주고 싶습니다.”

로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 그는 욕심이나 계산이 전혀 없는 이로 보였다.

사람이 아니라 신이 현신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겠습니다. 성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헬리오가 마치 기도 드리듯 겸허히 로안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마지막 주문까지 헬리오가 완성해준다면 좋겠으나, 그것은 지나친 욕심일 뿐이었다. 사실 미로니카 황국을 직접 방문해주고 이 정도로 쉼 없이 결계를 쳐준 것만으로도 이미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다.

그러니 완성까지 맡아달라 헬리오에게 감히 요구할 수 없었다.


“시종장, 황후는 지금 어디에 있지?”

황궁의 재보는 황후 프시케가 로안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 또한 헬리오에게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있으니 황후가 나서서 더 많은 재화를 준비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잠시 후 프시케가 로안과 헬리오 앞에 나타났다.


“빛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프시케가 허리를 숙여 헬리오와 로안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올린 프시케의 모습이 어딘가 심상치가 않았다. 창백한 안색에 다소 핼쑥해진 얼굴이었다.


‘황후가 요즘 무리를 하더니!’

로안은 가슴이 철렁했다.

요 며칠 그녀는 로안과 함께 헬리오가 결계를 치는 모든 곳을 따라다니며 보좌하기도 하고, 동시에 황궁의 살림과 주요 일들을 처리하느라 무척이나 바빴었다. 그게 아마 과로가 된 모양이었다.


“황후, 안색이 무척 좋지 않은데 혹시 어디 불편하오?”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로안과 헬리오가 걱정되어 프시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괜, 괜찮습…….”

“!”

“황후!”

휘청.

대답도 마치지 못하고 프시케의 몸이 바닥을 향해 쓰러지고 있었다.


 

***

자이드가 갑자기 고열로 쓰러졌다.

그는 사냥 대회에서 데몬에게 패배한 이후 자신의 힘을 더 기르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엘리제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파고들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서 페르만과 그레이스는 태자가 좀 무리를 하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열이 심해지더니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누워 있는 자이드의 머리맡을 페르만과 그레이스가 지키고 섰다. 그 옆에 선 루시아는 초조함에 치마를 말아 쥐었다.

그레이스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계속해서 자이드를 치유하고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자이드가 가진 정령의 힘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며칠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했다.


“왕후의 힘으로도 치유가 안 된다니 이 무슨 일인가!”

안타까움에 페르만이 울분을 토했다.


“이건 단순한 병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저주입니다.”

두 명의 궁의가 자이드 양쪽에 붙어서 서로 진찰한 바를 말했다. 그레이스는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저, 저주라고?


“저주라니! 도대체 시에델에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이가 누구란 말입니까!”

그레이스가 절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루시아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말, 말도 안 돼.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저주라니. 저주는 자신이 하지 않았던가.


‘설마, 그 여자가 말했던 누군가의 고통이 오라버니의 고통이었어?’

절망과 분노가 동시에 루시아를 해일처럼 덮쳤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간절한 생각 하나가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되돌려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라버니를 살려야 해!!’

“끄으윽.”

자이드가 사경을 헤매며 신음을 토해냈다.


‘내 손으로 오라버니를 저토록 큰 고통 속에 몰아넣은 셈이잖아!’

손?

고통 속에 신음하는 자이드를 바라보던 루시아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려 자신의 손바닥 위의 검은 문양을 바라보았다.

다시 불러야 한다. 흑마법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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