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누군가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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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누군가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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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누군가의 고통
2022.06.13.
“뀨우! 뀨!”
“갑자기 토리 로떼가 왜 이러지?”
화장품 크림을 잘 섞던 두 동물이 갑자기 엘리제의 품으로 달려들더니 덜덜 떨기 시작했다.
“왜 그래, 애들아?”
덩달아 불안해진 엘리제와 마가렛이 걱정스러워 물었다.
궁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두 마리 다 작은 고개를 엘리제의 품에 숨긴 채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엘리제가 토리와 로떼를 위해 정령의 힘을 사용하였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며 그녀의 몸에서 빛이 쏟아졌다.
그러자 토끼와 다람쥐의 떨림이 점점 줄어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데몬 역시 마력을 이용하여 주변의 기척을 느껴보는 중이었다.
‘흑마법의 기운이다!’
정령의 힘이 있는 시에델까지 흑마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엄청나게 강한 흑마법을 가진 이가 분명했다.
‘아마도 공명을 이용했나 보군. 궁에 어두운 마음을 가진 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법사가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인 ‘공명(共鳴)’은 같은 파장의 힘끼리 끌어당기는 원리를 이용한 방법이다.
마법사는 공명을 통해 자신이 가진 힘과 같은 성질의 힘을 원하는, 즉 그 힘을 부르는 누군가가 있는 곳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정령의 힘이 가득한 시에델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흑마법과 같은 어둡고 잔인한 마음을 일관되게 가지고 그런 힘을 원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흑마법사가 놓치지 않고 이용한다면.
‘시에델이라 하더라도 뚫릴 수 있다.’
확률이 낮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당분간 엘리제 님께서는 저와 항상 같이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알았어요.”
“그리고 토리와 로떼를 한 마리씩 마가렛과 데리고 다니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물이니 본능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미리 느끼고 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게요.”
“알겠습니다, 각하.”
토리와 로떼가 이런 역할을 하게 될 줄이야.
그의 말이 맞았다. 마가렛도 안전하지 않으니 미리 위험을 알려줄 수 있는 동물이 함께인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노파심일 수 있으나 루시아 공주를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엘리제에게 벌써 두 번이나 술수를 썼던 그녀다. 누군가 어두운 마음으로 저주의 마법인 흑마법을 불러들였다면 그것이 루시아일 가능성이 컸다.
“꼭 그리할게요.”
“당분간은 밤에도 이곳에 있겠습니다.”
밤, 밤에도요?
사안의 위급함은 알지만 엘리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알겠어요.”
‘지금 이 상황에 너무 반가운 티를 내면 안 되겠지?’
주책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가 밤에도 곁에 있어 주겠다니 좋아서 콩닥콩닥 가슴이 설레어왔다.
“마가렛도 함께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 그러네.
“그럼 같이 밤새워 화장품을 만들어야겠어요!”
엘리제가 외쳤다.
어차피 셋 다 잠 못 이룰 것이 분명하니까.
아무래도, 덕분에 빠른 개업이 가능하게 생겼다.
***
미로니카의 황제 로안은 자신의 방에 늦은 밤이 되어서나 돌아왔다. 아침 일찍 신성국의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늦은 시각까지 그들을 모시느라 정말 긴 하루를 보냈으나, 그는 전혀 피곤하지가 않았다.
낮에 헬리오가 자신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그 순간에 이 세계 최고의 신성께 목숨이 구해졌다. 다시 생각해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공포가 아니라, 성스러운 헬리오의 구원을 통한 감화였다.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바라는 무엇이든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헬리오에게 말했었다. 그 순간 로안의 말은 진심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평안을 찾으신다면 그것이 제가 바라는 일일 것입니다.”
청빈한 성자(聖者) 헬리오는, 욕심도 바라는 것도 없었다.
‘성하께서 원하시는 무엇이든 해드리고 싶구나.’
바라는 것이 없으니 더욱 드리고 싶었다. 지금 같아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시종장의 말에 로안이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폐하, 기다리시던 크레미언 대공으로부터의 서신이 도착해 있습니다.”
씻고 자리에 앉은 로안에게 시종이 급히 서신을 전했다.
데몬의 편지는 저녁때 도착했지만, 로안은 지금에서야 그것을 받아볼 수 있었다.
편지를 연 로안의 얼굴이 더욱 환하게 밝아졌다.
엘리제가 무사히 데뷔도 마치고 사냥 대회에서도 활약하여 시에델에서 평판이 더욱 좋아졌다는 내용이었다. 기억도 순조롭게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데몬을 함께 보내서 정말 다행이지!”
높아지는 평판만큼 엘리제에게 관심을 가진 영식들이 많아 데몬이 직접 사냥 대회 후 열린 연회에서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그 조치가 ‘고백’일 것이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로안은 어서 엘리제를 데려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아쉽게 그녀가 시에델의 왕녀가 되길 거절하였으나 그건 그것대로 기특했다.
‘시에델의 왕녀가 되기보다 나의 애첩으로 남고 싶다는 것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가치관에 기초하여 상황을 판단한다. 그리고 로안은 이런 판단을 내렸다.
‘나를 사랑하는 옛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해.’
정령석을 얻는 문제가 그에게 남아 있었지만 그건 자이드가 얼마 전 몰래 보내온 거래 제안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엘리제의 호위로 보낸 대공이 이렇게까지 훌륭하게 도움이 될 줄이야.’
시에델의 공주가 크레미언 대공과 이루어지기를 원하니 혼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정령석 거래에 긍정적으로 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신께서 나를 돕는구나!”
로안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헬리오가 황국까지 행차하였으니 흑마법을 곧 해결해줄 것이었고, 데몬이 엘리제를 빈틈없이 지켜내고 있었다. 자신의 치부였던 정령석 문제는 데몬 덕분에 손 안 대고 코를 풀게 생겼다.
“완벽하다!”
흡족해하는 로안에게 시종장이 한 번 더 고하였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장의 말 뒤로 잠옷 차림의 프시케가 그의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황후, 어서 오시오.”
기분이 좋아진 로안이 활짝 웃으며 프시케를 맞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까 많이 놀라셨을 텐데요.”
“아무렇지도 않소.”
두 사람 모두 헬리오에게 입은 은혜가 크다며 반드시 보답해드리자고 마음을 모았다.
“그런데 폐하.”
프시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황가에 예전부터 내려오는 전설 중에 말입니다.”
듣자마자 로안이 모든 것을 멈췄다. 푸른 눈이 깊은 바다와 같이 어두운 빛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그 옛이야기는 왜 그러시오?”
그의 예민한 반응을 통해 프시케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역시 뭔가 있구나.’
지혜를 담은 초록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뒤를 돌아보며 그녀가 고갯짓하자 시종이 준비된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그중에 오늘 밤의 무료함을 달래줄 재미난 이야기는 없을지요. 오랜만에 폐하께 옛이야기를 듣다 잠들고 싶습니다.”
그저 낭군과 즐거이 담소를 나누고 싶을 뿐이라는 듯 그녀가 선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성하께서 계시니 술은 못하겠지만 다과를 들며 황후와 대화하는 것은 괜찮겠지.’
100일 가까이 그는 기도 의식을 위해 그가 좋아하는 모든 유희를 참으며 버텨왔다.
그래서 황후가 지금 제안하는 ‘밤의 담소’가 내심 반갑기까지 했다.
마음 같아서는 사실 오늘 축하주를 들고 싶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데몬과 자이드 덕분에 자신의 걱정이 말끔히 해결되었고 성하께서 지금 황궁에 와 계셨으니까.
“좋소.”
한껏 여유로워진 로안이 프시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
“자, 이제 주술이 시작되었어.”
검은 연기의 여인이 루시아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공주의 손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 주술이 제물을 선택할 거다. 제물의 희생이 있고 나면 엘리제는 네가 원하는 대로 죽음보다 더 큰 고통 속에 빠지게 될 거야.”
“제물이라고?”
“그래. 주술은 스스로 제물을 선택하지. 원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을 거둬갈 거야.”
원하는 것은 엘리제의 고통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고통이 있고 난 후에 엘리제가 고통받을 거란 말이야?”
“보기보다 똑똑한데?”
어둠 속에 주저앉아 누군가를 저주하는 어리석은 공주치고는 말이야.
“그게 누구의 고통인데?”
그게 설마 데몬의 고통이거나 자신의 고통인 것은 아니겠지?
“걱정 마. 네 고통은 아닐 테니.”
아마도.
주술이 누구의 고통을 선택할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루시아의 고통일지라도 여인은 사실 상관없었다.
“지난번엔 운이 좋았지만, 이번엔 엘리제도 절대 풀 수 없을 거야.”
“엘리제가 지난번엔 주술을 풀었단 말이야?”
그래. 데몬이 풀어줬지. 그리고 레이나의 목숨으로 주술의 대가(代價)를 치렀고.
‘뭐 그땐 처음부터 불완전한 주술이었어.’
강력한 흑마법이었던 만큼 희생과 대가가 복잡해서 그랬나? 시작과 동시에 주술의 반이 풀렸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이번엔 분명 성공할 것이었다.
“걱정할 거 없어. 이번엔 실패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단순한 주술을 걸었으니까.”
누군가의 고통 후에, 엘리제의 고통.
그게 전부였다.
그 고통을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느끼게 되느냐는 전적으로 주술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결국 누가 희생을 치르든 엘리제는 반드시 죽음보다 더 큰 고통 속에 빠질 것이다.
“엘리제는 차라리 자기가 죽고 싶어질 거다.”
그 말을 남기고 연기는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루시아는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펼친 손바닥 위로 살갗을 태운 듯 역한 냄새가 났다.
조금 전 연기의 여인과 손을 마주 잡았을 때 뜨거운 감각과 함께 손바닥에 새겨진 흔적이 루시아의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에 남은 그 검은 문양이 없었더라면 방금 보고 들은 것이 모두 환각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야.’
하지만 분명 일어난 일이라고 검은 문양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주술이 발동되었다고.
***
미로니카 황국의 평온한 며칠이 흘렀다.
헬리오는 미로니카 황궁을 흑마법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결계를 쌓기 시작했다.
황궁은 매우 크고 넓었다. 그래서 헬리오가 신성력으로 결계를 치는 일은 시일이 제법 오래 걸릴 예정이었다.
장소마다 사제들이 먼저 돌아다니며 흑마법의 기운을 찾아 정화하였으며, 그 후에 확인을 끝낸 헬리오가 정성 들여 그곳에 결계를 쌓아 올렸다.
투명하고 하얀빛이 문의 형태를 이루며 지정된 장소에 바닥부터 모습을 드러내고, 문의 형상이 완료되면 스르륵 눈앞에서 사라졌다.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결계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황궁의 모든 공간에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헬리오의 체력이 무한은 아니어서 밤을 새워가며 결계를 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헬리오는 깨어 있는 거의 모든 시간 결계를 쳤다. 지켜보는 로안과 프시케는 고마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토록 자신을 희생하시는 분이라니.
처음 마주하는 이 세계에서 가장 이타적인 분께 두 사람은 진심으로 감동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하께서 일주일 내로 결계를 쌓는 일이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하셨습니다.”
미카일이 황제와 황후에게 와서 헬리오의 말을 전했다.
“정말이오?”
로안은 무척이나 기뻤다. 결계가 완성된다면 이제 흑마법의 공격을 두려워할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전한 황궁으로 엘리제를 데려올 수가 있었다.
‘기억도 많이 되찾았다고 했으니 황궁으로 바로 돌아오라 해야겠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았을 그녀를 품 안으로 하루라도 빨리 데려오고 싶어 참기가 힘들었다.
로안을 바라보는 프시케의 표정이 안타깝게 변했다.
바라만 보아도 지금 로안이 어떤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엘리제는 돌아와서 완벽한 자유를 달라 요구할 것인데…….’
그 사실을 눈앞의 가여운 황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 불쌍한 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