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본능만 남은 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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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본능만 남은 야수
2022.05.30.
“묶, 묶어요?”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자신의 연인(戀人)을 붉은 눈의 남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 선 그녀의 붉어진 표정을 보며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본능을 무시해야만 했다.
놀란 토끼 눈을 한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당장에 품에 안아 뜨거운 마음을 전하고픈 그의 본능은 거칠게 끓어올랐다.
데몬은 이성을 찾기 위해 붉은 눈을 밝히며 조금 전 연회장에서의 일을 되짚었다.
페르만 국왕이 자신에게 샴페인을 권하고 엘리제 근처로 시종이 샴페인을 권하러 왔을 때, 그는 루시아 공주 뒤편으로 보이는 붉은 옷의 여인을 발견했었다.
‘샴페인을 권하는 타이밍에 나타난 붉은 옷의 여인이라.’
엘리제가 말했던 꿈이 떠올랐다.
이곳에 있는 수십 개의 샴페인 잔 중 하나에 무엇인가가 섞여 있다.
‘그것이 독일 것인가, 약일 것인가.’
혹은 주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에델이다. 그러니 주술은 아닐 것이었다. 주술은 기본적으로 생명을 천시하는 기법이니까.
‘독이든 약이든 내가 마시는 것이 낫다.’
엘리제의 몸에서는 독도 약도 효과를 충분히 내겠지만 강한 마력을 가진 자신이 마신다면 훨씬 효과가 덜할 것이었다. 특히나 독이라면 충분한 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엘리제의 샴페인도 자신이 빼앗아 단숨에 마셔버렸다.
루시아 공주가 한 말 덕분에 더욱 확신했다. 엘리제의 샴페인에 무엇인가가 들었음을.
그리고 결국 공주가 원한 것은 자신이 마시는 것이었음을 환해지는 공주의 표정으로 알았다.
‘그렇다면 방금 내가 마신 것은 독이 아니라 미약이겠군.’
공주가 원하는 바는 그동안 명백했으니.
예상이 맞았는지, 목 넘김과 동시에 몸이 아래부터 뜨겁게 달궈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강한 미약을 만약 엘리제 님께서 마셨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랬다면 그녀는 단번에 몸이 달아올라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강한 약을 사용한 어리석은 공주에 대한 분노보다,
약을 마신 사람이 엘리제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는 안도가 더 컸다.
‘엘리제 님의 예지몽 덕분이다.’
자신이 미약을 마시긴 했지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리석은 공주가 원하던 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니까.
데몬은 연회장을 빠져나와 엘리제를 방까지 바래다줄 자신이 있었다.
‘그랬었는데.’
회상이 끝나자 다시 모든 감각이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에게 집중되었다.
그녀가 숨 쉬는 소리, 달콤한 체향, 매혹적인 모습과 아름다운 눈.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유혹적이었으며, 그녀 자체가 지금 자신에게는 마약과도 같은 자극제였다.
그런데 지금 데몬은 자신의 방 안에 그런 엘리제와 갇혀 있었다. 그녀가 직접 걸어 잠근 자신의 방 안에.
“차라리 저를 묶어주십시오.”
당신을 덮칠까 두렵습니다.
데몬은 눈을 붉게 물들이며 마력을 사용하였다.
서서히 몸속의 미약이 중화되기를 기다리며.
‘부디 약효가 빨리 사라져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은 본능만 남은 야수가 되어 엘리제에게 달려들지도 모른다.
긴장인지 흥분인지 모를 열기에 그의 몸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
“묶, 묶어 달라고요?”
대공 각하를요?
어디를요?
‘지금도 이미 너무 섹시한데??’
데몬의 애절한 부탁에 내 머릿속은 열렬히 환호하였다.
‘……어디를 묶으면 좋을까?’
역시 손이 좋겠지? 이왕이면 눈까지 가려드리고 싶은데.
곤경에 처한 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내게는 현실 세계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취향이자 로망’이 있었다.
‘곤란하면서도 행복하게 해드리는 취향이 잘못은 아니잖아.’
그래그래. 혹시 각하의 마음에 드실 수도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 본인께서 지금 원하시잖아?
“그 약이 각하의 건강이나 몸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요? 그저 잠깐 신체적인 흥분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혹시, 저 지금을 즐겨도 되나요??
묻지 않고 그냥 되는 거라 단정 짓고 싶을 정도다.
‘어차피 내 것이라 외쳤던 분이니까 정말 괜찮지 않을까?’
‘괜찮긴! 그래도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안 돼! 참아라 나 자신!’
내 안의 양심과 음란 마귀가 격렬하게 다투는 기분이다.
두 손을 묶어 올린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당장 본능에 충실해지고 싶으면서도, 그에게 못할 행동을 하는 듯 미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그때.
“윽.”
“앗, 어디 아프세요?”
데몬이 어딘지 불편한 음성으로 신음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뱉는 숨이 아까보다 훨씬 거칠어졌다.
그의 표정은 이제 퇴폐적이다 못해 위험할 지경이다. 한계에 이른 듯한 표정.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붉은 눈에 무언가를 간절하게 원하는 강렬함이 담겼다.
“엘리제 님.”
그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만으로도 몸에 자르르 진동이 인다.
황홀한 저음이 완벽하게 내 마음을 빼앗고 몸도 울렸다.
그 소리를 따라,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뇌쇄적인 눈빛의 두 눈이 마력을 사용하느라 더욱 진한 빛을 띠었다.
“지난번 제게 약속하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아!”
어떤 부탁이든, 들어달라던?
“원하시는 방식으로 부탁을 들어달라 하셨던 거 말씀이시죠?”
설마, 그 부탁 지금 여기서 사용하시려고요?
‘이토록 야한 상황에서요?’
***
미로니카 황국은 미카일과 황제 부부의 기도 덕에 평온한 기간이 이어지며 안정을 되찾아갔다.
물론 로안은 계속해서 엘리제를 그리워하고 당장 데려오고 싶다고 매일같이 외쳤으나, 주기적으로 데몬이 보내오는 소식에 곧 기억을 찾은 엘리제가 돌아올 거라 믿으며 버티는 중이었다.
프시케 덕분으로 로안의 정치가 안정세에 접어들자 미카일도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성하께서 기도를 마칠 즈음 미로니카를 방문하신다고 했으니 그전까지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처음 목표로 했던 100일의 대부분이 지났다.
앞으로 남은 20일 더욱 기도에 정성을 기울인 후에 대공가로 가서 조금 더 머물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친우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을 행할 차례였다.
‘그런데 데몬이 원하는 것이 설마 미로니카의…….’
평화로운 갈색 눈이 막 진지하게 변하려는 찰나에 벌컥 방문이 열리고 황후 프시케가 급히 들어왔다.
“사, 사제님.”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방으로 뛰쳐 들어온 황후의 모습에 미카일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황후가 어떤 성정인지 잘 안다. 항상 품위를 유지하는 그녀가 이렇게 급히 노크도 하지 못한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면 무언가 긴박한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흑마법과 관련된 사건이 벌어졌구나!’
사제를 찾아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했다.
미카일의 얼굴에 긴장이 스몄다.
창백해진 프시케가 모두를 나가게 한 후 미카일에게 말했다.
“황실의 요리사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
“흑마법에 당한 듯 보입니다. 발견한 시신이 검게 타오르고 있었거든요.”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고? 그 모습을 보고 황후가 흑마법에 당한 것이라 판단을 내렸다면.
“설마, 시신만 타고 주변은 멀쩡했던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그을음조차 없었어요. 역시 흑마법의 술수가 맞는 것인지요.”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혹시 제가 직접 보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사제님. 그리고 지금까지는 상황을 아는 모든 이들에게 함구를 명하고 있습니다.”
당장에 조사를 명하고 조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구를 명했다고?
“이유가 무엇인가요?”
“겨우 안정을 찾으신 황제 폐하께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요.”
그래서 황후가 미카일을 찾아온 것이었다. 프시케는 로안에게 최대한 비밀로 한 상태에서 일을 해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살해당한 요리사는 황제 폐하의 식사 담당이었습니다.”
“!”
“그가 죽어가며 하는 말을 주방 하녀가 들었습니다.”
흑마법사가 요리사에게 접근했다. 그 접근 방법을 아는 이는 죽었다.
“무어라 하였습니까?”
“황제 폐하께 절대 주술이 든 음식을 드릴 수 없다고요.”
요리사에게 흑마법사가 명한 것은 황제에게 주술을 먹이라는 것이었다.
명령을 거부한 요리사는 당장 그 자리에서 몸이 검게 타오르며 죽음을 맞이했다.
불복종의 대가로.
또다시 로안을 노리는 흑마법사의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엘리제를 장악하고, 그다음은 황궁을 부숴 로안에게 공포를 주었던 자가 이제 직접 로안을 노리고 있었다.
“이런……. 아무래도 성하께 더 빨리 와주십사 부탁드려야겠습니다.”
미카일이 침음에 잠겼다.
***
“하아, 하아.”
그의 열기가 뜨거워 몇 걸음 떨어져 있는데도 방이 후끈한 기분이다.
눈앞에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몸을 휩쓴 본능으로 인해 여전히 고통에 빠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본능에 충실하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는 단호했다. 절대 그럴 수 없단다.
그래서 결국 그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분명 약속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던 약속.
내가 부탁을 들어주겠다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데몬은 침대 상단의 얇은 천을 확 당겨서 벗겼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천을 찢기 시작했다.
짜아악, 짜아악.
넓은 천이 마치 종잇장처럼 손쉽게 찢겨나가더니 순식간에 길고 얇은 끈 여러 개가 만들어졌다.
“부탁드립니다. 저를. 묶어주십시오. 어서.”
끈을 내밀며 그가 정리되지 않은 호흡과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뱉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을 때마다 매력적이고 황홀한 음색이 어딘가 야릇하기까지 했다.
“확실하게 포박하여. 주십시오.”
“정 그러시다면…… 손만 묶을게요.”
잘못을 한 사람도 아닌데 죄인이나 도둑처럼 몸을 묶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 싫었다. 이미 충분히 몸이 힘들어 보이는걸.
“부탁드립니다.”
데몬의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끈을 들어 손을 묶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거친 호흡과 촉촉한 눈, 땀과 열기에 젖은 그의 몸이 이제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미약의 효과가 곧 사그라들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저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이렇게 힘드실 거였다면 차라리 그냥 제가 마실 걸 그랬어요.”
그를 묶으며 안타까움에 나도 모르게 탓하듯 말이 나와버렸다.
생각해보니 그러네. 데몬이 만약 대신 샴페인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걸 내가 마셨을 텐데.
대체 루시아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내가 마시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했나?’
미약을 마신 것이 나였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바로 방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데몬 앞에서 약에 취해 몹쓸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분노가 차올랐다.
그 정도로 생각이 없을 줄이야.
시에델의 공주는 단단히 교육을 받아야겠어.
“연회장에서는 제가 전혀 티를 내지 않았으니, 시에델 왕가에서는 제가 무엇을 마셨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아! 그렇겠네!
그렇다면 공주의 유죄를 입증하기 쉽지 않을 것이었다.
공주의 처분은 둘째치고 당장 눈앞의 데몬을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그의 애처로운 눈빛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냥 나를 믿고 그의 본능에 맡길 수는 없을까? 나 역시 그를 원하고 있는데.
“그리고 엘리제 님께서 드셨다면 저는 이겨내지 못했을 겁니다. 잠드신 모습만 보아도 짐승이 되어버리는 것을요.”
짐승이 되신다고요?
“제가 이성을 잃게 된다면 당신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
그만큼 강하게 나를 원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이 상황에 당신의 말이 몹시 마음에 드는 나는 어쩌면 좋아요!
“대공 각하.”
나는 결심을 하고 그를 불렀다.
역시 내가 싫은 것이 아니라 너무 과하게 나를 원해서 걱정이시라는 거죠?
그렇다면 더 망설일 이유가 없다.
“조금이라도 편안해지시도록 도와드리고 싶어요.”
“!”
손을 묶인 그는 침대에 앉은 채로 여전히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작품들 속에서 미약의 등장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해결 방법은 하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도 양보 못 해요. 혼자만 힘드신 건 싫어요.”
눈치가 빠른 그라면 내 속뜻을 알아차렸겠지.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넓은 어깨를 잡아 그대로 밀어뜨렸다.
“!”
움찔. 뜨겁고 단단한 몸이 거뜬히 넘어갔다.
평소의 그였다면 내가 미는 힘에 속절없이 눕혀지는 일 따위 없겠지.
약의 효과로 인해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붉은 눈이 난처함과 간절함으로 마구 떨렸다.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제 님, 이러시면 안!”
“미안해요, 데몬.”
다음 말은 듣지 않을게요.
나는 그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내렸다.
“!”
그 순간 데몬의 붉은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이 매우 가까이에서 보였다.
내가 그의 뜨겁고 붉은 입술을 삼켜버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