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차라리 절 묶어주십시오
(59/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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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차라리 절 묶어주십시오
2022.05.26.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입술만 닿았던 엘리제의 잔을 데몬이 재빠르게 가져가더니 한입에 모든 음료를 털어 넣었다.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시아 공주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 안 돼! 이거였어!’
엘리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공주의 뒤로 붉은색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꿈속에 보았던 바로 그 여인이잖아!’
다른 이를 시켰을 거라 왜 생각을 못 했을까.
루시아 공주가 준비한 잔을 지금 데몬이 몽땅 마셔버린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공주는, 데몬에게 바로가 아니라 내 손을 거쳐 그가 마시도록 할 속셈이었구나!’
엘리제의 두 손이 걱정으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대, 대공 각하 괜찮으세요?”
엘리제는 데몬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작고 하얀 손에 이어 목소리까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샴페인 두 잔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하지만 국왕 폐하께도 말씀드렸다시피 근무 중이니 이 이상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방금 드신 그 샴페인이 꿈속에서 제가 본 바로 그것 같아요.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하얗게 질리는 엘리제의 얼굴에 데몬의 눈이 가늘어졌다.
“피곤하신 거라면 방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데몬의 말을 듣고 조금 전까지 환했던 루시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이 되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준비한 약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매우 강한 것이었다. 죽어가던 노새도 벌떡 일으킬 만큼 마시면 효과가 바로 나타나니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신신당부를 들을 정도로.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몸에 열이 오르고 숨이 거칠어지고, 잠시 후면 몸이 견딜 수 없이 더워질 것이라고 했다.
옷을 모두 벗어던지지 않으면 참기 힘들 만큼.
‘그리고 철저한 본능만이 남는다고 했었어, 분명!’
하지만 눈앞의 대공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다분히 이성적이었고, 철저한 본능 대신 철저히 엘리제 중심적이었다.
‘상인이 말한 효과가 거짓이었나??’
루시아의 얼굴이 다시 분노로 일그러졌다.
잠깐의 대화나 만남 요청도 완벽하게 거절했던 대공이었다.
그러니 그런 그에게 공주가 샴페인을 권한다 해도 절대 받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고심하여 선택한 방법이, 엘리제에게 대신 잔을 전달하고 데몬이 마시게끔 유도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유도대로 엘리제 손에 있던 샴페인을 대공은 망설임 없이 모두 마셨다.
그런데 그에게는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약이 가짜였다는 것 아닌가!
부들부들 루시아의 몸이 떨렸다. 자이드는 곧바로 여동생이 계획했던 무언가가 틀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낭패였다.
“폐하 덕분에 감사히 축하도 받았으니, 이제 제 고백을 발표하고 엘리제 님을 방까지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데몬이 정중하게 페르만에게 요청했다.
“오! 그러시오. 우승자의 고백이라 짐도 기대되오.”
모든 이의 이목이 집중되고 순식간에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걱정으로 하얗게 질린 엘리제, 분노하던 루시아와 난처해진 자이드 역시 데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가 이곳 시에델까지 온 것은 저희 미로니카 황제 폐하의 명 때문도 있지만 엘리제 님의 목표 달성을 돕기 위함도 있습니다.”
그녀의 목표는 기억을 되찾는 것이고, 목적은 독립이다.
시에델의 모든 이가 데뷔탕트 덕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데몬의 차분한 저음이 연회장을 울리며 이어지자, 엘리제는 조금씩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그의 음성이 점점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데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다가가시는 모습에 반하여 감히 제 마음에 담았습니다. 호위인 자가 모시는 분만을 마음 가득 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실 당연한 일은 아니다. 호위를 하는 모든 이가 주인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이들은 묘하게 설득되고 있었다.
데몬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러니 엘리제 님.”
그가 엘리제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
“어머!”
모두가 소리 죽여 환호하며 뒷말을 기다렸다.
엘리제 역시 떨리는 금안으로 이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앞으로도 마음에 담고 모시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단순한 엘리제의 호위가 아니라, 엘리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가 만인 앞에 고백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묻는 형태였지만 고백에 대한 대답은 ‘네’밖에 나올 수가 없다.
그는 황제가 명한 그녀의 호위이기 때문이며,
지금 이 축제의 고백은 규정상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네. 물론이에요.”
대답과 함께 엘리제의 눈시울이 감동으로 붉어졌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답이 들리자 환호성이 터졌다.
많은 영식들의 절망 섞인 탄식과 한숨도 터졌다.
이 자리에서 엘리제는 데몬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전혀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그가 묻고 있는 것은 그저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모셔도 되는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미로니카 황제의 첩인 엘리제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었다는 것을 공적인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에델의 대부분은 모른다 치더라도 자이드와 그레이스, 페르만과 루시아는 알고 있었다. 엘리제가 미로니카 황제의 첩임을.
그러니 데몬은 엘리제가 난처해지지 않도록 그녀에게 고백해야 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엘리제가 승낙할 수밖에 없는 고백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엘리제를 사랑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제법이구나.’
그레이스가 묘한 눈빛으로 데몬을 바라보았다. 중년이 된 자신이 듣기에도 조금 전 대공의 고백은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눈빛과 목소리에서 데몬의 진심이 느껴져 더 울림이 컸다.
자이드의 짝으로 정해둔 엘리제에게 데몬이 마음을 두고 있다니, 솔직히 고백을 듣는 순간에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데몬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현명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황제의 첩을 마음에 두었고, 호위를 맡아 이웃 나라에 왔다. 자신의 마음을 축제 이벤트를 이용하여 당당하게 밝혔으며 상대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교묘히 정당화했다.
‘남 주기 아까울 정도야.’
그렇게 생각하는 그레이스의 시야에 곧 울 것 같은 얼굴의 루시아가 들어왔다.
***
“고백도 어쩜 너무 멋있으시네요.”
마치 고백받은 당사자가 된 것처럼 영애들은 감동하여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엘리제 님께 말이라도 걸어볼까 싶었는데…….”
실망한 영식들은 망연자실했다.
루시아는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것은 자이드의 패배이기도 했다.
공주의 큰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결국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누가 볼세라 몸을 돌려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그레이스 눈에도 들어왔다.
‘설마, 공주가!’
대공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엘리제를 신경 쓰느라 미처 자신의 딸을 살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해진 그레이스가 루시아의 뒤를 쫓아갔다.
그 사이 데몬은 무사히 고백을 마쳤으니 이제 돌아가 보겠다며 엘리제와 연회장을 떠났다.
두 사람의 뒤로 박수가 쏟아지고 다른 연인들의 고백 소리가 이어졌다. 자이드에게 고백하는 영애들도 있어서 왕태자는 발목을 잡혔다.
데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장을 나오는 엘리제는 아직 감동으로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지금 감동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각하, 정말 괜찮으세요?”
아무도 없는 복도에 이르자 엘리제가 데몬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아.”
그가 숨을 뱉어냈다.
‘역시!’
잘생긴 얼굴과 입술이 붉었다. 잡은 그의 팔이 뜨거웠다.
“설마, 알고도 드신 거예요?”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던 거다. 엘리제가 받았던 샴페인 잔이 평범하지 않음을.
그래서 자신이 대신 가져가서 마신 것이 분명했다.
“제게는 마력이 있으니 독이든, 약이든 미치는 효과가 훨씬 적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그의 몸 상태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
도대체 루시아는 샴페인에 무얼 넣었던 거지?
엘리제는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분노를 마주했다.
‘내 남자를 감히 이렇게 만들다니!’
루시아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엘리제 님의 방까지는 무사히 모셔다드릴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생각보다 착실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엘리제와 몸이 너무 가까워서였다.
미약 없이도 그녀의 모든 것에 반응하는 몸인데, 강력한 미약까지 마셨으니 오죽할까.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조금 더 가까운 제 방에 먼저 가서 마가렛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마가렛에게 엘리제와 함께 방에 돌아가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싫어요.”
엘리제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프신 각하를 놔두고 저만 마가렛과 돌아가라고요?”
엘리제는 데몬이 마신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자신의 곁에 있겠다고 이토록 주장하는 것이겠지.
데몬이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미약인 거죠? 드신 것이.”
데몬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
눈치챘구나. 그렇다면 더 숨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설득이 빠를 수도 있다.
“맞습니다. 그러니 저를 피하셔야 합니다.”
“왜요? 일단 누가 보면 안 되니 어서 각하의 방으로 가요.”
엘리제가 빠른 걸음으로 데몬을 이끌고 그의 방에 그를 밀어 넣었다.
점점 숨이 차고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 데몬도 느껴졌다.
어서 그녀를 방 밖으로 탈출시켜야 한다. 마가렛을 부르기 위해 설렁줄을 당기려는데.
달칵.
“안 돼요.”
방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엘리제가 그를 막아섰다. 데몬의 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방문을 안에서 잠갔다. 이제 밖에 있는 누구도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지금 각하의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요!”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말에 데몬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공격을 받은 듯이 정신이 멍했다.
“그만큼 지나치게 선정적이시다는 뜻이에요.”
약 기운 때문에 평소보다도 더 그의 남성적인 매력이 강하게 드러났다.
뜨거운 몸과 숨결, 표정과 눈빛 그의 모든 것이 무척이나 뇌쇄적이었다.
‘그건 내가 평소 당신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생각입니다만.’
누구에게도 그녀를 보이기 싫다는 생각 말이다.
데몬은 점점 이성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엘리제는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그에 따라 몸이 움찔거리며 달아오르는 중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신체 반응보다 자신의 마음이 더 곤란했다.
‘세상에 내가 못 참겠어!’
어차피 내 남자인데, 오늘 여기에서, 당신을.
‘제가 그냥 자빠트리면 안 될까요?’
엘리제는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가 마신 미약이 혹시라도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최대한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혹시 치료법을 알고 계세요?”
“…….”
미약에 듣는 치료법이나 치료제가 따로 있을 리가.
데몬 역시 알고 있었다.
미약은 그런 것이다. 성욕이나 연정을 일으키게 하는 약.
상처 같은 외상이나 내상이 아니라 몸 안에 있는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에 대한 해결책은 단 하나였다.
그 욕정의 해소.
‘하지만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는 없다.’
엘리제에게 욕정을 해소하고 나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다고 어찌 말할 수 있으랴.
그 말을 엘리제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부터가 걱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괜찮아집니다.”
데몬이 이제 살짝 몽롱해진 눈빛과 더욱 붉어진 입술로 대답했다.
그러자 엘리제가 다가오더니 그의 몸을 밀어 침대 위로 쓰러트렸다.
풀썩.
“거짓말.”
“!”
데몬의 붉은 눈이 마구 흔들렸다.
이놈의 미약이 대체 어떤 종류이길래 마력을 가진 자신에게도 효과가 나타나는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 이대로라면 위험하다. 자신은 미약 없이도 종종 엘리제에게 이성을 잃는 존재니까.
“말씀해주세요. 그냥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엘리제가 쓰러진 데몬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열기에 그의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윽.”
그저 그녀가 손만 잡은 것뿐인데 온몸이 전기가 통한 듯 찌릿했다.
안 돼. 절대 말할 수 없다.
“제가 알고 있는 방법 외에는 정녕 없는 건가 보네요.”
“!!”
그녀가 방법을 알고 있다고?
설마, 지금 그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정신이 번쩍 든 데몬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엘리제는 방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미약은 몸에 효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마력으로 몸속의 미약을 모두 없앨 때까지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점점 더 본능이 강하게 자리하기 전에.
“차라리 절 묶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