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그 샴페인을 마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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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그 샴페인을 마신 자
2022.05.23.
그녀의 말에 데몬의 이성이 바로 제자리를 찾았다.
“대회 내내 돌아다니면서 살펴보았는데 꿈에서 본 그 붉은 옷의 여인은 없었어요.”
숲에 도착하자마자 유심히 관찰하고, 아까도 토리를 시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을 추려냈다. 그리고 엘리제가 가서 확인해보면 꿈속의 그 옷이 아니었다.
“예지몽이 아니었나 봐요.”
“그렇습니까.”
데몬의 붉은 눈은 여전히 진지했다.
“그래도 계속 주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연회장에서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의 말이 맞았다. 축제를 위해 옷을 갈아입을 수도 있고, 대회에 참석하지 않고 연회에는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 그럴게요.”
“그럼 가시겠습니까?”
데몬이 마가렛과 함께 엘리제를 호위하며 숲을 빠져나왔다.
***
왕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엘리제는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의 꿈속 누군가가 샴페인 잔에 무엇인가를 넣었다.
‘그 잔에 담겼던 투명한 액체는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일까?’
여인은 그 샴페인을 누구에게 전해주려는 것일까.
‘참! 마가렛과 오늘 발견했던 숲의 동굴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데몬에게 말을 꺼내려는데, 마차가 흔들리며 멈추었다.
“오늘 대회의 우승자이신 크레미언 대공 각하를 모시러 왔습니다.”
목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열리며 대기 중이었던 시에델 왕궁의 시종들이 나타났다.
‘이따 축제가 끝난 후에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
엘리제는 데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 연회장으로 향했다.
“나는 엘리제 님을 모셔야 하니, 연회장은 잠시 후에 들르겠다.”
데몬의 말에 시종들이 옆으로 비켜섰고 데몬은 엘리제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토리와 토끼를 방에 두고 연회용 드레스로 갈아입기 위해 엘리제는 마가렛과 방으로 들어갔다. 데몬은 그녀를 기다리며 그 앞을 지켰다.
‘분명 루시아 공주와 연관이 있을 것인데…….’
그는 사실, 데뷔탕트 무대에서 엘리제의 구두 굽이 곧 부러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한눈에 들어온 화려한 구두는 매우 공들여 만든 듯 보였으나 미세하게 양쪽의 굽이 달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했겠지만, 걸을 때 좌우 굽의 소리가 서로 달랐다.’
누군가 미리 엘리제의 데뷔 무대를 망치기 위해 구두에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엘리제는 그것을 루시아 공주에게 선물 받았다고 말했었고.
그렇다면 누가 손을 댔는지는 뻔했다.
게다가 지난 열흘 동안 루시아 공주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려 하였고, 어떻게든 자신과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어 했다.
‘내가 반응하지 않았으니 공주의 마음 상태가 더 좋지 않아졌겠군.’
엘리제에게 질투를 느껴 이미 한 차례 구두 굽에 손을 썼던 공주이다.
그러니, 이번 연회 때도 무언가를 준비했을 수 있었다.
‘엘리제 님의 꿈이 예지몽이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데몬은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제를 가능하면 연회에 참석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해서 가겠다고 한다면 막을 수 없으니 조금도 눈을 떼지 않으리라.
달칵.
때마침 방문이 열리고, 결심한 데몬 앞에 눈부신 모습의 엘리제가 나타났다.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걱정이 더욱 짙어졌다.
그냥 이대로 연회는 무시한 채 함께 있고 싶을 만큼.
“……사냥 대회의 우승을 다시 한번 축하받고 싶습니다.”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요구했다.
‘응? 한 번 더?’
숲에서 이미 그의 우승을 축하했다. 그런데 다시 해달라 그가 말하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응석을 부리는 느낌이라 엘리제는 의아했지만, 이건 이것대로 귀여웠다.
‘내 남자께서 원하신다면 두 번 못 하랴.’
“정말 대단하셨어요! 우승을 축하드려요.”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 안겨 볼에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엘리제는 대신 작게 손뼉을 쳤다. 그때 데몬이 성큼 다가왔다.
“축하의 말씀과 박수뿐입니까?”
“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와 그의 질문에 엘리제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오늘따라 왜 이러시지? 내가 뭘 잘못했나?’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데몬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치 선언하듯이.
“나중에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꼭 부탁드립니다. 약속해주십시오.”
‘원, 원하는 방식?’
머릿속에 자유로운 상상이 날개를 펼쳤다.
“약, 약속해요.”
무엇이길래 미리 약속까지 받는 것일까.
얼굴뿐 아니라 그녀의 귀와 목까지 붉어졌다.
아예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귀까지 들리는 것만 같다.
“연회에 참석하시겠습니까?”
엘리제의 심장은 나 몰라라 하고 데몬이 다시 진지한 음성으로 그녀를 상상 속에서 현실로 데려왔다. 엘리제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럼요. 우승자께서 어느 분께 고백할지 저도 궁금한걸요.”
그녀가 아직 붉은 얼굴로 곱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우승자는 데몬이고, 그가 고백할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래서 엘리제는 안 그래도 조금 들뜬 상태였다.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자, 데몬은 아까까지 걱정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근심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마치 따스한 아침의 햇살처럼 눈부시고,
봄철 새싹처럼 어여쁘고 싱그러웠으며,
가뭄의 단비처럼 자신에게는 간절하고 시원했다.
그 순간에 취해 데몬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에스코트를 맡기기 위해 손을 내밀던 엘리제가 주춤했다.
“혹시 꿈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저 가지 말까요?”
그 말에 붉은 두 눈이 흔들렸다. 가지 말라고 한다면 그녀는 방 안에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걱정에 치우쳐 그녀를 옭아매는 셈이 되면 어쩌지?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혹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닌가?’
잠시 고민하는 찰나, 복도 끝에서 자이드가 이쪽을 향해 바삐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대공 각하, 여기 계셨군요! 부디 연회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데몬을 데리러 갔던 시종들이 그냥 돌아왔으니 시에델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오늘 축제의 주인공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이드를 보자 데몬은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 꿈틀대는 기분이었다. 엘리제가 다치지 않게 그녀를 숨겨 감춰두고 싶었던 마음.
“제게는 엘리제 님의 곁을 지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축제 참석은 안중에도 없다는 말로 데몬이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 말에 자이드가 정말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시면, 엘리제 님과 동행하시어 잠시 들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냥 대회의 우승자를 기다리는 이들이 연회장에 가득합니다.”
절절매는 자이드를 보며 엘리제는 마음이 약해졌다. 축제의 주인공이 빠지는 실례를 자신 때문에 겪게 할 수는 없었다. 엘리제가 데몬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잠깐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와 함께이니 잠시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꿈에서 본 붉은 옷의 여인과 샴페인만 조심하면 되고.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엘리제의 말에 자이드가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데몬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엘리제의 원하는 바도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럼 아주 잠시만 들르겠습니다.”
***
자이드는 낭패를 겪었다.
사냥 대회를 연 것은 데몬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멋지게 우승하고 엘리제에게 고백하려 했건만…….”
당연히 자신이 우승할 거라 믿었는데 일이 크게 틀어졌다.
‘방법이 없을까.’
데몬이 엘리제에게 고백마저 하게 되면 큰일이었다. 자신이 엘리제에게 고백하려던 이벤트를 전혀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축제의 고백은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으니 싫더라도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여 엘리제와 잠시라도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데몬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 분하였지만 그런 감정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좋은 생각이 없을까 사냥 대회 우승자 발표 순간부터 최대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가 엘리제에게 고백하기 전에 차라리 무슨 일이 일어나준다면 좋으련만.’
그때 자이드의 눈에 서둘러 마차에 올라 왕궁으로 먼저 향하는 여동생이 들어왔다.
‘혹시나 누이의 덕을 보게 될 수도 있겠군.’
검은 눈이 기대로 가득 찼다.
***
‘일단 연회장으로 무조건 모셔야 하는데!’
루시아는 초조했다. 데몬에게 약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단 연회장에 그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조차도 미지수였기 때문이었다.
‘대공 각하께서 엘리제 언니에게 고백하실지도 몰라.’
그는 우승자이니 누구보다 먼저 고백을 할 것이다. 그런 후에 고백을 받아준 상대와 연회장을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 전에 약을 드시게 해야 해!’
그런 후에 약을 마셔서 몸이 반응한 데몬을 자신이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데몬은 이미 지난번 갑작스러운 고열로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 핑계를 대야겠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이국의 귀빈을, 나와 오라버니가 모셔다드리겠다고 하면!’
가능할 것이다. 그와 단둘이 왕궁 수많은 방 중 하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오라버니 자이드는 자신과 데몬이 잘 되길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흔쾌히 도와주겠지.’
이미 자신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동조해달라 부탁해 놓았다. 그리고 데몬을 연회장에 꼭 데려와 달라고도. 자이드는 알았다며 연회장 밖으로 대공을 데리러 갔었다.
‘꼭 오셔야 하는데…….’
그 순간, 간절한 그녀의 소망대로 연회장 문이 열리고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제와 나란히.
시에델의 왕족과 귀족은 오늘 축제의 주인공이 등장하자 크게 환호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눈이 질투로 붉게 충혈되었다.
마음을 굳혔다고는 하나, 사실 데몬에게 미약을 사용하는 일이 지나친 것 아닐까, 수도 없이 고민되고 망설여졌었다.
그런데, 엘리제와 다정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니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되고 오직 그를 어떻게든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그녀를 지배했다.
꽉 쥔 두 주먹으로 인해 공주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상처를 냈다.
긴장과 분노로 머리가 멍했다.
“얼굴을 비췄으니 이제 제가 고백하고 싶은 분을 발표하고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오자마자 데몬이 고백을 하고 발길을 돌리겠다고 하자 루시아와 자이드는 깜짝 놀랐다.
루시아는 심장이 철렁 바닥으로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야 해!’
***
그때 국왕 페르만과 왕후 그레이스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사냥 대회의 우승자께 짐이 축하주 한 잔 주고 싶소만.”
페르만이 근처를 지나던 시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종이 서빙 중이던 샴페인 잔들 중 하나를 데몬에게 건네었다.
루시아에게는 부왕이 구세주와도 같았다. 절호의 기회였다. 누군가에게 서둘러 눈짓을 보냈다.
“영광입니다, 전하. 말씀은 감사하오나 근무 중에는 마시지 않습니다.”
“근무 중이라 하였소?”
“보시다시피 엘리제 님을 호위 중입니다.”
허허허. 페르만이 유쾌하게 웃었다.
“대공께서 책임감이 남다르시구려.”
자신이 주인공인 연회에서조차 임무 중이라니. 그의 성정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대공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나 다름없으니 한 잔 정도는 받아주시오.”
한 나라의 왕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재차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페르만이 잔을 데몬에게 건네고 자신도 하나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레이스와 자이드, 루시아도 근처 시종의 손에 들려 있던 쟁반 위 샴페인 잔을 집었다.
엘리제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역시 내가 너무 예민했나 봐.’
붉은색 드레스의 여인과 누군가가 전해주는 샴페인을 조심하자 생각하며 마음 졸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심 그 여인이 루시아 공주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눈앞의 공주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금 국왕 폐하께서는 그냥 지나가던 시종이 들고 있던 잔을 전한 것이고.’
수상한 점은 없었다.
루시아 공주가 샴페인을 데몬에게 권한다면, 나서서 마시지 못하게 막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루시아가 아니라 페르만이 권하고 있었다.
샴페인을 어디에서 특별히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던 시종이 들고 있던 축하주였다. 그렇다면 루시아가 무언가를 꾸민 것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루시아가 입은 드레스는 붉은색도 아니야.’
맞는 것이 하나도 없네. 꿈에 너무 연연했었나 보다. 엘리제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모두가 샴페인 잔을 들고 있고, 페르만이 근처를 돌아보며 모두에게 건배를 권했다.
혼자 잔 없이 생각에 빠져 있는 엘리제에게 어느 순간 시종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엘리제 님께서도 한 잔 필요하십니까?”
“아, 고마워요.”
근처의 왕족과 귀족들까지 다들 잔을 들고 함께 건배하기 위해 엘리제를 기다리는 분위기이니 시종이 내미는 잔을 자신도 어서 받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루시아가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오늘 사냥 대회의 우승자 크레미언 대공을 위하여!”
챙!
투명한 잔들끼리 부딪히고 모두가 입에 한 모금씩 축하주를 머금었다. 엘리제도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바로 그때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엘리제 님, 이 축하주는 제법 독한데 괜찮으시겠어요?”
그 순간 데몬이 엘리제의 잔을 낚아챘다.
“독한 술은 드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고는 한입에 잔에 담긴 모든 음료를 털어 넣었다.
동시에, 공주의 두 눈에 희열이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