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결국 사용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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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결국 사용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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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결국 사용하는 수밖에
2022.05.19.
시에델의 사람들은 공포에 떠는 중이었다.
산의 주인이나 숲의 왕으로 불리는 각종 맹수들이 모두 사슬에 묶여 꼼짝 못 하고 있었으나, 곧 공격할 눈빛으로 그들 모두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있는 자리에 데몬이 온갖 숲의 맹수들을 모아왔으니, 사냥 대회가 역으로 사냥당하는 대회가 되지 않기를 그들은 속으로 간절히 빌고 있었다.
“일단 어디 우리에라도 넣으심이…….”
보다 못한 바튼이 나서서 맹수들을 제발 가둬달라 부탁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큰 맹수들을 맨손으로 제압하고 재갈을 물린 것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들어가는 우리가 없습니다.”
데몬이 대답했다.
맹수들의 크기가 너무 커서 시에델에서 준비한 모든 종류의 우리에 들어가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괴력이다!’
자이드는 정말 질겁을 하였다. 패배감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담담한 척하고 있었지만, 눈앞의 데몬은 정말 괴물 같은 자였다.
맹수들을 잡은 것도 놀라운 일이었고, 그 맹수들을 얌전한 고양이처럼 수레에 올려 그것을 끌고 왔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자인가!’
영리하고 셈이 빠른 자이드는 자신이 데몬을 상대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불리한 싸움에서는 먼저 발을 빼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속이 부글대며 끓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런! 이번 대회의 우승자는 가려볼 것도 없겠습니다.”
자이드가 능글맞은 표정과 눈빛으로 부왕을 바라보았다. 어서 빨리 판결을 내려달라고.
“그, 그렇구나. 짐도 이토록 강한 사냥꾼은 처음 본다!”
진정 놀란 페르만이 데몬을 칭송했다. 모든 남성들이 감탄하고 경외를 느끼는 사이, 여성들은 그의 야성적인 남성미에 푹 빠져버렸다.
그중 가장 강력한 눈빛을 한 여인은 물론 루시아였다. 그녀의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온통 차지한 데몬을 향해 이제 공주의 몸까지 반응하는 중이었다.
“아아.”
자신의 모든 것이 데몬을 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루시아는 질투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
지난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데몬은 종일 밤낮없이 엘리제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루시아의 요청을 수없이 거절했다.
시종이나 자이드를 통해 여러 방법으로 데몬에게 따로 잠시 만나고 싶다고 계속 말을 전했다. 하지만 데몬의 대답은 늘 한결같이 ‘거절’이었다.
엘리제를 호위해야 해서 자신에게는 전혀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대하다니!’
기회조차 주지 않는 그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그것이 공주의 높은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래. 결국 사용하는 수밖에 없겠어.”
루시아는 사냥 대회의 전날,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자신의 책상 서랍 속 깊은 곳에 숨겨 놓았던 작은 유리병을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어두운색 작은 병이 흔들리며 찰랑찰랑 소리를 냈다.
사냥 대회가 끝나고 축제가 열릴 것이었다. 대회의 우승은 자이드 왕태자가 할 것이니, 오라버니는 엘리제에게 고백하고 교제를 시작하게 되겠지.
“그때가 절호의 기회야. 무조건 대공 각하께 고백해야 해.”
축제에서 받은 고백은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그러니 그날 하루 잠시라면 데몬도 공주를 만나 줄 것이었다.
그러니 그때 그에게 약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반드시 육체적인 관계까지 갖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저 데몬에게 잠시 안겨서 그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기다리고, 다음 날 함께 밤을 보낸 것처럼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
‘약의 효과로 대공 각하께서 나를 원하게 되신다면 금상첨화고.’
그러면 사냥 대회의 연회에서 공주 루시아와 이웃 나라의 대공이 서로 사랑에 빠졌다 소문이 나겠지. 그렇게 되기만 하면, 나머지 일은 저절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굴러갈 것이었다.
공주의 명예가 좀 떨어지긴 하겠지만 결혼을 하고 나면 그 정도는 흠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루시아는 고개를 쳐드는 불안한 자신에게 외쳤다. 그녀도 이런 식으로 데몬을 난처한 상황으로 몰고 가서 손에 넣는 방식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께서 나를 아주 잠시라도 바라봐주셨더라면…….’
지금과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전혀 틈이 없었고, 공주는 이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데몬을 갖고 싶었다.
축제가 끝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를 가질 수 있다.
“저 역시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요.”
마치 눈앞에 그녀가 원하는 대공이 있기라도 한 듯, 루시아가 자신을 변호하며 허공을 향해 그를 탓했다.
“일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각하셔요.”
모든 건 치명적이고, 무정한 당신 때문이라고.
***
그런데 공주의 그 무정한 목표물께서 오늘 우승자가 되면 곤란하다.
자신이 그에게 고백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데몬이 다른 사람에게 고백을 해버리면 두 사람이 연회장을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 안 돼!’
데몬을 곧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욕망에 눈이 먼 공주는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때 모두의 눈앞에 엘리제가 나타났다.
“잠, 잠시만요.”
헥 헥.
숨을 돌리는 엘리제의 외침에 숲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어머나!”
크고 작은 탄성이 이어졌다.
최초의 여성 참가자인 엘리제가 수십 마리의 다람쥐, 토끼들과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동물들을 가두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작은 동물들은 엘리제를 그저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엘리제를 발견한 그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제를 향해 달려 나갔다.
“엘리제! 정말 대단해요.”
그 모습이 마치 딸을 챙기는 어머니의 모습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루시아는 다시 한번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그레이스는 무척 놀란 마음을 숨기느라 애쓰고 있었다.
‘설마, 두 번째 각성에 성공한 것인가?’
그녀 역시 평생에 걸쳐 노력했지만 단 한 번의 각성에 성공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엘리제가 두 번째 각성에 성공하여 새로운 능력을 갖게 된 것이라면!
‘엘리제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
자신보다 그녀의 힘이 더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
승자를 가릴 수 없는 상황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대공 각하가 우승 아닌가요? 솔직히 지금까지의 대회에서 저런 맹수들을 잡아 온 이는 없었으니까요.”
“맞아요. 한 마리도 아니고 저렇게 한꺼번에 많은 맹수는 처음 봐요. 그런데도 어쩜 힘든 기색이 전혀 없으시네요. 지치지도 않으시나 봐요.”
금세 데몬이 우승이라 주장하는 이들과 엘리제를 우승으로 봐야 한다는 이들로 나뉘었다.
“정령의 힘을 가지고 계신다더니 사실이군요.”
“작긴 해도 저렇게 많은 수의 동물을 데리고 나타난 이는 처음이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페르만과 그레이스가 상의를 마치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천천히 걷는 그레이스의 우아한 발걸음에 드레스 자락이 쓸리며 작게 사각사각 소리를 내자,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집중되었다.
“이렇게 우승자를 가리기 어려운 대회는 처음입니다만, 그만큼 훌륭한 실력자들이 참가했다는 것에 기쁩니다. 접전을 이룬 두 사람의 결과에 저 역시도 놀랐습니다.”
자이드가 우승하지 못한 것이 사실 무척 안타까웠으나 그레이스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민 끝에 사냥 대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냥’을 한 쪽에 더 큰 점수를 주는 것이 맞다고 결론 내리고, 국왕 폐하와 저는 우승자를 결정하였습니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는 미로니카 황국에서 온 크레미언 대공이오!”
왕의 발표에 뜨거운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와아! 축하드립니다!”
맹수들 앞이라 공포에 떨면서도 시에델은 데몬에게 열광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영애들의 얼굴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루시아의 얼굴에도 환희가 가득했다. 저토록 강하고 멋진 남자를 자신이 가질 거라고 상상하면 절로 몸이 붕 뜨는 기분이다!
그러나 아직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그 강력한 방법을 쓸 때가 왔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차선책이었지만, 막상 사용하려니 팔다리가 마구 떨려왔다.
“하지만 오늘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
고개를 돌리니, 마치 모녀지간처럼 다정해 보이는 그레이스와 엘리제가 보였다.
‘대공 각하도 독점하고 있으면서, 이제 모후까지?’
엘리제를 바라보는 공주의 검은 눈이 무서운 눈빛으로 번뜩였다. 치맛자락을 쥔 손등에 하얗게 뼈가 드러났다.
이미 필요한 준비는 사람을 시켜 연회장 근처에 해놓은 상태다.
공주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른 이들보다 먼저 가기 위해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곧 축제가 열릴 연회장을 향해 마차가 달렸다.
공주의 잘못된 분노와 원망이 오늘 누구를 향하게 될 것인지 아직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대회를 마친 엘리제와 마가렛이 다른 이들이 없는 숲의 한쪽에서 작은 먹이들을 한가득 쏟아내었다. 미리 왕궁에서 준비해온 것들이었다.
“애들아,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돼.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엘리제의 몸에서 푸른빛과 함께 향기로운 바람이 불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작은 동물들이 빠르게 먹이를 물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성공하셨네요!”
마가렛의 환호에 엘리제도 기분이 좋아졌다.
동물들과의 교감이라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령의 힘은 그레이스나 자이드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응, 우승은 못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물론 대회 참가의 목표는 우승이었다. 작은 동물들의 힘을 빌려서 자신이 우승한다면 누군가에게 고백받을까 봐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엘리제 자신이 데몬에게 고백을 하면 될 것이니까.
그래서 일단 도전한 것이었는데, 다행히 엘리제의 남자께서 출중한 능력으로 정령의 힘 없이도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대회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이 더욱 엘리제를 기쁘게 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좋았어.”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토리 덕분에 능력도 알게 되고 동물들과 어느 정도 소통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엘리제는 오늘 가장 큰 공을 세운 토리를 손에 올리기 위해 무릎을 접었다. 그런데.
“응? 너는 안 가니?”
하얀 토끼 한 마리가 여전히 엘리제의 앞에 있었다.
엘리제가 정령의 힘을 이용하여 돌아가라고 말을 해보아도 그대로였다.
“엘리제 님을 따르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드럽고 황홀한 저음과 함께 데몬이 천천히 숲의 음영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네요! 오늘 우승을 축하드려요, 각하. 정말 대단하셨어요.”
엘리제가 웃으며 데몬을 반겼다. 그는 잡은 맹수들을 다시 숲의 깊은 곳에 직접 놓아주고 오는 길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엘리제 님의 능력에 더 놀랐습니다.”
그녀는 이제 모든 이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제아무리 로안이 권력과 명분을 세워 다시 품에 가두려 해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이미 엘리제는 그의 품 안에 가둬지지 않을 만큼 크게 성장했다.
‘어디까지 성장하실 것인가.’
그것이 무척 기대되면서도 동시에 불안했다.
곧 꺼질 촛불이 되지 않도록 그가 바람막이가 되어줄 것이었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불안과 고통이 심장 근처에 자리했다.
“두 분 다 바로 연회에 참석하셔야 하니, 우선 토끼도 데려가시겠어요?”
마가렛의 말을 듣고 엘리제가 토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혹시 같이 갈래?”
폴짝!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캉하고 부드러운 흰 생명체가 엘리제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와! 너무 부드러워!”
토끼의 감촉은 다람쥐보다 더욱 좋았다. 따뜻하고 작은 동물이 사랑스러워 엘리제는 토끼와 토리를 꼬옥 껴안았다.
“하.”
그 모습에 데몬이 질끈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설마, 저것들 수컷인 것은 아니겠지?’
맙소사. 세 글자를 입안으로 삼켰다.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동물들에게까지 질투를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참! 제 꿈속에서 나왔던 붉은 옷의 여인 말이에요.”
엘리제의 말에 데몬이 번쩍 눈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