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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잔인하고 달콤한 고문 (54/126)

54. 잔인하고 달콤한 고문 2022.05.09.

그럴 리가. 데몬은 그녀의 향기와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이 제정신이 아님을 인정했다.

16549610714579.jpg ‘단단히 미쳤군. 잠드시면 일어나 앉아야겠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잠들기만 하면 침대에서 나와 지난번 엘리제가 쌓아놓고 읽던 책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16549610714586.jpg “안녕히 주무세요.”

아무 사심도 없다는 듯, 잠이 가득 온 엘리제가 데몬 옆에서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16549610714579.jpg “편히 주무십시오.”

데몬도 그 옆에 누워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새근새근.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정한 그녀가 고르게 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16549610714579.jpg ‘잠드셨구나.’

그녀가 깨든, 깨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든 두 가지 모두 곤란하다. 데몬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기척 없이 침대에서 나와 그녀가 보는 책들이 쌓인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읽던 책들에는 손을 대기 조심스러워서 옆에 쌓여 있는 것들을 읽을 생각이었다. 평소라면 누군가 권해도 절대 읽지 않을 책들이었다. 그가 주로 읽는 책들은 군사와 외교, 정치와 정책, 경제와 경영 등에 관련된 서적이니까. 가끔 철학과 문학 서적도 읽기는 했으나 눈앞에 놓인 종류의 서적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엘리제를 통해 또 한 번의 신세계가 그에게도 열리려 하고 있었다. 쌓여 있는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표지가 어둡지 않은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색 표지의 책을 들어 올렸다.

16549610714579.jpg ‘요정 동화인가?’

책을 펼치자 붉은 눈동자가 열리며 예상치 못한 내용에 그대로 고정되었다. *** 어두운 방 한쪽부터 빛이 스며드는 느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순된 감각에 묘한 기시감까지 더해진다.

16549610714586.jpg ‘꿈속이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16549610714586.jpg ‘전에도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눈앞에 익숙한 은발의 미인이 서 있었다. 나다, 엘리제. 그때도 이렇게 엘리제의 과거를 봤었지. 정령의 힘이 열리는 고비를 맞았을 때.

16549610714586.jpg ‘기억을 되찾나 보다!’

지난번처럼 엘리제의 황궁 생활이 빠르게 돌린 영화의 장면들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그런데 엘리제의 영혼은 이미 소멸했는데 이 기억들은 어떻게 보이는 걸까?

16549610714586.jpg ‘그것도 인상적인 풍경, 로안과의 잠자리처럼 하나같이 온통 감각적인 내용들로만…….’

잠깐, 감각?

16549610714586.jpg ‘아! 육체에 남은 기억인가 봐!’

엘리제가 겪은 자극적인 일들만 보이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마치 상처처럼 육체에 남은 흔적들이 내게 스며드는 모양이었다. 비록 껍데기에 남은 기억이지만 그래도 로안에게 기억이 돌아왔다고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이었다.

16549610714586.jpg ‘돌아가면 당당히 자유를 요구할 수 있겠어!’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한 그때, 눈앞의 화면이 전환되었다. 어둑어둑 조용한 시야로 시작하여 곧 어딘가 낯이 익은 복도와 방이 보였다.

16549610714586.jpg ‘여기는…… 시에델의 왕궁인데?’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이 몰래 방 하나로 들어갔다. 그녀가 품속에 숨겼던 검은색 작은 병 하나를 꺼내더니 흔들면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16549610714586.jpg ‘저게 뭐지?’

꿈을 꾸면서도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몰래 무언가를 숨기며 혼자 방 안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그녀는 누구일까?

16549610714586.jpg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지?’

이건 분명 엘리제의 기억이 아니다. 내가 궁금해하는 사이에도 붉은 옷의 그녀는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방 안에 미리 준비된 길고 얇은 샴페인 잔 중 하나에 투명한 액체를 가차 없이 흘려 넣었다. 검은색 작은 병에 담겼던 그 액체를. 두 개의 잔을 들고 붉은 드레스의 여인이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16549610714586.jpg ‘쫓아가야 해!’

수상한 그녀를 쫓고 싶어 온몸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내 뜻대로 시선이 이동하질 않았다. 한참을 끙끙대었다고 생각한 그때. 갑자기 꿈속 배경이 한 번 더 바뀌었다. 이번에는 화려한 방 안에서 누군가 신나게 혼이 나고 있었다.

16549610714586.jpg ‘이것도 엘리제의 기억인가??’

16549610743407.jpg 「도대체 이것도 모르시면서 무슨! 어서 외우세요!」

16549610714586.jpg 「힝~ 하지만, 너무 어렵다고요!」

혼나고 있는 사람이 엘리제, 그러니까 내가 맞다! 어딘가 조금 더 성숙해 보이는.

16549610743407.jpg 「이 정도를 어렵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그분의 반려(伴侶)가 되시겠다는 겁니까?」

16549610714586.jpg ‘반려? 누가? 내가?’

꿈속에서 젊은 남교사가 다름 아닌 나를 다그치며 혼을 내고 있었다. 나이는 어려도 아주 단호한 목소리에 안경을 쓴 모습이 무척이나 지적이었다. 밝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 지적인 인상, 안경을 쓴 얼굴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16549610714586.jpg ‘누, 누구야? 살려줘!’

어찌나 곤란한지 꿈을 꾸면서도 팔을 들어 허우적댔다. 그러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채는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16549610714586.jpg “흐으, 으, 으!”

편히 잠을 자던 엘리제가 갑자기 끙끙대기 시작했다.

16549610714579.jpg ‘꿈을 꾸시는 건가?’

지난번처럼 그녀가 몽롱한 상태가 되어 깨어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데몬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잠든 엘리제의 곁으로 다가왔다. 침대 위 잠든 그녀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도리질을 하고 있었다.

16549610714579.jpg “엘리제 님.”

그녀를 불러 보았지만,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중인지 깨지 못하고 있었다. 데몬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살짝 흔들었다. 그의 큰 손에 작고 동그란 어깨가 모두 감싸졌다. 잡고 보니 더욱 가녀리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16549610714579.jpg “엘리제 님, 괜찮으십니까?”

불러도 엘리제는 눈을 뜨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이 정도로 깨워도 일어나지 못한다니, 아무래도 깊이 잠든 상태인 것 같았다.

16549610714579.jpg ‘그게 아니라면 잠을 자면서 특정한 상태에 이른 것일지도.’

첫 번째 각성 후엔 잠든 상태에서 깬 것처럼 행동했다. 두 번째 각성 후에는 그녀가 잠에 강력하게 빠져서 어떤 현상을 경험하는 건지도 몰랐다.

16549610714579.jpg “이런.”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으나 걱정되니 일단 깨워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녀의 상체를 살짝 일으켜 안았다. 조금 전 읽었던 책의 내용 때문인지 손에 잡히고 품에 안긴 그녀가 더없이 간절했다.

16549610714579.jpg ‘그 책을 여기서 찾게 될 줄이야.’

그토록 찾던 책이 그녀의 손에 있었던 것도 우연일까. 필연이고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이끄는 것이라고. 그녀의 생명을 이어가는 일에 자신의 마력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일 텐데……. 아직 그녀는 이 사실을 모른다. 정령의 힘이 그녀에게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데몬의 마력이, 조금이나마 그 생을 이어주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음을.

16549610714579.jpg ‘아직 완전히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책의 내용이 거짓일 수도 있으니.’

하지만 그는 책에 적힌 것이 사실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니 자신이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라 주장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가 다가가는 그 모든 행위가 그녀를 위한 것이라 자신에게 변명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더 닿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오래. 언제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작은 새를 품속에 안은 듯 조심스러웠다. 잠든 엘리제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그의 두 눈에 가득 담겼다.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대로 눈앞에서 사라져버릴까 봐. 품 안에 느껴지는 그녀의 고른 숨과 따스한 몸이 더없이 감사했다. 그녀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곳 자신의 곁에 있음을 매 순간 확인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텐데! 그대로 고개를 내려 곱고 향기로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닿게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데몬은 갈등했다. 그사이 그녀가 도리질하여 부드럽고 향기로운 뺨이 그의 가슴에 비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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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눈이 흔들리고 두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 잔인하고 달콤한 고문에 그만 항복해버리고 싶다. 그래서 그만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그녀에게 깊이 닿고 싶었다. 체면도 양심도 없는 야수와 같은 본심이 점점 더 이성을 사로잡았다.

16549610714579.jpg ‘이토록 여유가 없어지다니…….’

간절한 본능에 삼켜지기 전에 데몬은 차라리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랬더니 그녀의 향기가 더욱 강하게 느껴져 역효과가 났다.

16549610714579.jpg “하.”

실소가 터져 나오는 순간, 엘리제가 팔을 들어 허우적댔다. 데몬은 한 손을 들어 급히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

16549610714586.jpg “헉!”

눈을 뜨니 데몬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16549610714586.jpg “후우.”

절로 숨이 뱉어졌다.

16549610714579.jpg “괜찮으십니까?”

따뜻하고 큰 그의 손에 내 손이 잡혀 있고 어찌 된 일인지 몸이 그의 품에 반쯤 안겨 있다.

16549610714579.jpg “곤란한 꿈을 꾸시는 것 같아 깨우는 중이었습니다.”

아, 나를 현실로 꺼내어 준 것이 당신이었군요.

16549610714586.jpg “고마워요. 맞아요, 곤란했어요.”

16549610714579.jpg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16549610714586.jpg “악몽은 아니지만요. 저 혹시 돌아다녔나요?”

16549610714579.jpg “조금 전 끙끙대시기 전까지는 편히 푹 주무셨습니다.”

16549610714586.jpg “다행이네요.”

지난번처럼 돌아다닌 것은 아니라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니 아쉬웠으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데몬이 나를 놓아주며 침대맡에 마주 앉았다.

16549610714579.jpg “무슨 꿈이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16549610714586.jpg “기억 일부를 되찾는 꿈이었어요. 그리고 어딘가 신기한 꿈도 꿨고요.”

16549610714579.jpg “신기한 꿈이라고요?”

16549610714586.jpg “그게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는 건 그냥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에게 붉은 옷을 입은 꿈속 여인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데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16549610714579.jpg “구체적인 장소와 사건…… 아직 일어난 적 없는 일을 마치 지켜보는 듯 자세히 꿈으로 보셨군요.”

16549610714586.jpg ‘어? 그 설명은 마치 그 꿈이…….’

16549610714579.jpg “말씀을 들었을 때는 예지몽 같습니다.”

예지몽? 몸에 남은 엘리제의 옛 기억을 흡수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미래까지 본다고?

16549610714586.jpg ‘어려운 레벨업이라고 투덜댔는데, 각성이 지금 보니 엄청난 거였구나!’

16549610714579.jpg “진짜 예지몽이 맞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꿈속에서 본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예지몽이 맞을 테니.

16549610714586.jpg “진짜 예지몽이라면 다른 하나는 한참 먼 미래의 일 같아요. 제가 누구의 반려가 될 거라며 혼이 나는 꿈이었거든요.”

그 말에 데몬이 움찔했다.

16549610714579.jpg “반려라고요? 꿈을 하나 더 꾸셨습니까?”

그러더니 붉은 눈이 진지하게 나를 응시했다.

16549610714579.jpg “내용을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의 적극적인 요구에 내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 붉은 눈빛에 최면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나는 꿈속에서 본 것을 줄줄 말해버렸다.

16549610714586.jpg “별로 중요하지 않은 꿈일지도 몰라요.”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해지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둘러댔다. 그랬더니.

16549610714579.jpg “당신에 관한 것 중 제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쿵. 심장이 떨어진다. 그의 말에 혼이 쏙 빠져나가는 것처럼 멍해졌다.

16549610714586.jpg ‘아니, 이미 너무 멋진데…….’

이렇게 또 반하게 하시면 어떡해요? 내 심장은 어쩌라고? 자다 깨서 멍했는데, 더욱 멍해진 상태로 그만 그를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 아침이 밝았다. 데몬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엘리제는 그레이스와의 수업에 갈 준비를 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고 문 앞에서 기다리던 데몬이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조금 전까지 방 안에 함께 있었는데, 그녀가 단장하는 사이 잠깐 문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조차 이제 데몬에게는 길게 느껴졌다.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그녀의 존재를 직접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이동하는 두 사람 앞에 자이드의 보좌관 바튼이 나타났다.

16549610743407.jpg “곧 열리는 사냥 대회와 관련하여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 국왕 폐하와 왕태자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16549610714586.jpg “사냥 대회요?”

16549610743407.jpg “예. 왕후 마마께는 양해를 구해놓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레이스와의 수업 대신 바튼을 따라 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화려한 왕궁의 복도를 지나 더 화려하고 웅장한 궁의 중심부에 이르렀다.

16549610743407.jpg “귀한 시간 내주어 고맙소.”

왕 페르만이 두 사람을 반겼다. 옆에서 자이드가 말없이 웃으며 예를 갖췄다.

16549610891001.jpg “엘리제 님의 데뷔를 다시 한번 축하하오.”

16549610714586.jpg “감사드립니다.”

페르만은 엘리제가 왕녀의 자리를 거절한 것에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시에델의 귀족이라도 될 생각이 없는지 다시 물었다.

16549610714586.jpg “제안에 정말 감사드려요. 하지만 목표한 바가 따로 있어서 말씀을 따르기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그 목표한 바가 ‘독립’이라 했던가? 왕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도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계산 없는 눈빛과 결연한 표정. 지위나 권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자이드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더욱 마음이 동했다. 목표한 바가 있다며 강력한 신분과 권력을 거부한 이는 이제껏 그의 세상엔 없었다.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녀는 욕망만 가득한 그의 주변 이들과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16549610891001.jpg ‘누군가의 첩이나 여인으로 그저 만족하고 살 사람이 아니군.’

마치 흐르는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활어같이 느껴졌다. 그물에 잡혀 어항 속에 갇힌 물고기가 아닌. 잡아 올려 손에 넣어도, 벗어나려 바둥거리는 생명체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그 파닥이는 모습이 생기 넘쳐 보여 더욱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애욕인지 소유욕인지 모를 감정으로 왕태자의 검은 눈이 더욱 진하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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