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위험하고 저속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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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위험하고 저속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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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위험하고 저속한 방법
2022.05.02.
“아무래도, 어마마마께 상의를 드려야겠어.”
현명하신 모후라면 좋은 방법을 알려주실지도 모른다. 지난번엔 어쩐지 모후에게 말을 꺼내기 망설여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러다가 데몬을 놓치겠다 싶어 조바심이 났다.
루시아는 서둘러 그레이스의 방으로 향했다.
***
“루시아 왔구나!”
오늘 데뷔를 마친 공주를 그레이스는 더욱 반갑게 맞이했다. 엘리제가 양녀 자리를 생각지 못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새로 생긴 고민을 하던 차였다.
엘리제는 그레이스에게 여러모로 예상을 깨는 존재였다.
왕후와 공주를 위한 차가 준비되었다. 공주가 자리에 앉곤 찾아온 용건을 꺼내었다.
“어마마마, 제게 만약 미래를 함께 하고픈 사람이 생긴다면 어떻게 그분의 마음을 얻는 것이 좋을까요?”
공주는 데뷔를 마치자 바로 혼인 생각이 든 모양이다.
‘그래, 보통이라면 이게 정상이지.’
그레이스의 입장에서는 이게 공주다운 생각이었다. 시에델 왕가의 여인이라면 보통 데뷔를 마치고 혼례를 준비하는 게 당연하니까.
왕후는 루시아의 아름다운 뺨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루시아의 사랑은 부디 행복하기를 바랐다. 자신과는 다르게.
“루시아, 내가 원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도 좋다만 어미 생각에 여인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선택하는 쪽이 더 행복한 것 같구나.”
경험에서 우러난 그레이스의 조언이었지만 루시아는 그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를 좋아하는 분이 제 마음에는 안 들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왕후는 공주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랑이 전부는 아니란다. 그 외에도…….”
왕후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고 싶었지만, 루시아는 철없는 풋사랑의 열병을 앓는 중이었다. 거기에 이성을 집어삼킨 질투까지 더해진 상태.
“혹시 원하는 분의 마음을 얻는 묘책은 없을까요?”
공주의 눈빛이 어딘가 간절했다.
‘듣고 싶은 대답이 있는 게로군.’
그레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도 생겼니?”
루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폐쇄적인 시에델의 왕가에서 다른 나라의 대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는 긍정적이지만.’
시에델의 정통성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모후라면 반응이 다를지도 몰라 긴장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 신부수업을 받고 이제 데뷔를 마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서요. 마음에 드는 분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연스레 궁금해졌어요.”
긴장되는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고 루시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그레이스는 아직 누굴 좋아해서 이러는 건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말을 꺼냈다.
“좋아하는 이성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
왕후는 고개를 들어 그동안 자신이 듣거나 보아온 사교계의 무수한 일들을 떠올렸다.
“일반적인 방법은 상대방과의 접점을 찾아 만남을 지속하는 거다. 자주 보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 호감을 얻는 것이 필요하겠지. 지켜본 바로는 같은 모임에서 만나는 것이 효과가 좋더구나.”
‘그 방법이야 알지만, 자주 보기는커녕 대공 각하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걸!’
더 확실하고 강력한 방법이 필요했다.
공주의 마음을 모르는 왕후는 아직 설명 중이었다.
“만남을 이어가며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대공은 엘리제가 기억을 찾으면 미로니카 황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지 알 수가 없다.
‘이어갈 만남이 있기나 할까.’
루시아는 더욱 빠르고 효과가 분명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일반적인 방법이 그렇다면, 혹시 특별한 방법도 있나요? 그냥 궁금해서요.”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루시아 공주는 필사적이었다. 고운 검은색 눈을 접어 웃으며 모후를 재촉하듯 물었다. 흔한 호기심일 뿐이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도 물론 있긴 해. 하지만 우리 같은 왕실에서는 굳이 그런 위험하고 저속한 방법은 쓸 필요가 없단다.”
‘위험하고 저속한 방법?’
드디어 원하는 답을 발견한 루시아가 두 눈을 반짝였다.
“왜 왕실은 그런 방법이 필요가 없는 거죠?”
사실 루시아도 알고 있다.
왕실은 명령이나 거래를 통해 얼마든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입으로 먼저 말을 꺼내는 것과, 왕후가 직접 말을 해줘서 자신이 그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왕후가 말한 후에 자신이 그 방법을 사용하면.
‘그것은 어마마마의 허락이나 마찬가지니까.’
왕후의 조언을 공주가 이행한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후의 입에서 기대하는 대답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왜냐하면, 왕실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상대에게 결혼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왕가의 명령이니 거부하기 위해서는 명백한 이유가 필요할 것이야.”
만족스러운 답이 나왔다. 이제 여기에 한 단계 더 확실한 종지부만 찍으면 되었다.
“혹시 본국에서 타국과의 결혼이 이루어진 적도 있나요?”
웃으며 말을 하고 있었지만, 루시아의 속이 긴장과 기대로 조여들었다.
“있기야 있지.”
어딘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그레이스가 말을 이었다.
“너희 증조모께서 다른 나라의 공주셨어.”
‘되었어!’
루시아는 매우 가벼워진 마음으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증조모의 사례라면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시에델의 특성을 생각할 때 아예 경우가 없을지도 몰라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친척 중에 이미 선례가 있었다.
“그렇군요.”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이 해맑게 웃으며 루시아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제 다른 귀부인들을 통해 어머니가 말한 그 ‘위험하고 저속한 방법’이 무엇인지만 알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상의 드릴 일이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부디 그래 다오. 어미도 궁금하구나.”
루시아의 입으로 들어오는 홍차의 향기와 맛이 오늘따라 유난히 향기롭고 달게 느껴졌다.
***
방법을 찾아 기쁜 루시아와는 달리 자이드는 꼬여버린 일을 풀기 위해 고심 중이었다.
엘리제가 당연히 왕녀의 지위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왕족이 되는 데에 필요한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녀가 왕족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러니 당장 엘리제는 데뷔는 마쳤으나 시에델의 왕족도 귀족도 아닌 셈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어. 뭐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자신이 청혼하는 것에 그녀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에델이 가장 중요시하는 정령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격은 이미 충분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왕가의 일원이 되어 혼인하는 거였다면 모든 부분에서 완벽했을 것인데.
‘어째서일까.’
자이드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다른 이들은 되고 싶어 안달인 왕족의 지위를 엘리제는 어째서 전혀 원하지 않는 거지?
‘하긴, 황궁에서도 도망치고 싶어 했었지.’
단순히 로안의 첩인 것이 싫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역시 데몬 때문인가?’
잘생긴 미간이 확 구겨졌다.
아마도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의 첩도 마다하고, 왕국의 왕녀 자리도 마다할 수 있겠는가.
‘대공 부인이 되고 싶은 거였나? 하지만 이제 시에델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을 텐데.’
데몬을 선택하는 대신, 그녀는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어도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때로는 사랑을 위해 목숨도 버리는 이들이 존재한다.
과연 엘리제에게 데몬을 향한 사랑이 목숨을 버릴 만큼 중요한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가 돌아왔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그 어려운 선택을 할 확률은 희박해.’
게다가 그녀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 어쩐지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손에 쉽게 잡히는 먹이에는 흥미가 없다.
애초가 그녀가 황제 로안의 첩이어서 더욱 매력적이었던 것처럼.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유혹해주어야겠군.’
데몬 대신 자신을 선택하게 되면 엘리제가 시에델을 떠나는 일은 없을 테고, 그렇다면 그녀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냥대회를 열어야겠어.”
목걸이는 실패했었다.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한참을 고심하던 자이드가 왕 페르만에게 윤허를 얻기 위해 움직였다.
***
데몬은 잠시 내 방에 들러서 데뷔 축하 선물을 놓고 용무가 있다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설렘 속에 남은 나와 마가렛이 함께 작은 상자를 열어보았다.
“어머나! 엘리제 님과 정말 잘 어울려요!”
‘당신만 바라볼게요’의 의미를 담은 선물이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는 투명한 보석 한 쌍이 영롱하게 빛나며 달랑거렸다.
“어떤 의상과도 잘 어울릴 귀걸이네요.”
마가렛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지난번 내가 불안해해서 이런 선물을 주신 건가?”
그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하나하나 선물의 의미를 알아보면 마치 그가 메시지를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당신은 내 것이니 도망 못 갑니다.
이번에는, 당신만 바라보겠습니다.
“다음에는 뭘까?”
“저도 궁금해요! 연애는 엘리제 님께서 하시는데 왜 제가 떨리죠?”
“앗! 마가렛이 그렇게 말하니까 더 떨려.”
우리 둘이 손을 잡고 방방 자리에서 뛰었더니, 책상 위에 내가 쓰던 종이 한 장이 나풀거리며 우리 앞으로 떨어졌다.
“어? 그림이네요?”
마가렛이 종이를 주워들며 물었다.
그것은 밤새 독서를 통해 얻어진 내 열정의 흔적이었다.
요새 낮에는 데뷔탕트 준비를 하느라 바빴지만 사실 밤에는 마가렛이 구해준 책들을 열심히 읽으며 나름 내 미래를 위한 구상 중이었다.
“내 사업 아이템이야.”
내가 으스대며 말했다.
“사업이요?”
“응. 사실 물건의 외향을 구상하고 꾸미는 것에 관심이 좀 있거든.”
“귀중품이나 장식품 같은 거 말씀이신 거죠?”
“맞아. 기회가 된다면 그런 사업을 하고 싶어. 액세서리도 좋고 생활용품 같은 것도.”
현실에서 회사를 다니며 필요에 의해 잠시 발표 자료 표지나 상품 외형 디자인을 한 적이 있었다. 전문적으로 배우고 익힐 시간이 충분했던 것은 아니나, 나름 재미를 느꼈었고 결과물도 꽤 좋은 성적을 거뒀었다.
“어머! 이거 정말 예뻐요. 무슨 용도로 쓰는 건가요?”
작고 우아한 램프 모양의 그림을 가리키며 마가렛이 물었다.
“그건 말하자면 수면등인데…….”
내가 설명을 위해 책상 위에 놓인 빈 잉크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똑똑똑. 동시에 내 방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데몬입니다.”
‘앗! 내 남자께서 오셨다!’
그때 갑자기.
화아악!
“으앗!”
“어머나, 엘리제 님!”
온몸이 지난번 평원에서처럼 눈부시게 밝은 푸른빛으로 휩싸였다.
그러더니,
내 손끝에서 푸른색 밝은 빛이 흘러나와 손바닥에 놓인 빈 병으로 쏟아지며 주르륵 담겼다.
“이, 이건!”
***
데몬은 엘리제를 방에 데려다주고 잠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황후 프시케가 보낸 서신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의 말대로 있더군요. 남아 있는 것은 아주 소량입니다. 기껏해야 300온즈 될까요.」
300온즈면, 단 한 번의 폭주를 막을 양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예전 데몬의 마력량일 때의 기준이지, 지금 그의 마력이 폭주한다면 10배 정도의 정령석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조금밖에 없었다면 분명 로안이 무척이나 애가 닳았을 텐데.’
크레미언 대공을 마음대로 부릴 무기가 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셈이니까.
그럼에도 티를 낼 수 없었을 거다. 어쩌면 엘리제를 구하기 위해 데몬이 자꾸 마력을 사용해서 다행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대공의 마력이 한계점까지 차올라 폭주가 임박하면 대공가 위에 군림하기 위해 로안은 마지막 남은 정령석 모두를 사용해야 했을 테니까.
‘필사적으로 숨기며 정령석을 구할 방법을 꾀했을 것이 분명해.’
아마 시에델과 은밀한 교류를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자이드가 로안의 약점을 쥐게 된 것은 아닐까?
너무 늦기 전에 다시 엘리제에게 가기 위해 프시케에게서 온 서신을 불태우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엘리제 방 앞에 다다라서 문을 두드리고 자신이 온 것을 고했다.
그랬더니 방 안에서 마가렛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엘리제 님!”
‘무슨 일이지?’
데몬이 황급히 문을 열었다.
방 안 가득 빛과 함께 달콤한 장미 향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