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옆에서 주무신다고 약속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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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옆에서 주무신다고 약속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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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옆에서 주무신다고 약속하시면
2022.04.21.
“내 남자라고 해주시는 겁니까?”
쿵쿵 소리를 내며 데몬의 가슴 역시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토록 자신을 욕심 내주는 것이 미칠 듯 좋았다.
“제게 마음을 주셨으니까요. 조금 전에도 제 것이라 하셨고요.”
데몬은 잡은 하얀 손을 뒤집어 눈을 감고 그 손등에 살포시 입술을 내렸다.
입술이 닿은 따스한 손등에서 달콤한 장미 향이 났다.
“예, 맞습니다.”
당신의 것.
“어서 말씀해주세요, 누구에게 당하신 거예요?”
커다란 금안이 아직 눈물을 머금고 흔들렸다. 여전히 분했다. 누군가 데몬에게 그런 흔적을 강제로 남겼다는 사실이.
“제가 연모하는 분께서 지난밤 만들어 주셨습니다만, 기억을 못 하시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데몬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엘리제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설마, 제가 그랬어요??”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무 말 없이 데몬이 그녀를 향해 웃었다.
“!”
얼굴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다. 엘리제는 창피해서 코피가 날 것처럼 어지러웠다.
“꿈인 줄 알았어요!”
“약간의 잠버릇이 있으십니다. 걱정되니, 앞으로는 밤에도 곁을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무척 곤혹스러울 것이나, 그래도 그녀가 꿈인 줄 알고 돌아다니고 다른 사람과 몸이 닿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그럼, 각하께서는 언제 주무시고요?”
“저는 잠을 줄이는 일에 익숙합니다.”
수많은 전쟁과 전투, 대공가의 가주로 일하며 잠 못 자는 것쯤은 일도 아니게 되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엘리제는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그리고 야무진 표정으로 데몬에게 말했다.
“제 옆에서 주무신다고 약속하시면 허락해드릴게요.”
“!”
‘나를 고문하실 생각이신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데몬의 몸이 경직되었다.
***
왕후 그레이스와 약속한 춤 수업 시간에 맞춰 엘리제는 수업 장소로 향했다.
‘간밤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구나.’
숨을 헐떡이는 엘리제를 보며 그레이스가 놀라서 외쳤다.
“마법이라도 배우신 건가요. 하루 만에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어제와 같은 그 몸치 박치의 엘리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어제는 분명 데뷔 전에 동작을 다 익힐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던 엘리제의 춤사위가 눈에 띄게 발전해 있었다.
‘물론 아직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이나…….’
몸놀림이 전체적으로 가벼워지고 감각을 익힌 듯 훨씬 빠르게 동작을 소화하고 있었다.
“감을 익히는 데 약간 시간이 걸릴 뿐 사실은 소질이 있는 쪽이었나 보네요.”
그레이스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쥘부채를 흔들었다.
“감, 감사합니다.”
헉헉. 엘리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부채를 흔들었다.
마가렛이 얼른 달려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내었다.
“이 정도면 데뷔탕트에서 실수하실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와! 다행이에요. 마마께서 고생해서 가르쳐주시는데 제가 따라가지 못해서 죄송했거든요.”
엘리제가 온통 땀에 젖은 채 미안한 표정으로 웃자 그레이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시에델의 왕족이나 귀족들과는 다르게 엘리제는 수업이 힘들어도 억척스레 버티는 끈기가 있었다. 사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수업이 혹독함을 알고 있었다. 보통 영애라면 벌써 포기했겠지.
게다가 엘리제의 솔직함과 상대에게 진심인 점은 특히 그레이스가 만나온 아가씨들과 다른 느낌이었다.
‘점점 더 마음에 드네.’
그레이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춤 동작의 세세한 부분까지 연습한다면 분명 훌륭한 춤 실력을 갖추게 되실 겁니다. 자, 조금만 더 힘내세요!”
쥘부채를 접어 내리치며 그레이스가 응원했다. 엘리제의 실력은 앞으로 며칠 더 두고 볼 일이겠지만 그녀는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제자였다. 오랜만에 그레이스는 재미가 있었다.
“그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보죠. 음악!”
왕후의 신호에 맞춰 악공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어제보다 훨씬 우아하고 정제된 동작의 엘리제가 아름답게 움직임을 이어나갔다.
***
“내 생각에는 각하께서 해주신 안마 덕분인 것 같아.”
“오늘 춤 수업 칭찬받으신 거 말씀이시죠?”
씻고 나온 엘리제에게 마가렛이 카트에서 식사를 내려주며 말했다.
처음으로 왕후 그레이스에게 칭찬도 받고 평소보다 일찍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덕분에 여유롭게 저녁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고, 데몬에게도 잠시 휴식을 줄 수 있어 엘리제는 두 배로 기분이 좋았다.
‘오늘 밤에도 해주시려나?’
그의 안마를 상상할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효과가 좋은 것도 있었지만,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 무척 행복했고,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감촉은 심지어 황홀했다.
‘밝히는 여자 같아서 좀 그렇지만 역시 너무 좋은 걸 어떡해.’
두 손으로 볼을 감싸며 어제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의 안마를 받고 나면 신기하리만큼 몸이 가벼웠다. 오늘 춤 동작이 평소보다 쉽게 느껴진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안마 덕분 같았다.
“일찍 오시니 좋아요. 각하께서도 오랜만에 잠시 쉬시겠네요.”
“응, 그래서 더 뿌듯해. 좀처럼 쉬지 못하셔서 마음에 걸렸었거든.”
엘리제가 씨익 웃었다. 사실 데몬이 평소 일하는 것에 비하면 엘리제의 호위는 가벼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식사하신 후에 혹시 따로 하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오랜만에 생긴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마가렛이 물었다.
“아! 혹시 여기에도 도서관이 있을까?”
“후훗, 왕궁 도서관이요?”
마가렛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찾으실 줄 알고, 제가 미리 알아보고 출입 허가증과 대출증까지 받아놨어요!”
“와! 마가렛 진짜 최고다!”
에헴!
도서관 출입 허가증과 대출증을 자랑하듯 손에 든 마가렛을 보고 엘리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마가렛 뽐내는 모습 너무 귀여워!”
데몬이 그녀를 곁에 보내준 이유를 알겠다.
“각하께 나중에 감사 인사 꼭 드려야겠다.”
“허가증은 제가 받았는데요? 재주는 곰이 넘었는데, 왜 칭찬은 왕서방이 받아요?”
지금 자기가 곰, 데몬이 왕서방이라는 거야?
“아니 그런데 잠깐, 마가렛 그 속담도 알아?”
지난번 단군 신화도 알고 있지 않았어? 마가렛의 능력 설정 뭐지? 모르는 게 없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 많을 뿐이에요. 방에 계시면 제가 필요한 책을 얼른 빌려올게요.”
“그래 줄래?”
“네. 바람같이 다녀올게요! 혹시 보고 싶으신 책 있으세요?”
보고 싶은 거? 엘리제의 머릿속에 반가운 제목들이 스치듯 떠올랐다.
『잠 못 드는 밤, 도서관에 그 기사는 왜 갔나』
‘여기에도 있을까? 지난번 읽다 말아서 뒤가 궁금한데.’
엘리제가 진지하게 마가렛을 불렀다. 커다란 두 눈이 이채를 띠며 가늘어졌다.
“마가렛, 나 예전에 황궁에서 보았던 책들 혹시 기억해?”
앗! 엘리제 님 진심이세요?
“표지가 어둡고 제목은 주로 붉거나 휘어지는 글씨체였던 그 책들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죠?
“그 책들 맞아. 주로 기사님과 영애들 나오고 사랑을 속삭이는 왜 그 책들 있잖아.”
‘헉, 진심이셨구나.’
마가렛은 엘리제 몰래 침을 삼켰다. 자신은 도서관까지 가서 책들을 빌려오면서 아무래도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장르의 다른 책들도 혹시 대출이 가능하거든 조용히, 알지?”
엘리제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저런 행동은 어디서 배우신 걸까?’
마가렛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황제 로안과 자이드 왕태자의 능글거리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황제 폐하나 왕태자님은 역시 우리 엘리제 님께 안 되겠어. 나쁜 약이야.’
지나치면 독이 되는 나쁜 약. 그녀가 고개를 흔들며 도리질을 했다.
엘리제 님께 ‘좋은 약’께서는 지금 자신의 방에서 쉬고 계신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마가렛이 인사하고 식사용 카트를 밀며 방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돌아온 마가렛이 카트와 함께 나타났다.
“엥? 식사 가져다줬잖아. 도서관에 가는 거 아니었어?”
마가렛이 카트의 식탁보를 걷어내자, 엘리제의 눈이 반가움으로 활짝 열렸다.
음식 대신, 엘리제가 원했던 책들이 수북하게 올려져 있었다.
“와! 마가렛 정말 최고!”
“다, 다녀왔습니다.”
하아, 하아. 누가 볼세라, 책이 담긴 카트를 부지런히 밀고 오느라 마가렛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이렇게나 많이? 무거웠을 텐데! 정말 고마워. 이제 좀 쉬어.”
“카트를 이용해서 빨랐어요. 책 제목들을 도서관 사서 외엔 누가 보지도 못했고요.”
엘리제는 자신의 유능한 마가렛을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가렛, 진짜 대단하다!”
엘리제의 눈빛을 보자, 마가렛은 도서관에서 마음 졸이며 책을 찾았던 순간이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힘을 내는 것, 행복해하는 모습 그 모두가 자신에게도 기쁨이었다.
“뭘요. 또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부르세요.”
마가렛이 후식을 준비하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
“어디 보자! 진짜 다 찾아왔네?”
엘리제의 고운 두 손이 바삐 어두운 표지의 책들을 찾고 있었다.
“어? 이거 지난번 그 정령 책도 가져왔구나. 왁! 저 책 마음에 든다!”
마치 모래 알갱이들 속에서 사금이라도 채취한 듯 엘리제가 한 권의 책을 들어 올렸다.
“제목부터 내 취향이네! 아? 여기 이것도!”
마가렛은 실로 유능한 측근이었다. 엘리제의 손에 들린 두 권의 책 제목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 황제 폐하 여기서 이러지 마세요』
『공작부인의 위험한 위장결혼』
제목부터 기대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찰떡같이 골라왔을까!
아무래도 마가렛에게 보너스라도 주어야겠다.
***
어느새 밤이 되었다.
데몬은 엘리제에게 가볍게 안마를 해주고 그녀의 방 밖으로 나왔다.
평소 같으면 늦은 밤까지 이어진 춤 수업에 안마를 받은 엘리제가 바로 잠들었을 텐데, 오늘은 일찍 끝난 수업 덕에 안마를 받은 후로도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지금 엘리제 님께서 보시는 책들 나중에 내게도 보내주면 좋겠군.”
그녀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책이라면 자신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할 거라 생각되어 데몬이 마가렛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마가렛의 얼굴이 왜인지 사색이 되었다.
“지금 안 보시는 책들 먼저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보지 않는 책들은 주로 역사와 지리, 설화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래, 알겠다.”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데몬이 피식 웃었다. 마가렛이 엘리제를 위하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당장 오늘 밤부터는 엘리제 옆에 꼼짝없이 누워서 밤을 새우게 될 것을 각오하고 왔는데 그녀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며 데몬을 방 밖으로 밀어냈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하지만 책을 읽다 잠들어도 마찬가지일 테니, 방 밖에서 기다리다 새벽에 그녀의 상태를 살필 생각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그녀.
그녀는 첫 번째 각성을 무사히 마쳤다.
데뷔까지는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데뷔를 마치고 각성까지 더 하게 된다면 그녀는 달라지겠지.’
앞으로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며 앞으로 나아갈까.
데몬이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
며칠이 빠르게 흘러 데뷔탕트 당일.
그 사이 데몬은 밤낮없이 엘리제의 곁을 지켰고, 다행히 엘리제가 자는 동안 깨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각성 후 며칠만 그랬던 모양이군.’
데몬이 예상하기에 그녀의 수면 중 보행 증상은 각성 이후 잠깐만 나타난 현상인 듯했다.
‘다음번 각성을 이루시면 또 조심해야겠고.’
그녀의 잠버릇을 생각하자 벌써 긴장되었다.
오늘은 엘리제의 시에델 데뷔 날이니, 그에 맞춰 데몬도 준비를 하고 엘리제의 방 앞에 섰다. 축하하는 의미로 평소와 다르게 밝은 연회복 차림으로.
‘마음에 드시면 좋겠구나.’
달칵. 그가 작은 상자를 하나 들었다가 품 안에 다시 넣었다.
때마침 엘리제의 방문이 열리고 푸른색 초커 드레스를 아름답게 차려입고 하얀 숄을 걸친 엘리제가 나타났다.
“와! 각하!”
그녀가 데몬의 모습을 보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밝은 연회복도 무척 잘 어울리시네요!”
빗어넘기신 머리도요. 오늘따라 더 매력적인 그였다.
“과찬이십니다. 드레스에 구두가 잘 어울리십니다.”
인사를 하며 그녀의 발목에 걸렸을 발찌를 눈으로 찾다가 데몬은 엘리제의 새 구두를 알아챘다. 연회에 어울리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구두였다.
“루시아 공주께서 선물로 주셨어요. 아주 편해요!”
“다행입니다. 그럼, 가시겠습니까?”
데몬이 내민 손을 엘리제가 잡으며 얼굴을 붉혔다. 오늘 그와 춤출 생각으로 더욱 열심히 연습해왔고 드디어 연회에서 그와 손을 잡고 첫 춤을 추게 될 것이었다.
‘떨린다!’
그 시각, 이미 연회장에 도착한 루시아도 엘리제와 같은 마음이었다.
두 여인 모두 오늘 연회를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