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벌을 받으셔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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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벌을 받으셔야겠어요
2022.04.14.
다행히도 그가 데뷔탕트 연회장에서 마력을 사용하여 불을 모두 나가게 하는 일은 없어도 될 것 같았다.
“걱정해주시니, 그럼 이 위에 하얀 숄을 걸칠게요.”
엘리제가 그를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자신의 눈에만 담고 싶은 것이 지나친 욕심일까.
하루라도 빨리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 공표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물리적으로 시일이 걸리는 일이니,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데몬이었다.
***
잠시 후 자이드도 다시 와서 엘리제에게 데뷔를 축하한다며 선물을 전해주고 갔다.
그는 무언가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들어왔지만, 데몬과 서로 한참 노려보는가 싶더니 오래지 않아 왕의 부름을 받아 선물만 놓고 엘리제의 방을 떠났다.
“와, 목걸이네요!”
파란색 상자를 열자 정말 화려한 보석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화려한데?”
엘리제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황후 프시케가 보내준 드레스가 초커 드레스라 목걸이는 그 드레스에 착용할 수가 없었다.
“드레스를 핑계 삼아 착용을 못 했다고 말씀드리면 서운해하지 않으시겠지? 다음에 착용하겠다고 약속드리면서.”
무려 왕태자가 귀빈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러니 예의상 착용하는 것이 사실 도리였다.
하지만 모국인 미로니카에서 보낸 선물이 시간상으로도, 경우로도 우선이었다.
그런 이유가 있어서 착용하지 못했다고 미리 말을 한다면 괜찮겠다 싶었다.
데몬은 엘리제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생각이 바람직해서 흡족했다.
“예. 그렇다면 시에델 측에서도 결례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지금은 우선 수업에 늦지 않게 바로 갈까요?”
엘리제가 목걸이는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데몬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까지 찾아내니 아주 기특하기까지 했다.
자이드의 선물을 확인만 하고 바삐 연회 홀로 향하는 엘리제는 사실 마음이 다급했다.
그레이스와의 춤 수업 때문이었다.
배워야 할 것은 아직 산더미인데 갑자기 데뷔탕트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 이제 남은 것은 혹독한 춤 수업뿐이었다.
엘리제는 그레이스를 잘못 봤다. 그녀는 호랑이 정도가 아니라, 춤 수업에 있어서는 악마에 가까운 혹독한 선생님이었다. 그러면서도 웃는 얼굴을 잃지 않는 게 더 무시무시했다.
모두의 예상대로 몇 시간 내리 춤 수업이 진행되었고, 역시나 엘리제가 초주검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다.
“으윽, 마가렛! 제발 살, 살.”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는 엘리제를 마가렛이 얼음으로 찜질 중이었다.
“앗 차거!”
“조금만 참으세요.”
목욕도 겨우 마치고 엘리제는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어서 침대에 시체처럼 엎드려 있었다.
온몸이 다 쑤시고 아팠다. 아프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얼굴 근육까지 경련이 일어났으니 말 다 했다.
“지금 참고 근육을 풀지 않으시면 내일은 더 아프실 거예요.”
앓는 소리를 하는 엘리제를 달래가며 마가렛이 계속해서 얼음이 가득 든 찜질 주머니를 그녀의 종아리 위에서 눌러 돌렸다.
“악! 하지만 너무 아파, 앙.”
엄살이 아니라 연달아 몇 시간째 춤을 배우며 계속 쥐가 나서 근육이 정말 찢어진 듯 아팠다. 그녀의 아름다운 금색 눈에 눈물이 맺혔다.
‘사람 살려 힝.’
고개를 돌려 마가렛을 올려다보니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래서 엘리제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똑똑.
엘리제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누구시지?”
마가렛이 문을 열자, 얇고 긴 부드러운 타월을 든 데몬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대공 각하?”
“엘리제 님의 근육통에 필요한 것을 가져왔다.”
“타월이요?”
마가렛이 데몬의 두 손에 올려진 하얀 천을 바라보았다.
“아니, 나.”
“네에?”
마가렛과, 엎드려 있는 엘리제가 동시에 외쳤다.
‘아니 대공께서 이런 성격이셨나?’
두 여인이 모두 어안이 벙벙한 사이 데몬이 유유히 엘리제 곁으로 걸어왔다.
“저, 저기…….”
‘나 지금 잠옷 차림인데!’
엎드린 엘리제의 얇고 투명한 네글리제 위로 데몬이 들고 온 넓고 부드러운 흰 천을 덮었다.
“이대로면 내일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실 것입니다.”
데몬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아! 마력을 사용하려는 거구나.’
“전신 안마를 해드리면 훨씬 나으실 겁니다.”
그녀의 맨살과 속옷 위를 그의 두 손으로 만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데몬이 크고 넓은 타월을 준비해서 온 것이었다.
타월 위로 크고 따뜻한 손이 올려졌다. 부드럽게 누르는 압박감에 엘리제가 흠칫 놀랐다.
“살살하겠습니다.”
그녀가 움찔 놀라는 모습에 데몬이 상냥하게 말하며 마사지를 시작했다. 두 손이 닿는 곳마다 신기하게도 따뜻하고 편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해.’
아무리 안마라고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그녀의 몸 위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 상황이 너무 좋은 나를 어쩌면 좋냐.’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 붉게 물든 얼굴을 침대 이불 속에 파묻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근육통을 없애고자 안마하는 것뿐일 텐데 자신은 그의 손길만으로도 그만 기분이 야릇해지고 있었다.
마력이 효과가 있어서 엘리제의 몸이 나른해지면서 근육의 아픔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동시에 묘한 느낌에 온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사실 데몬의 마력은 얼마 전 엘리제와의 입맞춤으로 매우 안정화된 상태였다. 정령의 힘을 통해 안정된 마력은 신성력만큼 큰 치유력을 갖게 된다. 데몬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 너무 좋은데, 졸리다.’
고단한 몸에 사라지는 고통, 기분 좋은 손놀림까지 더해지니 잠이 쏟아졌다.
곧 엘리제의 코에서 도롱도롱 고운 숨소리가 들렸다.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마가렛이 엘리제가 잠들자 데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데몬은 잠든 엘리제의 몸을 충분히 풀어주느라 그 이후로도 한참을 더 안마했다.
‘혹시나 오늘도 잠든 채 일어나시는 건 아니겠지?’
오늘은 좀 곤란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지난번과는 다르게 너무나 얇고 투명했다.
하지만 엎드려 잠든 그녀를 그 상태로 두고 나갈 수는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분명 고개가 무척 아프시겠지.’
이대로 한쪽으로 고개가 고정된 상태로 아침을 맞으면 고개가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정한 데몬이 한 손으로 그녀의 고개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다리를 받쳐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의 몸을 상체가 위를 향하도록 돌려주려는 찰나.
“흐으응.”
엘리제가 잠결에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
그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멈췄다. 두 팔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만 누워 있는 그녀에게 꼼짝 못 하고 잡힌 꼴이 되었다.
난처하지만 그녀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그녀 몸 아래 깔린 두 팔을 빼내려는데, 다시 한번 엘리제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
자고 있는 것이 맞나?
지난번처럼 꿈이라 생각하고 이러는 것인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때.
쪽!
그녀의 입술이 데몬의 볼에 순식간에 닿았다 떨어졌다. 데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미치겠군.’
그녀가 꿈을 꾸는 중이든, 아니든 이성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겨우겨우 팔을 한쪽씩 빼내고 자신의 목에 걸린 그녀의 팔을 풀었다.
“휴우.”
긴장과 설렘으로 땀이 날 지경이다.
“흐응.”
감았던 팔을 풀자 정면을 향해 누운 엘리제의 상체가 눈에 들어왔다.
“하아…….”
데몬은 탄성에 가까운 한숨을 뱉으며 자신의 눈을 가렸다. 아까는 그녀가 팔로 자신의 목을 감고 있어서 미처 그녀의 옷차림을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녀의 잠옷이 생각보다 더 아슬아슬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침대 가장자리에 있는 이불을 끌어서 그녀의 몸을 덮어주려는데, 이번엔 그녀가 데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덕분에 데몬은 조금 전 자신이 보고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던 그녀의 부드러운 몸과 완전히 맞닿게 되었다.
‘신이시여!’
자신이 사제인 미카일도 아닌데, 신을 부르고 있었다.
자조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신께서 자꾸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천천히 자신의 등 뒤로 한 손씩 손을 옮겨 엘리제의 손을 하나하나 풀었다.
그녀의 두 손을 모두 풀고 나자, 그가 이전에 바라던 대로 자신의 두 팔 아래 잠든 그녀가 갇힌 형상이 되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잠시만 들여다보고 가는 상 정도는 스스로에게 주어도 되지 않을까?
데몬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 마치 영원인 것처럼 행복했다. 살면서 이토록 충만하게 기쁘고 행복한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게 될 정도로.
평생 들여다보고만 있어도 질리지 않고 사랑스러울 것만 같은 그녀의 이마, 콧날, 코끝, 입술, 볼을 하나하나 심장에 새기고 마지막으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데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 열렸는지 모르는 금색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깨셨습니까?”
아니면 지난번처럼 잠결이신가?
“이거 꿈이에요?”
이번엔 그녀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정말 깬 모양이었다.
데몬은 한 손을 들어 엘리제의 볼을 감쌌다.
움찔!
갑자기 느껴지는 감각에 그녀가 놀란 모양이었다.
“보시다시피 꿈이 아닙니다.”
“그러네요.”
그녀의 두 볼이 발갛게 변하는 것이 데몬을 행복하게 했다.
“깨시게 하여 송구합니다.”
“벌을 받으셔야겠네요.”
‘벌이라고?’
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엘리제의 말에 데몬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그녀를 깨우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편히 잘 수 있게 몸만 돌려주려 했던 것인데 어찌하다 보니 자신이 엘리제를 몸 아래 가둔 상태에서 그녀가 잠에서 깼다.
그랬더니 벌을 주겠단다.
물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제가 잘못을 했다면 벌을 받겠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거나 싫어하게 되는 벌만 아니라면 달게 받을 자신이 있었다.
“잘못하셨죠.”
“제가 말입니까?”
“네.”
데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엘리제에게 실수한 것이 있었던가? 빠르게 기억을 되짚고 있던 찰나.
“이렇게 저를 유혹하시고 아무것도 안 하시는 잘못이요.”
“!”
데몬이 깜짝 놀라 몸을 세우려는데, 엘리제가 다시 한번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지금의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대범했다. 어쩌면 엘리제가 지금 상황을 생생한 꿈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데몬이 혼란스러운 중에 엘리제가 그를 끌어당겨 그의 목에 입을 맞추고 쭉 빨아당겼다.
“하!”
데몬의 입에서 탄성에 가까운 외마디가 절로 튀어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깜찍하고 발칙한 행동을 마치더니 엘리제가 두 팔을 스르륵 풀어 그를 놓아주었다.
“이게 벌이에요. 내 거라고 도장 찍었으니 이제 됐어.”
그러더니 안심한 듯 눈을 감고 다시 잠 속으로 빠져버렸다.
“!!”
데몬은 몸을 세우고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하아. 또 한 번의 긴 한숨이 절로 뱉어졌다.
“당했군.”
그녀의 잠버릇에 또 한 번 당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자기는 틀린 것 같다.
다시 한번 그에게 잔인하고 무척 긴 밤이 될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