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가둘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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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가둘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곳
2022.04.11.
“꿈이지만 정말 좋네요. 줄곧 이렇게 이름으로 부르고 싶었어요.”
너무나, 너무나도 사랑하는 당신의 이름을.
“꿈이니까 말해도 괜찮겠지?”
고개를 내려 잠시간 숨을 고른 엘리제가 데몬을 바라보며 얼굴을 들었다.
“하아. 당신이 너무 좋아요.”
“!!”
꿈속에서 고백한 것만으로도 엘리제의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차올랐다.
그녀 앞의 데몬은 아무런 말도 움직임도 없었다. 마치 숨마저 쉬지 않는 듯 보였다.
“역시 꿈이라서 그런가?”
반응이 없네? 엘리제 혼자 중얼거렸다.
“당신과 이곳 시에델처럼 자유로운 곳에서 함께 살면 좋을 텐데요.”
그녀가 속내를 털어놓고 있었다.
“하하! 속이 시원하다.”
어린아이처럼 웃는 모습에 데몬은 인생 최대의 인내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자신을 앞에 두고 꿈 속인 줄 알고 좋아한다 고백하는 그녀라니!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녀가 아니라,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이 더 헷갈렸다.
기쁨과 설렘, 동시에 걱정으로 데몬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밤을 새운 피로로 잠에 빠진 상황이었지만, 엘리제는 어제 각성한 직후였다.
각성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어젯밤 쓰러진 데몬이 걱정되어 긴장 속에 밤을 꼬박 새우고 나니 그녀의 몸은 수면 상태에, 정신은 각성된 상태에 이르렀다.
그래서 잠이 들자, 반대로 그녀는 마치 몽유 증세와 비슷하게 몸은 깨어 있지만 실제로는 설핏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이것을 알 리 없는 데몬은 그녀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흐으응.”
데몬을 중심으로 춤을 추듯 그녀가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러더니, 풀썩!
“!!”
순식간에 데몬의 품으로 부드럽고 연약한 그녀의 몸이 쓰러졌다. 단단한 두 팔로 깨질까 두려운 보석을 담듯 얼른 그녀를 감싸 안았다.
은빛 머리칼이 쏟아져 내려 향긋한 체향에 데몬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감은 두 눈으로 보아 그녀는 다시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하아…….”
땅이 꺼져라, 데몬은 평생을 들어 가장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수명이 반으로 줄어든 기분이다.
그녀가 자신에게는 각성제가 아닌, 그 이상의 마약인 것 같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전장(戰場)에서도, 이토록 긴장된 적은 없었으며 살면서 이토록 설렜던 순간도 없었다.
“설마 매번 잠들 때마다 이 모습인 것은 아니겠지.”
품속에서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두 붉은 눈이 걱정으로 내려앉았다.
맙소사. 그는 이제 밤마다 엘리제가 염려되어 그녀의 곁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이 방금과 같다면, 그 시간이 무척 길고도 행복할 것이 분명했다.
“하아.”
데몬의 입에서 복잡한 감정의 한숨이 다시 한번 이어졌다.
***
데몬이 엘리제의 각성제이다. 자이드는 고민에 빠졌다. 손깍지를 낀 길고 아름다운 그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분발해야겠군.”
청혼까지는 시간이 아직 남았으니, 그전에 엘리제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방법을 찾는 것이 좋겠다.
“바튼, 요즘 시에델 귀족 영애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선물 1위를 조사해 와라.”
“알아볼 것도 없이 쉬베른 목걸이입니다.”
“목걸이?”
솔깃한 내용에 자이드가 고개를 쭉 빼고 바튼을 바라보았다.
“예. 목걸이 중앙의 보석이 크고 아름다워 인기가 아주 많습니다만, 그 원석이 부족하여 수량이 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더욱 영애들이 얻고 싶어 안달이겠구나.”
귀하고 희소할수록 사람들은 열광하는 법이니.
“맞습니다. 덕분에 가격이 어마어마합니다. 거의 최고급 마차 한 대와 맞먹습니다.”
“구체적으로 잘도 알고 있구나!”
“제 약혼녀가 매일 조르는 통에 말입니다.”
목걸이는 ‘당신과 하나 되고 싶어요’, ‘당신을 유혹합니다’의 뜻을 가진 선물이다.
자이드는 자신의 의도와 딱 맞다 싶었다.
“그래, 그 목걸이가 좋겠다. 그녀에게 데뷔 축하 선물을 미리 주어야겠어. 지금 당장 가자.”
시간이 없으니 보석상을 부르는 대신, 자이드는 직접 바튼을 데리고 시내로 향했다.
***
“엘리제 님, 일어나셔서 요기라도 하셔야 해요.”
오후의 밝은 빛이 쏟아지는 창가의 커튼을 열며 마가렛이 엘리제를 깨웠다.
“이제 대공 각하께서도 완전히 몸 상태를 회복하셔서 지금 방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가렛의 말에 엘리제가 벌떡 일어났다.
“맞다! 대공 각하 괜찮으시다고?”
아직 몽롱하여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마가렛의 방금 그 말이 아니었다면,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네. 하루 앓고 나시더니 다행히 지금은 건강하셔요. 사실 오전부터 방 앞에 대기 중이세요.”
아! 데몬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오전에 꾼 꿈 때문이었다.
그녀는 달게 빠져든 잠 속에서 마치 현실처럼 생생한 꿈을 꾸었다.
자신의 방에 찾아온 멋진 데몬을 향해, 이름으로 그를 불러도 보고, 좋아한다고 고백도 해보았었다.
“꿈이었지만, 행복했다.”
“예?”
다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두근두근 떨리고 설렜다.
‘꿈이 아닌 진짜로 데몬에게 고백을 하게 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줄까?’
혹시라도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마음을 받아준다면, 아! 정말 기쁠 텐데.
하지만 자신은 아직 여전히 로안의 첩이었다. 그리고 진짜 엘리제인 것도 아니고.
그러니 어서 각성부터 완료하고 데몬에게 솔직하게 정체를 고백해야 했다.
“근데, 첫 각성을 했는데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어.”
“엘리제 님?”
조금 전부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마가렛이 물었다. 그녀가 모시는 이 아름다운 분께서 아직 잠이 덜 깨신 모양이다.
“씹기 좋으신 부드러운 음식을 만들었으니 바로 가져다드릴까요?”
“아, 응. 고마워 마가렛.”
마가렛이 음식을 가지러 방 밖으로 나갔다. 엘리제는 여전히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각성의 열쇠가 데몬인 것도 기쁘고, 그와의 입맞춤으로 첫 각성을 이룬 것도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뭐가 달라진 거야? 다음번 각성은 어떻게 해야 하지?”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이따 왕후 마마께 여쭤봐야겠다.”
엘리제는 서둘러 채비를 하였다.
“엘리제 님.”
카트를 밀며 마가렛이 들어왔다.
“자이드 왕태자님께서도 뵙고 싶다고 찾아오셨어요.”
“어?”
방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데몬부터 보고 싶은데, 왕태자까지 대기 중이란다.
“저, 그리고.”
“그리고? 누가 또 있어?”
“미로니카의 두 분 폐하께서 보내신 전령도 도착해 있습니다.”
왁! 뭐야, 오늘 단체로 약속이라도 했어? 문전성시가 따로 없네?
“찾아오신 분 누구든 잠시 기다리시면 내가 대공 각하와 함께 뵙겠다고 말씀드려줘.”
***
나는 차분히 식사 후 먼저 상의하겠다며 데몬만 방으로 들였다.
덕분에 자이드는 잠시 후에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고, 나는 데몬과 함께 미로니카의 전령을 맞이할 수 있었다.
“미로니카의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서 엘리제 님의 시에델 데뷔를 축하하시며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전령이 전해주는 커다란 박스에는 프시케 언니가 직접 고른 아름다운 파란색 드레스가 담겨 있었다. 이렇게 큰 선물 상자 처음 받아본다!
“와아!”
직접 골라서 보냈다니, 프시케 언니의 마음이 고마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엘리제. 시에델이 신성시한다는 파란색의 드레스를 보낸다. 늘 응원하고 있으마.」
짧게 쪽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어쩐지 머리가 징 울리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프시케 언니…….’
마음속으로만 언니라고 부르던 그녀가, 점점 더 친언니처럼 따뜻하게 느껴진다.
프시케 언니가 고른 드레스는 마치 요정이나 여신의 의상같이 하늘하늘하고, 날개처럼 얇고 가벼운 재질이었다.
초커 드레스 스타일로 목에 걸린 얇은 천이 어깨와 소매에 연결되어 상체의 대부분이 드러나고 비치는 드레스였다.
“예쁘다!”
“정말 예뻐요, 엘리제 님.”
내가 드레스를 들어 올려 보였다. 마가렛도 옆에서 드레스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그런데 눈앞에 선 데몬의 표정이 탐탁지 않다.
“왜…… 그러세요? 혹시 제가 입으면 별로일까요?”
“아닙니다. 분명 잘 어울리실 겁니다.”
“그런데,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요.”
나는 돌려 말하는 성격이 못 된다. 그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드레스가 예쁘긴 하단 말인데, 그럼 뭐가 문제인 거지?
‘스타일이 그의 취향이 아닌가?’
이왕이면 데몬의 마음에도 들면 좋을 텐데 싶어서 아쉬워하고 있는데 그가 조용히 마가렛에게 눈짓을 보낸다.
흠칫! 긴장한 마가렛이 얼른 데몬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시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데몬이 작게 마가렛에게 물어보는 것이 들렸다.
“엘리제 님께 상체에 걸치실 만한 숄이 있는가?”
아, 옷이 너무 얇아서 걱정되어 그런 건가? 그 말을 듣고 내가 얼른 대답했다.
“장소가 실내이니 그리 춥지 않을 거예요.”
“추우실까 봐 염려되는 것보다는.”
끙.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한 손을 들어 아예 입을 가려버렸다.
하지만, 나의 눈은 그의 귀가 빨개졌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발견했다.
‘아! 부끄러우시구나!’
쑥스럽고 부끄러우면 표정 변화 없이 귀만 빨개지는 완전 잘생긴 남자라니!
아, 이 사실을 영원히 나만 알고 있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잠시 망설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작게 떨리는 그의 음성이 미치도록 좋았다.
“상체 부분의 천이…… 지나치게 적습니다.”
“네?”
앗, 너무 귀여워서 그만 웃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지금 드레스가 살짝 야하다고, 다른 이가 보는 게 싫어 질투해 주시는 거예요?
기쁨의 웃음을 참느라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어서 이 남자가 내 남자라 외치고 싶다.’
어서 어서, 내 남자가 이렇게 잘생기고 멋진 데다가 귀엽기까지 하다고.
온 세상에 떳떳하게 자랑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
엘리제의 방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데몬은 마가렛에게 물어 확인하였다. 앓아누운 자신을 밤새 간호했던 것이 엘리제였다는 것을.
게다가 아침에 그녀 입으로 직접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비록 비몽사몽 잠결의 상태였더라도.
조금 전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나와 자신을 마주 보는 그녀의 얼굴이 분명 붉게 물들었었다. 그녀의 두 눈이 물기를 머금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데몬은 그 눈빛과 얼굴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았다.
‘그녀 역시 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니 말할 수 없이 행복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그녀의 앞에서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점점 어려웠다.
‘저 옷을 입으시고 내 앞에서 춤추시면 나는…….’
끙. 신음이 절로 나왔다.
데몬은 엘리제가 드레스를 보고 좋아하는 상황을 마냥 즐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엘리제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칠 것 같았으니까.
그 드레스는 사실 데뷔탕트나 다른 연회에서 그가 본 적이 있었을 드레스였다. 아주 파격적이고 새로운 디자인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전에는 누가 어떤 드레스를 입든 관심도 없었는데 엘리제가 입을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그 드레스가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드레스에 왜 천을 이렇게 적게 사용하는 것이지?’
화가 났다.
다른 이들이 그녀의 드러난 어깨를 고스란히 보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그나마 상체를 가렸다는 천 쪼가리는 아주 얇다 못해 그가 보기에는 투명했다.
‘다음에는 드레스를 직접 제작해서 드려야겠군.’
심각하게 고려하며 당장 이번 데뷔탕트에서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엘리제를 지킬지 고심하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감춰두고 싶구나.’
때로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집착하여 정신이 이상해지는 남성들의 이야기가 말도 안 되는 미치광이들만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사랑하는 그녀를 어디에 가두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내 품 안에 가둔다면 모를까.’
오직 그곳만이 가둘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곳이 될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그녀를 보고 헛된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해야 했다.
“마력으로 모두 눈을 멀게 할 수도 없고.”
데몬은 혼잣말을 하다 깜짝 놀랐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잔인한 생각을 하다니!
‘심각하군.’
그것 역시 안 될 일이었다. 데몬이 이성을 되찾아갔다.
‘그렇다면 연회장의 모든 불을 꺼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