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몸으로 하는 모든 것
(44/126)
44. 몸으로 하는 모든 것
(44/126)
44. 몸으로 하는 모든 것
2022.04.04.
데몬은 자신의 배필로 이미 마음속으로 정한 사람이다. 대공의 마음을 얻는 것이 먼저였으나, 루시아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미로니카 황국에 정식 요청을 보내고, 국가 간의 이익을 앞세워 대공과 자신의 결혼을 진행하는 방법도 염두에 두고 있을 정도로.
‘세상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분인데, 다른 이가 채어가게 두고 볼 수는 없지.’
설령 그 상대가 새언니가 될 사람이라 할지라도.
루시아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방법을 찾아야만 해!’
좋은 수가 없을까? 초조함에 쥐었던 손을 풀어 손톱을 물어뜯었다.
데뷔탕트의 정점은 화려한 꽃들이 주는 춤.
그렇다면 그 춤을 좀 못 추면 되지 않을까?
‘새언니가 살짝만 실수해주면 될 것 같은데.’
어느새 루시아는 엘리제를 자이드의 짝으로 이미 정하고, 새언니라 생각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이성을 향한 불꽃같은 풋사랑이, 역시 처음으로 겪는 질투를 만나 잘못된 방향으로 공주를 이끌었다.
유혹이 강한 곳에는 예정된 파멸과 누군가의 희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엘리제 언니의 희생이 좋겠어.”
하지만 가끔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되레 누군가를 돕게 될 수도 있음을 아직 공주는 알지 못했다.
***
탁탁탁!
“다시!”
손바닥 위로 쥘부채를 내려치며 박자를 맞춰주던 그레이스가 음악을 끊으며 외쳤다.
“자, 턴 들어가기 직전까지 처음부터 다시 해보죠. 원투 쓰리, 원투 쓰리.”
눈앞에 지상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나풀거리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춤에 소질이 1도 없어 보였다.
‘아니, 사람이 이 정도로 몸이 둔할 수도 있는 건가?’
빨라진 일정에 맞추기 위해 기본기 연습을 마치고 동작들을 연결하는 수업을 시작하자, 엘리제가 진도를 전혀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가르쳤는데 어떻게 박자와 동작, 동선과 시선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지?’
태어나면서부터 춤에 소질을 보였던 그레이스에게 엘리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난제였다.
“헉헉.”
엘리제가 땀에 흠뻑 젖은 채 두 팔과 다리를 덜덜 떨며 동작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나 솔직히 헛수고였다. 몇 번 더 그레이스가 ‘다시’를 외친 후에야 휴식 시간이 돌아왔다.
“잠깐만 쉴까요?”
부드럽게 웃으며 엘리제에게 휴식을 권하고 있었지만 사실 데뷔탕트 날짜에 맞춰 엘리제가 춤동작을 모두 배울 수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레이스는 머리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엘리제는 다리에 쥐가 나고 있었다.
“앗! 아야.”
마가렛이 얼른 달려와 엘리제의 다리를 주무르며 풀어주었다.
‘힝.’
일정이 앞당겨지자마자 갑자기 스파르타식으로 변한 춤 수업에 그녀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
인자한 그레이스는 춤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눈빛이 달라졌다.
‘호랑이 선생님이 되셨어!’
엘리제는 그녀 앞에 놓인 먹잇감에 불과했다. 몸치 박치인 먹잇감.
왕후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쥘부채를 들고 음악만 들리면 전혀 봐주지 않는 엄한 선생님으로 변했다.
엘리제의 모습을 루시아가 보았더라면 그녀의 맹렬한 질투가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안도했을 터인데, 아쉽게도 루시아는 이곳에 없었다.
그 사실을 전혀 알 리 없는 엘리제는 갑자기 자신의 자유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하아. 데뷔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어.’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생존도, 춤도, 애첩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도, 고백도, 이제 데뷔까지!
맘대로 할 수 없고, 뜻대로 되지도 않는다니.
‘에이씨!’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그때.
탁탁!
“충분히 쉬셨나요? 엘리제 님. 자, 준비!”
때마침 그레이스가 휴식 시간의 끝을 알렸다.
‘벌써??’
다리의 쥐를 마가렛의 찜질로 풀자마자 잔혹한 춤 선생님의 단호한 외침이 떨어졌다.
‘내가 해내고 만다!’
엘리제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연회 홀 입구에는 엘리제를 기다리는 데몬이 있었다. 문이 열리더니 마가렛이 물주머니를 들고 복도로 나왔다.
“또 쥐가 나셨나?”
“네. 벌써 열 번도 넘게요. 그런데 다시 또 수업을 시작하셨어요.”
걱정되는 목소리로 대답을 마치고 마가렛이 물주머니에 새로 넣을 얼음을 가지러 갔다.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
데몬은 혼자 생각하며 연회 홀로 들어가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연약한 근육이 놀라서 계속해서 쥐가 나는데도, 그녀와 시에델의 왕후는 밤늦도록 춤 연습을 강행하고 있었다.
‘그냥 기본 동작과 동선을 이해하고만 있어도, 나머지는…….’
자신이 리드하면 되니 저리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말이다. 본래 몸으로 하는 모든 것에 데몬은 자신이 있었다.
경기든, 전투든, 검술이든, 춤이든 몸으로 하는 그 모든 것을 그는 월등히 잘했다.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을.
하지만 엘리제에게 자신이 잘하니 걱정하지 말고 쉬엄쉬엄하라고 말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그녀의 춤 수업이 끝나길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시면 다리라도 풀어드려야겠군.’
한참을 더 기다리고 밤이 완전히 깊어졌을 때 엘리제가 녹초가 되어 홀에서 나왔다.
***
데몬은 엘리제를 방까지 데려다주고 그녀의 다리도 풀어준 후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안마하다 발목에 걸린 발찌를 발견하여 그는 매우 뿌듯하고 기쁜 상태였다.
‘발찌를 받아주신 것도 고맙고, 고민까지 풀어주셨으니 선물을 하나 더 드려야겠다.’
시에델에 도착한 이후 급속도로 상승하는 마력 때문에 폭주가 일어날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늘 생각지 않게 엘리제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그녀가 먼저 입맞춤을 해오다니.’
다시 생각해도 감격스러웠다. 설사 그녀의 호감이 담긴 것이 아닌, 각성을 위한 실험이었을지라도 기뻤다.
그녀와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 근처가 간질간질하고 뜨거워졌다.
온몸이 기쁨과 황홀감을 외치는 느낌. 입 맞추는 순간의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이토록 본능에 충실한 자인 줄 미처 몰랐다. 엘리제가 원하는 것이 달성된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솔직히 그녀에게 깊은 입맞춤을 한 것은 순전히 제 욕심이었다.
‘나를 밀어내지 않으신 것이 다행이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엘리제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겁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을 것만 기분이 들었다.
“미쳤군.”
자신답지 않게 전혀 이성적이지 못하고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깊이 빠져서 이성이 흐려질 정도의 상태라는 뜻이리라.
그녀가 자신에게 작은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 입맞춤이었지만 그래도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입맞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빠져나갈 출구는 없어 보였다.
엘리제에게 갇혔다.
‘그녀에게 이제 나를 조심하라고 미리 이야기라도 해줘야 할까?’
그녀와의 접촉에는 이상하리만큼 짐승으로 변하는 것 같다.
‘아니, 사실 이미 마음은 짐승이지. 어쩌면 이게 솔직한 내 모습일지도.’
그런데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짐승이 되어가는 것인지, 그녀와의 입맞춤을 떠올려서인지 몸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다. 조금씩 현기증이 나며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릴 적 급상승되는 마력을 감당하지 못해 폭주가 일어나기 직전, 고열과 함께 앓아누웠었다. 자신이 아플 때는 늘 자신을 간호해주시던 어머니가 곁에 계셨다.
그날, 자신의 고열이 폭주의 예고인 줄도 모르고 자신을 간호하던 어머니를, 갑자기 개방된 마력이 덮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마력은 안정되어 있었으나, 어머니가 위독한 상태였다.
데몬의 아버지가 미쳐버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단 한 번도 열이 나거나 아파본 적이 없었다.
다만 폭주하여 주변을 파괴하고 생명을 잃게 했을 뿐.
분명 엘리제의 입맞춤 덕분에 마력은 안정된 상태였다. 그러니 폭주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몸이 왜 이런 것이지?”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 것 같으니 아무래도 미리 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딸랑.
귀빈실에 마련된 설렁줄을 당겨서 시에델 왕궁의 시종을 불렀다. 마침 근처에 있던 바튼이 시종 대신 데몬의 방에 들어왔다.
“대공 각하,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하, 의원을 불러줄 수 있는가?”
“아니, 각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헉헉. 데몬은 간신히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설렁줄 아래 침대 난간에 몸을 기댄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건장하던 남성이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고 곧 쓰러질 듯한 모습인지라, 바튼은 매우 놀라 바로 왕태자와 의원을 찾았다.
“전하! 바로 와주셔야겠습니다. 귀빈이신 대공 각하께서 위독해 보이십니다!”
“뭐라고??”
루시아와 데뷔탕트 관련하여 상의 중이었던 자이드는 깜짝 놀라 바튼의 뒤를 따랐다. 함께 있던 루시아도 그를 쫓았다. 그녀의 얼굴이 이미 걱정으로 창백했다.
벌컥.
데몬의 방에 자이드 일행과 의원이 들이닥쳤다. 의원은 먼저 데몬을 편한 자리에 눕히고 진찰을 위해 그의 옷가지를 벗겼다.
“어, 어머나!”
걱정되어 따라 들어왔던 루시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의원의 청진기가 데몬의 상의를 풀어 헤치고 맨살 위를 더듬었다.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네.”
자이드가 의원에게 말했다.
데몬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향기가 그에게 일어난 일을 알려주고 있었다.
치명적이고 달콤한 장미 향이 침대 주변에서 강하게 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튼이 자이드에게 물었다.
“…….”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공께서는 지금 강력한 정령의 힘에 노출된 것일 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바튼도, 루시아도 그제야 데몬의 근처에서 느껴지는 장미 향을 눈치챘다.
“하지만 대공 각하께는 정령의 힘이 없으실 텐데요?”
루시아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자이드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크레미언 대공께는 정령의 힘이 없지. 그러니 정령의 힘이 강한 누군가와 있다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정도로 강한 정령의 힘을 가진 사람이 지금 왕국에 있단 말씀이십니까?”
바튼이 놀라서 물었다.
황국 최고 마력을 가진 크레미언 대공을 단숨에 앓아눕도록 만들 만큼 강력한 날것의 정령의 힘. 그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을 만한 사람.
“이 세계에 단 한 사람 있지.”
엘리제.
“그녀가 각성을 시작한 모양이군.”
***
데몬이 앓아누운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그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물든 두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하루 전 눈을 감기 전보다 훨씬 더 붉고 짙은 빛이었다.
뿌옇게 시야가 흐려서 아직 온전히 앞이 보이질 않았다. 누군가 밤새 그의 곁에서 자신을 정성 들여 간호하는 것이 간간이 느껴졌었다.
‘엘리제 님?’
그녀이길 바랐다. 어서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침대맡에 앉은 사람의 손목을 잡아챘다.
“앗!”
목소리가 그녀가 아니다!
데몬이 놀라 얼른 손을 놓았다.
“일어나셨어요?”
차차 시야가 밝아지며 데몬 앞의 여인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