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깨금발을 든 엘리제2022.03.28.
평소보다 한껏 멋을 내어 꾸몄다. 자신의 시녀와 귀부인들이 오늘 루시아의 아름다움이 시에델 제일일 것이라 칭송해주었다. 루시아는 데몬 앞에서 어깨를 더욱 활짝 폈다.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이 한껏 부풀었었다. 자신이 마음에 둔 이가 그동안에 없어서 그렇지, 이미 루시아의 아름다움에 상사병에 걸린 귀족 영식이 수두룩했다.
‘대공 각하께서도 날 좋아하시게 될 거야!’
나는 하나뿐인 왕국의 공주니까. 나는 아름다우니까.
‘나는 엘리제보다도 어리니까.’
그러나 루시아의 부름에 크레미언 대공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아주 찰나의 마주침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저 고개를 내리고 예의를 갖춰 인사만 할 뿐이었다. 데몬이 인사 후에 몸을 뒤로 물리자, 문 옆에 서 있던 그레이스의 시종이 루시아에게 다가왔다.
“공주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데몬의 시선은 여전히 공주가 아니라 왕후 방의 문이었다.
‘뭐지?’
이국의 공주인 내가 어려워서인가? 아니면 이성과 눈을 마주하고 보기가 민망한 건가? 그래, 그래서겠지?
‘하지만 엘리제 님을 바라보실 때는 잘만 보시던걸…….’
속이 확 상했다. 그에게 관심이 있어 온 것이지만 자존심이 상해 더는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어마마마를 뵈러 왔다.”
“안에 엘리제 님이 계십니다.”
왕후의 시종이 루시아에게 대답을 전했다.
“공주마마께서 오셨다고 말씀 올릴까요?”
흥! 기분이 이미 상한 루시아가 몸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됐다. 이따 다시 오마.”
그리고 데몬에게 저도 인사만 다시 전하고 방으로 돌아왔었다. 그때를 다시 생각만 해도 속이 상해서 울컥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후 앞이니 그런 티를 낼 수가 없었다. 루시아를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눈이 갸름해졌다.
“우리 공주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고민이 무엇일까?”
“제가 마음을 잘 다스려보겠습니다.”
루시아는 일부러 어른스러운 답을 골랐다. 그게 어머니가 좋아하는 답일 테니까.
“루시아, 힘든 일이 있으면 꼭 어미와 상의해다오.”
그레이스는 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루시아의 기분이 별로인 듯하니, 엘리제와 데뷔탕트 이후에 가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말해주어야겠구나.’
*** 아침 단장과 식사를 마치고 데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는 왕후 마마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바로 뒤에서 나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왕궁 복도가 아니라 마치 떠 있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 복도가 끝없이 펼쳐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벌써 목적지가 보였다. 아쉽긴 하지만 이따 돌아갈 때도 그가 바래다줄 것이니 수업 잘 듣고 와야지! 절로 학구열에 불타올랐다. 오늘은 시에델의 역사에 대해 배우는 날이었다. 자연스레 정령의 힘을 여는 단계 ‘각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안 그래도 궁금했던 것을 왕후 마마께 질문했다.
“제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이 세상에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무엇인지 감을 잡았는데, 당최 각성하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왕후 마마처럼 긴박한 상황이 갑자기 펼쳐져야만 하는 것인지, ‘열려라 참깨’ 처럼 ‘각성아 되어라’ 주문이라도 외워야 하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조바심이 났다.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김빠지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렇기에 모든 것을 다 시도해 봐야 합니다.”
아, 역시.
‘일단 도전해 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각오는 하고 있었다. 첫 번째 각성을 이루기 전까지 그래서 왕후 마마도 무척 오래 걸린 거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난 시간이 없으니 정말 닥치는 대로 해볼 생각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각성할수록 그 방법에 대한 감이 올 거라고 하니 하다 보면 차차 알게 되지 않을까?
‘뭐 이렇게 어려운 레벨업이 있담?’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며 무엇부터 시도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역시 제일 확실해 보이는 것부터 시도해 보자! 수업을 마칠 때 즈음엔 방법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용기가 필요했다. 왕후 마마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방을 나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는데, 바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데몬이 온통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앗!’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순식간에 온몸에 열기가 돌고 기운이 난다. 안 그래도 머릿속과 마음속이 그로 가득한데, 그가 나를 기다리며 문 앞에 서 있으니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반가움과 설렘이 마구 섞여서 복잡한 가운데,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맞다! 나 좋아하는 티 다 나는데!’
마주친 시선을 떨어뜨리며 얼른 고개를 숙여 발걸음을 옮겼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제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도 저는 좋습니다.”
이렇게 치고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제 방으로 돌아가려 해요.”
부끄러움에 얼른 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따르겠습니다.”
그가 내 바로 뒤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따르는 것이 느껴지는 것뿐인데도 설레어 심장이 살려달라며 마구 쿵쾅댔다.
‘가슴 떨려 죽겠어.’
고백을 듣고 난 후로,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그냥 마구 대책 없이 뛰었다.
“수업 잘 마치고 오셨어요? 고생하셨어요!”
방에 도착하자, 마가렛이 우리 두 사람을 반겼다. 마가렛을 보자 떨리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었다.
“엘리제 님. 오늘 오후에 시에델 산책은 어떠세요?”
마가렛의 물음에 뒤를 따르던 데몬도 대답했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하긴 그러네. 시에델에 와서 아직 제대로 구경도 못 다녔구나.”
내 대답을 듣더니 마가렛이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자이드 왕태자 전하께서 보좌관을 보내셔서, 왕궁 산책을 시켜주시겠다며 언제가 편하신지 알려달라 하셨어요.”
듣자마자 데몬의 눈이 단번에 가늘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하지만, 난 왜 이리 좋지?’
그가 질투하는 표정이라니! 흐흐흐. 흘러나오는 웃음을 꾸욱 참았다. 데몬이 날 위해 질투를 느낀다니, 기분이 날아갈 만큼 기뻤다! 그만큼 날 좋아한다는 의미일 테니까.
‘아니지. 좋아한다도 아니고 연모한다고 하셨지, 암.’
마음이 흡족하여 고개를 끄덕이자, 자이드의 산책 요청을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한 데몬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와! 이런 표정은 처음 봐!’
데몬의 질투하는 표정도 정말 흔치 않은데 놀라서 입을 벌린 표정이라니, 이건 완전 귀하다! 사진기가 없으니 대신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 각인시켜 놔야겠다 싶어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그와의 산책에 응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쩐지 무시무시한 음성이다. 하지만, 나는 그마저도 좋았다. 나를 위해 질투하고 조바심 난 데몬이라니 상상 이상으로 짜릿하다!
“그럴 리가요.”
놀리는 건 이쯤에서 마쳐야겠다.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옆에서 마가렛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대공 각하와 마가렛과 갈 거예요. 왕후 마마가 내주신 숙제도 할 겸 같이 가요.”
그제야 데몬은 편안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순간 아주 찰나지만 미소를 본 듯도 하고? *** 자이드는 엘리제의 데뷔에 맞춰 그녀에게 청혼하기 위해 왕 페르만과 준비하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데뷔와 새 신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서류와 절차가 필요했다. 그녀를 보러 가고, 시에델을 구경시켜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으나 거사를 위해 참고 있었다. 자신의 결혼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바삐 일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심부름을 보냈던 바튼이 돌아와 속삭였다.
“전하, 엘리제 님으로부터 산책은 다음에 함께 하시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래, 알겠다.”
“서운하지 않으십니까?”
“서운하긴. 지금 잠시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도록 놔두자.”
곧 내 아내가 될 것이니. 자이드는 여유 있는 표정을 지었다. 모후와의 대화 후에는 더 마음이 편해졌다. 그레이스는 엘리제가 분명 각성에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엘리제 역시 자신과 같은 특별함이 있다며 자세한 말은 아꼈지만, 어쨌든 태어날 때부터 시에델의 왕자였던 자이드와는 다르다고 했다. 그러니, 걱정을 덜고 이제 그녀의 각성을 기대하며 자신은 그저 그녀를 배필로 맞이할 날만 준비하고 있으면 될 것이었다.
“엘리제에게 청혼할 때 쓸 반지나 준비해다오.”
“예. 몇 가지 후보를 골라서 올리겠습니다.”
자신 있는 모습의 왕태자의 뒤를 따르며 바튼도 함께 바삐 움직였다. ***
“아까 이곳 하녀들에게 왕궁 근처에 가볼 만한 곳을 알려달라 했었는데요.”
마가렛은 정말 여러모로 유능한 시녀였다. 벌써 근처 바람 쐬기 좋은 곳을 알아놓은 모양이었다.
“점심 드신 후에 함께 가보시겠어요?”
시에델의 왕가는 그녀에게 그 무엇도 강요하거나 제약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엘리제는 그레이스와의 수업이 끝나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자. 대공 각하께서는 어떠세요?”
엘리제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데몬에게 물었다. 제 귀에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근두근 뛰던 심장이 곧 있을 데이트에 다그닥다그닥 말 달리듯 뛴다!
“저 역시 좋습니다. 가시는 곳 어디든 호위해드리겠습니다.”
말은 호위이지만, 함께 있고 싶다는 의미겠지?
“그럼 식사 마치고 잠시만 준비할 시간을 주시면 좋겠는데요.”
데몬의 마음을 알게 된 후 첫 데이트나 다름없는데 당연히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에 오겠습니다.”
그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잠시 후 늦은 오후. 세 사람이 가볍게 산책을 나섰다. 시에델 왕궁에서 보내주는 호위 기사들은 정중히 사양하여 물렸다. 시에델은 너른 벌판과 산이 많았다. 그 속에 궁전도, 민가도 조화롭게 어울려 있었다.
‘마치 현실 속에서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 같네.’
엘리제는 사진이나 영상 속에서만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실제 눈앞에 펼쳐지자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자신이 있다니,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고마운 마가렛과, 그리고…….’
데몬과도 함께였다. 흐드러지게 핀 하얀 이름 모를 꽃들이 마치 보석을 뿌려놓은 듯 아름다웠다. 푸르른 초록 물결 위로 눈송이들을 흩어트려 놓은 듯도 했다.
“너무 아름답다!”
데몬 역시 같은 생각을 하며 엘리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름다운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이 순간 이 아름다운 곳에 있는 그녀를, 자신이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엘리제의 은빛 머릿결과 가벼운 옷들이 바람에 날렸다.
“잠시 엘리제 님 방에 가서 겉옷을 가져오겠습니다.”
마가렛이 자리를 비웠다. 크게 쌀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곧 해가 질 것이었다. 데몬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 덕에 엘리제와 데몬의 몸이 지척이었다. 엘리제가 갑자기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붉은 두 눈을 바라보며, 데몬에게 물었다.
“저, 해야 할 숙제가 있는데요. 제 부탁 좀 들어주시겠어요?”
아까도 그레이스에게 받은 숙제가 있다더니, 뭔가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부탁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못 들어줄까. 데몬은 이 순간 그녀와 단둘이 함께라는 것과 제게 부탁을 하고 있다는 그 모두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무엇이십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쪽!
“!”
깨금발을 든 엘리제가 그의 팔을 잡고 뛰어올라 그의 입술에 짧게 입맞춤을 했다. 데몬의 붉은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