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그 남자의 직진2022.03.24.
“연모합니다, 엘리제 님.”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엘리제의 두 눈이 최대로 커졌다.
‘뭐, 뭐라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조차 안 된다. 찰랑! 소리와 함께 그가 잡은 내 발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미칠 듯이 일렁이는 붉은 눈이 강렬했다. 감각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꿈이 아니야! 몽롱하게 흐려진 내 눈앞에 그의 얼굴이 다시 한번 서서히 들어왔다. 그 잘생긴 얼굴 아래, 믿음직스러운 넓은 어깨와 다부진 몸이 이어졌다.
“제 마음은 이미 정하였습니다. 이후 엘리제 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셔도 따를 것입니다.”
그 말을 하며 어느새 꺼내었는지 셀 수 없이 많은 보석이 박힌 발찌를 내 발목에 걸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의 입술이 다시 또 열렸다. 다시금 확인하듯 천천히 그가 말했다.
“연모하고 있습니다.”
맙소사. 프시케가 아니라 정말 나를 사랑한다고? 데몬이?
“말, 말도 안 돼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며 나갔다.
“아직 온전히 첩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당신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나를 잃는다고?’
“저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저 곁에서 지켜 드리겠습니다. 혹 그것도 안 되겠습니까.”
아, 아니. 그게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저, 저는 아직…….”
내 정체에 대해 말도 못 했는데!
“제 마음이 부담되신다면.”
“그, 그래서가 아니에요!”
기쁜데 당황스럽다. 너무 좋은데 괴롭다! 그의 마음이 나를 향하면 마냥 행복하고 기쁠 줄 알았는데. 동시에 드는 양가감정이 미칠 듯이 나를 괴롭혔다.
‘두려워!’
그게 가장 컸다.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내가 ‘엘리제’이기 때문이면? 나중에 진짜 엘리제가 아닌 나를 그가 떠나면, 나는, 나는.
‘차라리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몰라!’
갑자기 뜨거워지더니 커다란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
놀란 데몬이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의 이유가, 제 마음 때문입니까?”
“아, 아니에요.”
목이 메어 겨우 대답을 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가득했던 눈물이 기어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렇다면 무리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나중에……”
엘리제의 말에 그가 귀를 기울였다.
“제가 용기가 나면 그때 꼭 말씀드릴게요.”
***
‘기뻐하는 듯하면서도 두려워하시는 것 같다.’
그의 고백을 받고 엘리제의 표정에 몇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떠올랐다. 데몬은 그 모습을 모두 놓치지 않고 자신의 눈에 담았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르는 순간에 이어, 이제는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확실해졌다. 그녀를 원했다. 자신의 마음을 모른 척하려야 모를 수가 없을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는 마음을 정하면 앞을 향해 달리는 것 외엔 생각하지 않는 성정이다. 그것은 연심(戀心)에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엘리제는 그에게 있어 첫 연심의 대상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 마음의 열기가 한여름과 같았다. 그런데, 그토록 그가 연모하는 이 아름다운 이를. 이토록 가엽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만드는 일이 무엇일까! 그 걱정이 무엇이든, 자신이 해결해주고 이해해주고 덮어주고 감싸 안아서 그녀를 힘들지 않게, 슬프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황국이 아닌, 이곳까지 왔으니 조금은 마음을 더 표현해도 되는 것 아닐까.’
엘리제의 눈물에는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고 조급해졌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게 하고, 행복한 표정만 짓게 해주고 싶다.
“말씀해주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아주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 제게 털어놓아 주십시오.”
그가 또렷하게 엘리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또르르 그녀의 눈에서 다시 한번 눈물이 떨어졌다. 동시에 그의 마음도 함께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다. 데몬은 강렬한 충동과 싸우는 중이었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그녀의 눈물 자국 위에 입맞춤으로 위로와 평안을 전해주고 싶은 충동. 자신의 입으로 뱉고 나니, 더욱 확실하게 알겠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그것도 한참 전부터, 생각보다 아주 깊이. *** 엘리제에게 데뷔탕트 참가 의사를 받은 시에델의 왕후 그레이스는 곧바로 미로니카 황제와 황후에게 공식 서신을 전달했다. 「사랑스러운 엘리제의 기억을 되찾아주려는 과정을 통해 같은 어려움을 겪은 이로 많은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엘리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본후의 양녀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자애로운 왕후와 왕가가 있을까! 미로니카 황제 로안은 입이 귀에 걸렸다. 왕후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엘리제는 시에델의 귀족을 넘어 무려 왕족이 되는 셈이었다. 이웃 나라 왕족이 된 엘리제를 자신이 황비로 맞는다면, 그의 위상이 더욱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앞으로 시에델과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질 것이고.
‘그렇다면 고갈 직전인 정령석의 문제도 절로 해결이 될 테지. 엘리제가 신의 선물이구나!’
“당장 답신을 써줄 터이니 바로 전해드려라.”
로안은 망설임 없이 엘리제의 시에델 데뷔를 허락하는 답을 작성하였다. 자신이 시에델만의 문화적 폐쇄성을 놓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른 채로. 조금의 지체 후에 미로니카 황실의 전령이 시에델로 답신을 들고 출발하였다. *** 믿어지지 않는 고백을 들은 데다가, 울기까지 하고 나니 정신이 멍했다. 내가 족욕을 마치고 나오니, 그 사이 마가렛이 준비한 식사를 서빙 카트에 담아 들어왔다. 데몬이 식사 후 편히 쉬시라 말하고 방을 나가 주었다. 어떻게, 어떤 표정으로 그가 방을 나갔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멍하고 뜨거웠다.
“엘리제 님, 이것부터 드셔보셔요.”
눈도 코도 빨간 나를 보더니 마가렛이 음식을 떠서 입안에 쑥 밀어 넣었다.
“움? 맛, 맛있어!”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가 배를 채우자, 조금씩 현실감이 느껴지고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새삼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 고백받았어!’
그것도, 데몬에게! 그도 날 사랑하고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물론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지만, 갑자기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기분이 널을 뛰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하늘을 나는 듯이 기분이 솟구쳤다가, 빙의자인 내 정체를 알고 그의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을까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땅으로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더 밑으로 꺼져서 지옥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그렇게 아리고 아플 수가 없었다. 내 심정이 복잡한 것을 느꼈는지 마가렛이 조심히 나를 불렀다.
“괜찮으세요?”
“응. 나 고백받았어.”
“네? 어느 분께요?”
마가렛도 표정에 다 드러나는구나. 아직 시에델에서 데뷔를 치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누군가 엘리제 님께 반해버린 건가? 하는 표정이네.
“대공 각하께.”
“!”
마가렛이 튀어나올 듯한 눈을 하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생각도 못 했어요!”
“나도.”
바란 적이야 많지. 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들으니 실감이 안 나.”
“축하드려요, 엘리제 님.”
마가렛이 울먹이며 나 대신 얼굴이 붉어졌다.
“나도 감동해서 울었어.”
물론 감동만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축하해주는 마가렛을 실망시키기 싫었다.
“앞으로도 두 분 많이 도와드릴게요.”
“고마워.”
마가렛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녀도 따뜻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내가 도와줘야지.
‘내가 겪고 있는 이런 두려움은 없는 사랑을.’
고백을 받고 보니,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소설 속에서 나는 내가 생존을 가장 우선으로 여긴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죽으면 죽는 거다. 황궁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곁에서 갇혀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겪어보니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버림받는 것. 그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고통과 두려움이, 죽음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컸다. 나로 하여금 이 세계를 살아가도록 하는 힘, 내가 이곳에 있는 의미. 나는 그게 생존인 줄 알았는데. 생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한결 가벼웠다. 오전에는 왕후 마마께 배우는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침대를 내려오려는데 발목에서 서늘한 감촉과 함께 차라랑 금속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데몬이 어제 고백을 하며 내 발목에 걸어주었던 발찌였다.
‘아! 맞아, 어쩐지 지쳐서 기절하듯 잠들었는데 선물을 받았었지?’
다시금 그의 목소리와 눈빛이 떠올라 가슴을 울리고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런데, 왜 발찌를 준 걸까? 혹시 숨겨진 의미가 있나?
“일어나셨어요? 아침 단장을 도와드릴게요!”
오늘은 더 예쁘게 꾸며주겠다며 마가렛이 방긋 웃어 보였다.
“마가렛, 미로니카에서 이성에게 주는 선물에 특별한 의미들이 있을까?”
“드릴 선물 고르시게요?”
“음, 일단 참고만 하려고.”
“기본적으로 호감은 꽃과 편지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요. 반지는 보통 결혼이나 사랑을 약속할 때, 팔찌는 의미 있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경우가 많아요. 아! 목걸이는 유혹의 의미가 있고요.”
“그럼 혹시 발찌는?”
“발찌요? 팔찌가 아니라, 발찌요?”
“응.”
“발찌는 흔치 않은데…….”
“흔치 않은데 의미는 알아?”
“네. 혹시 발찌 선물을 받으신 거예요?”
어맛, 우리 마가렛 눈치도 빠르지.
“맞아.”
“발찌는 넌 내 것이니 도망 못 간다는 의미예요.”
“뭣?”
힉! 설마, 데몬이 의미를 알고 발찌를 고른 것은 아니겠지? 점잖으신 대공께서 그랬을 리는 없을 것 같아.
“그 의미보다, 배려심 많은 상대라면 어쩌면 의미 있으면서도 남들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는 발찌를 고른 것이 아닐까요?”
마가렛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잘 띄지 않는다고?”
“네. 여성의 드레스 아래에 보통 발목이 가려지잖아요.”
“아!”
마가렛의 설명에 시야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일부러 그런 선물을 준 것인가 보구나!’
잘 보이지 않으니까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어제 말한 대로 마치 자신도 그렇게 있어 주겠다는 의미 같잖아. 역시 안 빼야겠다.
“오늘도 긴 드레스 부탁해 마가렛.”
그의 앞에서만 살짝 드레스를 들어 올려야지! ***
“신부수업은 잘 받고 있니?”
찻잔을 내려놓으며 왕후 그레이스가 루시아 공주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함께 아침 식사 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예, 어마마마.”
“듣자 하니, 자수 수업이 좀 어려운 모양이지? 집중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자수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는 이가 어려운 것이었다. 데몬은 루시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것이 아니라, 생각할 것이 좀 있었어요.”
그가 보고 싶어 어제 무턱대고 데몬을 찾아갔었다. 그는 이미 엘리제를 따라 자리를 옮긴 후라고 했다. 소식을 듣고 도착한 곳은 모후의 방 앞이었다. 안에서 그레이스와 대화 중인 엘리제를 기다리며 데몬이 방 앞에 대기 중이었다. 멀리서 다시 보아도 황홀하게 멋진 그의 모습에 루시아는 떨리는 마음을 한참 진정시켰다. 그러고는.
“저, 실례지만…….”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사락사락 드레스 소리를 내며 그에게 한 걸음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