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너무 잘하시네요2022.03.21.
‘나의 답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였으나 어쩐지 자신의 답을 알 것도 같았다.
“아직 답을 모르시니 이 세계에 대해 배워가며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 찾으시라 조언했던 겁니다.”
그레이스는 엘리제가 아직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언지 몰라서 대답을 못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권했다. 시에델에 머물며 세상을 접하고 더불어 자신의 아들도 만나보라고.
‘그러다 자이드에게 흥미가 생긴다면 더 좋고.’
그레이스가 엘리제를 바라보고 웃었다. 그녀가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이곳을 벗어나기 힘들어질 것이다. 정령의 힘이란 그런 것이니까.
‘정령의 힘을 사용하게 되는 순간, 시에델을 떠날 수 없겠지.’
엘리제가 각성하고, 정령의 힘을 온전히 얻을 수 있게 그들이 기다리고 도우면 될 일이었다. 모든 일은 순조롭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내일부터 수업을 시작할까요? 데뷔탕트도 준비하시고요.”
그레이스가 웃으며 말했다. 엘리제가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은 일단 왕후 마마의 말대로 해보자. 각성하게 될 때까지.’
“좋아요.”
성큼, 그들의 품 안으로 엘리제가 한 걸음 들어왔다.
***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데몬이 기다리고 있던 은백색의 아름다운 그녀가 빛처럼 쏟아져 나왔다.
“다녀…… 왔어요.”
어찌 된 일인지, 데몬을 바라보더니 그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당황한 데몬이 얼른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쌌다. 갑자기 몸이라도 안 좋아진 것인가?
“괜찮으십니까?”
아니면, 안에서 들은 이야기가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나?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그가 엘리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 아녜요. 괜찮아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머릿속과 마음이 무거웠다. 그레이스 왕후는 엘리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이드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데몬에게도 다 말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진짜 엘리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데몬이 날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 어쩌지?’
자신에게 무관심한 데몬이라니,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직 말 못 하겠어.’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말을 아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데몬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순간, 자신의 영혼은 산산조각으로 부수어질 것이 분명했다. *** 엘리제의 방으로 함께 들어온 데몬은 그녀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시에델이 정령의 나라인 것, 그녀가 정령의 힘을 가진 존재인 것과 그 힘이 각성으로 열릴 거라는 것을.
“왕후 마마 말로는 그 시작이 지난번 고열이었다고 하셨어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네?”
엘리제는 진심으로 놀랐다.
“정령의 힘이 열리는 고비를 감당하지 못한 이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세 사람이 내가 쓰러졌을 때 그토록 전전긍긍했던 거구나!’
새삼 감격스러웠다.
“제게 힘이 있다는 걸 언제부터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나도 모르는 비밀을? 그런데 잘생긴 그의 귀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은 변화가 없는데! 귀만 빨개지셨어! 와, 이거 왜 이렇게 귀여워?!
“당신께 정령석과 같은 달콤한 장미 향이 납니다. 키스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데몬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키스라고?’
나도 함께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그런데 문득!
‘아? 이거 어디서 들어본 말인데!’
“설마, 자이드 왕태자 전하도?”
“아마 정령의 힘을 느끼는 것으로 보아, 같은 정령의 힘을 가진 이거나 마력을 가진 이 같습니다.”
“아! 왕후 마마께서도 저를 양녀 삼고 싶다며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데몬은 적지 않게 놀랐다. 양녀라고? 자이드의 짝으로 엘리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왕후 마마께서 직접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네. 모든 이가 그 힘을 갖는 것은 아니라서 제가 마치 가족처럼 생각되신대요. 왕족에게 그 힘이 내려오는데 왕족이어도 정령의 힘이 없는 사람이 더 많댔어요. 루시아 공주처럼.”
“!”
순간, 데몬은 시에델이 폐쇄적인 국가라 평가받게 된 이유를 상기시켰다. 외부와 교류가 없는 나라.
‘설마…….’
시에델은 정령의 힘이 곧 권력인 나라다. 오랜 세월 왕가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결혼 방식 역시 폐쇄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
“이번 데뷔탕트 후에 엘리제에게 청혼할 생각이다.”
자이드의 말에 바튼의 입이 턱 벌어졌다.
“이렇게 빨리요?”
“미로니카의 황제가 눈치채기 전에 진행해야지. 빠를수록 좋아.”
“왕후께는 어찌 말씀드리려고요?”
“이미 말씀드렸고, 허락도 받았어.”
“네?”
바튼은 또 놀랐다. 자이드가 여러 여성을 만나오며 어떤 연애를 해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바튼이었다. 이렇게 자이드가 빨리 한 여성에 정착하려 할 줄이야.
“상상도 못 했습니다.”
“뭘?”
“전하께서 결혼을 일찍 하신다니요.”
솔직히 더 오래 방탕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그동안 마음에 차는 이가 없었을 뿐이다.”
자이드가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다니! 자신이 알던 왕태자가 맞나 싶을 정도다.
“엘리제를 데려가고 싶다고 미로니카에서 연락을 드렸을 때 이미 내 짝으로 정하고 말씀드린 거다. 어차피 내가 왕이 될 것이니 그녀를 왕후로 맞이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
시에델의 왕가는 사촌끼리도 성혼이 가능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령의 힘을 가진 사람끼리의 결혼에 촌수가 문제 되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권력과 왕족의 적통성이 정령의 힘에서 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가의 왕족이 많아지기도 했으나, 그것이 문제 되지는 않았다. 결국 정령의 힘이 가장 강한 이가 왕이 되거나 왕후가 되었으니까. 그것이 시에델을 지금까지 이르게 한 오래된 전통이었다. 지금의 시에델에서는 왕후가 정령의 힘이 가장 강했고, 이 아래로는 자이드가 강했다. 그가 다음 왕이 될 ‘왕태자’가 된 이유도 그가 가진 힘의 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나와 전혀 혈연의 관계가 없으니 금상첨화야.”
“그런데, 미로니카 황제께서 나중에 이 사실을 알면 화가 나지 않을까요?”
로안 입장에서는 자이드가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되겠지.”
시에델의 문화 풍습을 미로니카가 몰랐음을 탓하면서.
“하긴 어느 나라가 알겠습니다. 시에델의 힘이나 결혼 문화에 대해 알린 적이 없는 것을.”
“엘리제 입장에서 나쁜 것 없는 선택이니, 황제가 뭐 어쩌겠느냐. 결국 엘리제에게 선택받지 못함을 한탄할 뿐이겠지.”
비밀을 지키기 위해 폐쇄적이었고, 폐쇄적인 만큼 시에델은 보수적이었다. 왕태자 자이드는 그런 시에델이 지겨웠다. 새롭게 바꾸고 자유로이 교류하고 싶었으며, 자신들의 힘을 공개하고 싶었다. 엘리제는 그런 면에서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다. 아름다우며 신선하고, 누구보다 생각이 자유분방하며, 분명 정령의 힘도 가지고 있었다.
“엘리제 님이 전하를 선택하지 않으시면요?”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야. 그녀는 이제 타국에서는 살 수가 없을 테니.”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정령의 힘을 가진 이가 그 힘이 있는 곳에 머물지 않으면 결국 죽음뿐이다. 그러니 엘리제는 시에델에 남게 될 것이고, 그녀 곁에 자신이 있어 주면 되었다.
“일단, 데려만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생각했었다.”
“마냥 지르고 보는 철부지이신 줄 알았더니요.”
바튼의 생각보다 자이드는 영리한 왕태자였다. 자이드는 생각에 잠겨서 바튼의 혼잣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이번에 아팠다가 깨어난 그녀에게서 분명히 느꼈어. 전보다 더 강한 장미 향기.’
그건 곧 각성도 있을 거라는 증거였다. 조만간 그녀는 각성에 성공하거나, 힘을 이겨내지 못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성공하여 나의 반려가 되길 기도해야겠군.’
아름답게 웃고 있었으나 마음은 긴장과 간절함에 떨렸다. *** 다음 날, 데몬은 엘리제를 따라 더욱 바빠졌다. 왕가의 데뷔탕트는 준비할 것이 많았다. 엘리제는 왕후에게 설득되어 데뷔탕트를 치르겠다고 결정한 후, 그레이스에게 예법과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수업을 마친 엘리제를 데몬이 방까지 바래다주었다. 고생이 많았다며 마가렛이 식사를 준비하러 나갔다.
“오늘은 이만 좀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아얏! 그, 그래야겠어요.”
갑자기 시작된 춤 수업에 근육이 뭉쳐 자꾸 쥐가 났다. 종아리뿐만 아니라 발도 굳었다. 불편하게 걷는 엘리제를 데몬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족욕을 해드리겠습니다.”
“족욕이요?”
아니,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것도 아니고 데몬이 직접 해준다고? 호위면 이런 것도 해주는 건가?? 읽었던 소설의 제목이 떠오른다. 「기사님 이러지 마세요」. 여주인과 호위 기사와의 사랑 이야기. 가녀리고 치명적인 매력의 여주인공과 남성미 철철 넘치는 기사가, 신분의 차이로 허락되지 않은 사랑을 하며 더욱 절절히 서로에게…….
“이쪽으로 오십시오.”
“앗, 네에!”
데몬이 손을 잡고 그녀를 욕실로 이끄는 덕분에 머릿속에 그려지던 빨간 딱지의 세계가 뭉게뭉게 사라졌다. 찰랑. 따뜻한 물을 담아온 데몬이 욕실 의자에 앉은 엘리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치마를 조금만 올려주시겠습니까?”
부끄러워 엘리제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슬쩍 끌어올리는 치마를 따라 하얗고 보드라운 맨살이 드러났다. 주르륵.
“윽!”
앗 차거! 물은 따뜻한데 그가 흘린 물비누는 반대로 무척 차가웠다. 퐁당. 엘리제의 발을 따뜻한 물 속에 담그고 데몬이 말없이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주물러지는 것은 발과 종아리인데, 온몸이 전기가 지나가는 듯 움찔거렸다.
‘어, 어떡해!’
뭐야, 이런 거까지 잘하시면 어떡해요?! 피로가 풀리며 나른해졌다. 발끝에서 시작해서 온몸을 타고 올라 머리끝까지 저릿했다.
‘시, 시원하다!’
“참을만하십니까?”
“앗, 네. 너무 잘하시네요.”
아. 누가 대화만 들으면 오해하겠어. 그때 그가 잠시 손을 멈추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낮고 감미로운 음성이 진지하게 욕실을 울렸다.
“지금요?”
이 상황에요? 욕실에서, 족욕 받다가요?
“더 이상 당신께 숨기지 못하겠습니다.”
“무, 무엇을요?”
정작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은 난데! 긴장으로 치마를 잡은 두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발을 두 손으로 붙잡고 데몬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붉은 눈이 불타오르는 듯이 느껴졌다.
‘아……!’
순간, 숨이 멎고 주변의 모든 것도 멈춘 기분이다. 시간까지도. 찰랑이는 물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엘리제는 자신이 멈춰진 시간이나 꿈속에 머무는 것이라 착각했을 것이다.
‘무엇을 숨기지 못하겠다는 걸까?’
몸이 오그라들고 숨이 죄었다. 긴장과 설렘으로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현기증 날 것 같아!
“앞으로 당신을 지키기 위해 저는 그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지난번 지켜 드리고 싶다 허락을 구하던 말과는 무게가 달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혹시 로안이 그렇게까지 하라고 시킨 걸까?
“왜, 그렇게까지 저를…….”
데몬의 마음이 알고 싶었다.
“당신을…….”
천천히 그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흠뻑 빠진 그의 목소리가 욕실 가득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