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아, 대공 각하!2022.03.17.
내가 놀란 것과는 상관없이 왕후 마마는 나를 바라보며 계속 자애롭게 웃었다. 당황스럽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겠다. 게다가 날 좋아하는 듯 보여서 뭐라 말도 못 하겠어! 그 옆에서 주특기 눈웃음을 발사하며 자이드가 말을 이었다.
“시에델의 전통입니다. 모든 귀족 여인은 데뷔탕트를 거칩니다. 귀빈 역시 그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담 그동안 다른 귀빈들도 그랬다는 건가? 시에델은 타국과 교류가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귀빈이 시에델의 사교계에 데뷔하신 사례가 이전에도 있습니까?”
내가 궁금했던 것을 마침 데몬이 물어주었다.
“물론 엘리제 님이 최초이십니다.”
뭐야, 그게? 내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누가 봐도 이번에 새로 만든 거 같은데?
‘도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 데몬의 붉은 눈이 가늘어지고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시에델 왕가의 친절한 웃음 뒤에 감춰진 의도를 알 것 같아서. 귀족이 주가 되는 사교계에서 나이가 찬 여인이 데뷔탕트를 치르는 이유는 단 하나.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즉, 엘리제가 데뷔를 치르고 나면 그녀는 시에델에서 공식 구애 가능 대상이 되는 셈이었다.
‘결국 자이드가 원하는 것이 역시 이것이었나?’
시에델로 데려와 엘리제를 자신의 여인으로 삼는 것.
‘황제의 첩으로 있는 미로니카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녀가 시에델의 일원이 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미로니카에서는 평민이자 첩이지만, 시에델에서는 왕의 허락하에 귀족이 되는 셈이니까.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두 신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로안이 가만히 두고 볼까?’
그가 엘리제를 되찾겠다고 시에델과 전쟁을 불사할 수도 있다. 영리한 자이드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시에델의 왕태자가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설마……, 로안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인가.’
로안이 엘리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엘리제가 시에델을 반드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동시에 알고 있는 것이겠지.
‘그게 무엇일까.’
황제의 약점과 엘리제가 시에델에 반드시 남아야 하는 이유가.
‘생각보다 두 가지 질문의 답에 이미 가까이 접근했을 수도…….’
엘리제를 데려다주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데몬이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휘익! 전서구를 부르는 휘파람을 불었다. ***
“아, 대공 각하…….”
데몬의 이름을 입안으로 간절하게 부르는 이가 자신의 방에 앉아 스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다가오는 이번 데뷔탕트에서 정식 데뷔를 할 예정이었다. 그녀가 데뷔 후에 누구와 만나게 될 것인가는 시에델 전체의 큰 관심사였다. 그녀는 시에델 왕국에 단 하나뿐인 공주니까. 공주 루시아. 루시아도 자신의 반려가 될 사람이 늘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었는데, 그동안 머릿속을 채웠던 후보자들은 이미 싹 잊힌 상태였다. 오직 한 사람이 그녀의 시선과 마음을 모두 사로잡았다. 아주 짧은 순간에. 그토록 짧은 순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루시아도 처음 알았다.
‘어떻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있지?’
그를 처음 왕궁의 입구에서 본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숨 막히는 외모와 몸이 떨릴 만큼 낮은 저음이 그녀의 이성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자신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된 채였다.
‘그분의 품에 단 한 번만 안겨보았으면…….’
그 넓고 믿음직스러운 품에 안기고 그의 단단한 팔 아래 갇히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안기게 되면 두 번, 세 번, 결국 평생을 욕심 내게 되겠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이 그의 스승이 방으로 들어왔다.
“공주님, 무탈하십니까?”
자수 스승은 허리 숙여 아름답게 인사하고 곁으로 다가왔다. 루시아는 신부수업 중이었다. 왕가의 여인들은 데뷔 이후 빠르게 결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신부수업은 몇 달 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안색이 붉으신데 어디 편찮으신 것은 아닌지요?”
스승의 물음에 루시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아, 아닙니다. 잠시 집중해서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그러시면 다행입니다.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의 스승이 차분히 바늘과 수를 놓을 비단을 들어 올렸다. 루시아가 그날 수업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했다. ***
“황궁에 남아 있는 정령석의 양을 알아내 달라고?”
프시케는 시에델에서 데몬이 보낸 전갈을 받고 놀랐다. 자신이 모르는 데몬과 로안 사이의 비밀 일부를 그가 털어놓고 있었다. 정확히는 황가와 크레미언 대공가 사이의 비밀을. 그와 동지가 되는 것에, 여러 번 반복하여 성공해왔다. 그러나 황가와 가문의 비밀에 대해 그가 직접적인 언급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엘리제가 중요해진 것이겠지.’
가문의 비밀을 황후에게 털어놓고 거래할 만큼. 어쩐지 오랜 친구를 빼앗긴 기분이라 가슴 한편이 서운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부분에 연연한다면 결국 마지막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 벌써 그녀가 그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쏟은 세월이 수백 년이었다.
‘알아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지.’
정령석이 황궁에 남아 있는 양이라면, 지금까지 황궁에 숨겨져 있는지조차 몰랐다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세 알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황궁의 살림은 황후의 소관이니까. 그녀는 눈을 감았다. 조용히 숨을 고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사실 머릿속이 얼마 전부터 더 중요한 일로 복잡했다.
‘도대체 누구일까.’
누가 미로니카의 황제 로안의 숨통을 조여오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오랜 세월과 경험으로 깊은 지혜와 지식을 갖추었다 자신했는데.’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로안을 위협하는 막강한 힘. 흑마법의 주인에 대해 전혀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미카일의 도움을 받아 함께 조사하고 있었으나, 아직 알아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미카일이 신성국의 성하께 도움을 청해보자고 하여 그녀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내려놓았다.
“황후 폐하, 기도 의식 시간입니다.”
곁에서 조용히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프시케가 로안과 미카일이 기다리는 기도실로 걸어갔다. *** 다음 날, 푹 자고 일어난 엘리제는 떨리는 마음으로 거울 앞에 앉았다. 마가렛이 씻고 나온 그녀를 단장해 주었다. 엘리제가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데몬이 문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가 어디를 가든 항상 곁에서 호위하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떨려.’
황제의 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했다. 문을 열기만 해도,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언제 어디에서든 데몬이 자신의 시야에 들어왔다.
‘숨 막히게 행복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너무 행복해서 불안할 지경이다. 단장을 마친 엘리제에게 마가렛이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엘리제 님, 편히 아침 식사를 하신 후에 왕후 마마께서 잠시 뵙고 싶다고 청하셨어요.”
“아, 그래? 고마워 마가렛.”
엘리제는 데몬과 간단히 아침 식사 후에 왕후 그레이스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한쪽 손을 데몬이 잡고 왕후의 방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어서 와요, 엘리제!”
그레이스가 무척 반기며 문 앞까지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데몬이 엘리제와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엘리제의 심장이 기적을 울리고 출발하는 기차처럼 또 뛰기 시작했다.
“네, 다녀올게요.”
방으로 들어온 그레이스가 차를 권하며 말을 꺼냈다.
“갑자기 데뷔를 시켜주겠다니, 당황스러우시지요?”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네.”
“엘리제 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당신 편입니다. 지금의 혼란스러움을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는 거예요?”
어리둥절했다. 어제도 그렇고 왕후는 어딘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레이스가 인자하게 웃더니 곧 놀랄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당신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네?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죽었다가 깨어나 보니 그레이스 왕후가 된 저는, 사실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제는 소름 끼치게 놀랐다. 그녀 앞에 있는 그레이스 왕후가 자신도 역시 빙의자라 고백하고 있었다. *** 왕후 그레이스는 본래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던 사업가였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떠보니 시에델 왕국의 왕후였다. 바뀐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그녀의 가족들은 함께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달라졌습니다. 각성을 한 것이었지요.”
‘각성이라고?’
“저를 향해 달려오던 자이드와 루시아가 넘어져 언덕 아래로 구르게 되었을 때, 제 안에 있던 영혼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영혼의 봉인이요?”
“두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게 피어오르면서 갑자기 진짜 왕후의 기억과 능력이 제게 밀물처럼 밀려왔어요. 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짜 그레이스가 될 수 있었던 거죠.”
마치, 하나의 영혼이 다른 하나를 흡수한 것처럼 이전의 왕후의 삶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 그레이스는 다른 세계에서 온 그녀 자체이자 동시에 왕후가 된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모두 정령의 힘 덕분입니다.”
“정령의 힘?”
“네. 이 시에델 왕국은, 이 세계에서 유일한 정령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엘리제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레이스의 말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정령의 힘을 가지고 있는 자랍니다.”
*** 데몬은 왕국의 접견실 앞에서 엘리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눈이 붉은빛을 내며 일렁였다. 그의 마력이 차오르고 있었다.
‘시에델 왕국에 도착한 후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마력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번 연회 때 무너지는 황궁을 떠받치기 위해 상당량을 사용했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직 한참 시일이 걸려야 한계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난번 상승한 한계점에 조만간 도달할 것 같았다.
‘이를 어쩐다.’
마력의 폭주를 막지 못하여 타국에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폭주 기간 동안 엘리제 곁을 떠나 있을 수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마력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답을 알고는 있다. 실행에 옮길 수 없을 뿐. 고민하고 있는 그에게 사각사각 드레스 자락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왕후는 눈앞의 엘리제를 바라보며, 수십 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하루아침에 낯선 세계 시에델 왕국 왕후의 몸이 되었던 그녀 자신을.
‘마음이 복잡할 테지.’
정령의 힘을 가진 자는 같은 힘을 가진 자를 알아본다. 엘리제에게서 분명 그 힘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저와 자이드는 당신의 존재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존재는 아주 귀하지요. 우리는 스스로 선택받았다고 믿고 있어요.”
시에델은 폐쇄적인 국가이다. 그들의 힘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했고, 그들은 그 힘에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왕후는 자신과 같은 엘리제를 발견하자 놓치지 않고 그들의 일부로 받아들이려 했다.
“엘리제, 당신께도 곧 각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각성이요?”
“정령의 힘을 가진 자는 각성을 통해 성장합니다. 단계적으로 껍질을 깨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점점 찾아가는 거라 할 수 있지요.”
진짜 내 모습?
“각성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어요. 정령의 힘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사람이 될 거예요.”
새로운 존재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여러 능력을 소유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황국에서 도망쳐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조금 더 욕심내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우선 살기 위해 황제, 황후와의 거래를 성사시켜야 했고, 그러려면 신분과 재력이 필요한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서 각성부터 해야 유리할 것이었다.
“말씀하신 각성은 어떻게 해야 일어나지요?”
“개인마다 다릅니다. 제 경우에는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저를 각성시켰어요.”
자이드와 루시아가 위험한 상황이 되자, 그 순간 봉인되어 있던 정령의 힘이 한 단계 풀렸다.
“엘리제 님, 지금 이 세계에서 당신을 지탱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왕후 그레이스의 물음에 엘리제는 그만 모든 것을 멈추었다.
“당신에게 그것은 무엇인가요?”
반복된 왕후의 물음을 엘리제 자신에게도 똑같이 해보았다.
“나를 이 세계에서 지탱하는 힘…….”
“그 힘이 각성의 열쇠입니다.”
‘나의 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