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덫인가, 기회인가2022.03.10.
“대인배도 그런 대인배가 없으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녀에게 이번에 진심으로 아주 감동했다! 이 소설 내 원픽은 이제 프시케야! 물론, 내 마음을 훔쳐 간 사람은 데몬이지만. 그는 소설 속 인물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내 눈앞에 살아 숨 쉬는 존재인걸. 내게는 종이 속 세상의 인물이 아니라.
“그런데, 엘리제 님. 갑자기 왜 황궁을 떠나겠다 결심하신 거예요?”
그전에는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이렇게 옮기지는 않았으니 마가렛이 놀라고 걱정이 된 모양이다.
“앓는 동안에 사경을 헤맸는데, 깨어나서 보니 짧게 살더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졌거든.”
나는 최대한 담백하게 내가 느낀 바를 정리했다. 그랬는데, 마가렛이 곧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엘, 엘리제 님…….”
“앗, 왜, 왜 그래? 그렇다고 내가 곧 죽겠다는 건 아니고.”
물론 곧 죽을 것 같아서 이러는 거 맞다. 이번에 눈을 뜨기 직전에 나는 데몬의 목소리가 아니면 이대로 삶의 끈을 놓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아주 강하게 받았으니까.
“나는 지금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저도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훌쩍이던 마가렛이 코까지 빨개져서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응. 나도 마가렛 곁에서 가능한 오래 살고 싶어.”
그때 내방에 로안의 시종이 찾아왔다.
“엘리제 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기도 의식이 시작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황제가 나를 찾는다고?
“무슨 일일까요?”
마가렛도 걱정이 되는지 물었다.
“중요한 일인가 봐.”
그러니 이런 시기에 찾는 거겠지. 그 일이 부디 나의 목줄을 조르는 일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
‘이게 지금…… 프시케 언니가 말한 그 기회인가?’
너무 빨리 찾아온 기회라 어리둥절했다. 기회인가, 덫인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저, 폐하.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네 기억을 찾기 위해 여기 계신 왕태자 전하를 따라 시에델에 다녀오라고 하였다.”
“그거 명령이신가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가요?”
로안은 내 질문이 예상 밖이었는지 움찔 망설였다. 황제로서 듣는 대답은 ‘예, 알겠습니다’나, ‘아니요, 살려주십시오’ 밖에 없는 표정이네.
“물론 선택이다. 하지만 다녀와 주었으면 좋겠구나. 짐은 하루라도 빨리 네가 기억을 되찾기를 간절히 바라니. 게다가…….”
줄줄이 설명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명령이네. 선택지 주는 척하기는!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왕태자 전하의 일정이 그리 여유롭지 않으시다.”
‘뭐야? 이미 결정해 놓고 날 부른 거야?’
“제게 선택권을 주신다면서요?”
흠! 흠! 로안이 말없이 헛기침만 해댔다. 그때 함께 불려온 자이드가 옆에서 얼른 끼어들어 시에델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에델에 가면 분명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흥! 그런다고 내가 가고 싶어 할 줄 알고?’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기억을 되찾는 것이 로안의 곁을 떠나는 일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가 중요하지.’
다행인 것은 시에델에 간다고 해서 반드시 내가 기억을 되찾을 거라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최후의 방법으로는 기억이 모두 돌아와도 아니라고 우기면 그만이다. 누가 알겠어? 잠시간 생각한 내가, 마음을 정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럼 조건이 있어요.”
나는 프시케 언니가 말한 기회가 지금이라고 판단 내렸다. 기회는 찾아왔을 때 잡아야 한다.
“제가 기억을 찾고 돌아오면,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세요.”
“소원이라고?”
로안의 얼굴이 그 소원이 무엇일까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소원의 내용을 들어보고 결정하마.”
“제게 자유를 주세요.”
“!”
로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무, 무어라?”
“저를 첩의 자리에서 내쳐주세요.”
*** 당장 결정하라던 로안이 오히려 엘리제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그녀를 방으로 돌려보냈다. 앙큼한 것. 아주 보통이 아니다.
‘괘씸하게 감히 짐의 곁을 떠날 생각을 해?’
그 작고 사랑스러운 머리로 제 품에서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다니 되레 소유욕이 들끓었다. 품에 가두고 다시는 도망갈 생각도 못 하게, 잘근잘근 입에 넣어 꿀꺽 삼켜주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소식을 들은 프시케가 온 모양이었다. 황제가 애첩을 이웃 나라에 요양차 보내려는 소식이 황후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 아마도 달가웠을 테지.
“엘리제의 제안을 받아들이십시오.”
‘역시.’
그런데 프시케의 다음 말이 로안의 예상을 날려버렸다.
“그녀를 황비로 맞이하고 싶으십니까?”
“!”
로안의 푸른 눈이 마구 흔들렸다. 어떻게 알았지? 황후는 지금 자신의 정적이 될 엘리제를 미리 치워버리려는 속셈인가?
“엘리제를 황비로 바로 맞으시기에는 신분이 문제가 됩니다.”
“!”
“첩에서 내치세요. 적당한 귀족 가문의 양녀로 보내신 후에 황비로 맞으십시오.”
“!!”
“그렇다면 엘리제도 황비 자리에 걸맞은 가문과 신분이 생기며, 그녀의 가문은 당연히 엘리제를 황비로 보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미로니카의 황비를 배출하게 되는 셈이니 귀족들이 서로 엘리제를 데려가려 할 것이 분명했다. 황후가 하는 말이 너무나 솔깃하여 로안은 그동안 그녀를 의심한 자신을 반성했다.
“어차피 기도 의식의 100일간 폐하께서는 엘리제를 가까이 두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지금 보내시는 것이 좋습니다.”
“오호!”
“게다가 기억을 되찾고 돌아오면 자유를 주겠다는 엘리제의 제안도 받아들이시는 게 폐하께 유리합니다. 그 기간 중 기억을 찾지 못했다면 첩으로 내치실 필요가 없고.”
“오오오!”
“기억을 되찾고 돌아온다면, 기억을 되찾은 엘리제는 폐하를 연모하니 떠날 리 없을 테지요.”
“!!”
황후 입장에서는 당연히 엘리제를 시에델로 보내는 것에 찬성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유가 이렇게 로안을 위하는 것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황후……. 이렇게까지 짐을…….”
로안은 거의 감동으로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황후, 이왕 나를 위하는 김에…….”
감동 어린 눈빛을 한 로안이 프시케에게 하나 더 부탁했다.
“크레미언 대공을 좀 설득해 주시오.”
“?”
***
“황제 폐하께서 엘리제 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겠다고 하십니다.”
‘와! 야호!’
이제 한 줄이 빛이 보이는 기분이다. 시에델 다녀오면 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종의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시종이 가고 나자, 마가렛이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축하드려요, 엘리제 님. 그런데 기억을 되찾아야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신 거 맞지요?”
“어. 맞아.”
나도 같이 마가렛 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려주었다.
“그러면 어쨌든 기억을 꼭 다 찾으셔야 하는 거네요?”
“…….”
그러네? 근데, 엘리제의 진짜 영혼은 이미 사라지고 없어서 앞으로는 돌아올 기억이 없으면 어쩌지?? 그럼 안 되는데…….
‘이거…… 기회가 맞나?’
“내 기억이 돌아온 걸 어떻게 확인하실까?”
“글쎄요?”
“퀴즈를 내시려나?”
“…….”
악! 너무 대책 없이 들이밀었나? 이제, 어쩌지?
“어쩔 수 없다.”
“뭘요?”
“시에델에 가서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걸. 우선 가보자. 그래도 조건을 달성하면 첩에서 내쳐주겠다는 게 어디야! 그런데, 당장 시에델로 간다니 이제 새로운 걱정이 밀려들었다.
‘하아. 그러고 보니, 가게 되면 데몬을 한참 못 보겠구나.’
당장 황제의 곁을 떠날 생각이 우선이었는데, 황국을 떠나면 데몬을 못 보는 또 다른 괴로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시무룩해지셨어요?”
“…….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서.”
“!”
마가렛이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내 귀에 속삭였다. 사탕같이 달콤한 말을.
“뵙고 싶어 하신다고 연락을 드려볼까요?”
*** 데몬은 황제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상태였다.
“무리가 되겠지만, 엘리제와 함께 시에델에 가다오.”
“말씀하신 바와 같이 무리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엘리제를 따라 시에델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황제가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눈치채서는 안 되니까. 엘리제를 대공가로 되찾아오려는 생각을.
‘아니, 그저 되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이제 내 곁에 두고 싶다.’
마음이 깊어진 만큼 어디에서 티가 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더욱 신중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 뜻밖에도 황후가 그를 찾아왔다.
“잠시 뵐 수 있을까요?”
황후가 대공을 직접 찾아온 적은 없었던 터라 데몬은 무슨 일인가 싶어 프시케를 맞았다.
“황제 폐하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황후가 데몬의 맞은편에 앉아 용건을 꺼냈다.
“시에델에 다녀와 주세요.”
“그 말씀은…….”
“엘리제가 기억을 찾으면 황제 폐하께서 그녀에게 자유를 주시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
“그러니, 폐하께서는 엘리제가 시에델에서 꼭 기억을 찾아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바라실 거예요. 대공께서 함께 가셔서 도움을 주시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
‘하지만 기억을 찾아도 엘리제가 황제를 선택하지 않는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
데몬은 생각에 잠겼다. 현명한 황후가 그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다.
‘황후가 이번 기회에 엘리제를 궁 밖으로 내보내 주려는 것인가?’
데몬의 눈이 가늘어졌다. ***
“엘리제 님!”
데몬에게 말을 전하러 갔던 마가렛이 서둘러 돌아왔다.
“왜? 무슨 일이야?”
“헉, 헉.”
숨 좀 돌리고, 이제 어서 말해 봐.
“대공 각하께서, 헉, 헉.”
“각하께서?”
“엘리제 님의 호위로 시에델에 함께 가신대요!”
“뭐? 정말이야?”
꿈만 같다. 한참 보지 못할 거라 여겨서 가슴이 저미듯 아팠는데, 잠깐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니 아예 같이 간다니!
“제가 방금 각하의 방 앞에서 듣고 오는 길이에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황후 폐하께서 직접 대공 각하를 설득하러 오셨었거든요.”
“설득하셨다고?”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든다. 그럼 처음에는 안 가겠다고 하셨다는 말이잖아?
‘데몬 역시 나에 대한 마음이 각별해서 그렇게 간절하게 내가 깨어나길 바랐던 것이 아닌가?’
그런 줄 알았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만약 내가 그에게 특별한 존재라면, 나를 따라 시에델로 가라는 황제의 명에 처음부터 알았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여전히 절절하게 나 혼자만 좋아하는 게 속상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시에델 가서 마음껏 덕질하며 충분히 보상받아야겠다.”
“덕질이요?”
“응, 그런 게 있어. 좋은 거니까 나중에 마가렛에게도 알려줄게.”
‘여기서는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느라 못 했던 거 마음껏 해봐야지.’
혼자 열병으로 앓느라 끙끙대는 거보다, 그게 낫지 않을까? 흐흐흐. 벌써 기대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가렛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저, 엘리제 님. 그런데 혹시 그거 아세요?”
“뭘?”
“아주 가끔씩, 엘리제 님 표정이 아주 무서우실 때가 있어요.”
“어? 나는 째려보지도 않는데?”
“째려보지는 않으시지만.”
마가렛은 말해도 되나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는 듯 보였다. 뭔데? 뭔데 그렇게 망설이는 거니, 긴장되게.
“가끔 정육점 아저씨 같은 표정이 되시거든요.”
“정육점 아저씨? 그게 뭐야?”
“칼 들고 음흉하게 웃는 그런 표정 있잖아요.”
“!”
마가렛,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잠깐! 그 말은 내가 방금 데몬을 떠올리면서 그런 표정이었다는 거야?? ***
“두 분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명을 따르겠습니다.”
데몬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사실 안도했다. 누구보다 그녀가 걱정되어 몰래라도 시에델에 가볼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 준다면 지금 엘리제를 따라 못 이기는 척 시에델로 가도 황제는 전혀 그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할 것이었다.
‘황후가 엘리제를 돕기로 했다더니 정말이군.’
마가렛의 보고는 정확했다. 데몬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황후가 움직여주고 있었다.
‘하긴, 황후의 입장에서는 엘리제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지.’
엘리제가 제 발로 황제의 곁을 떠나겠다고 나서고 황후에게 도와달라 손을 내밀었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황후가 엘리제의 말을 믿어준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더욱 서둘러야겠다.’
황후까지 엘리제를 돕고 있었다. 이제 데몬의 차례였다. 그는 하임에게 보낼 서신을 적었다. 얼마 전부터 준비하던 일에 박차를 가하라는 내용으로. ***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황제 폐하.”
가볍게 허리를 숙인 자이드가 로안의 방으로 들어오며 빙긋 웃었다. 로안이 보기에도 그의 눈웃음이 매력적이었다. 그 모습에 잠시 움찔하였다.
‘설마……, 엘리제에게 딴 맘이 있어 데려가는 건 아니겠지.’
로안의 푸른 눈이 가느다랗게 변하더니 이내 평정을 찾았다.
‘배려 깊은 왕태자가 그럴 리가. 설사 그렇다 해도 데몬을 함께 보내니 걱정할 일 없을 거다.’
그동안에 황후와 정성껏 100일 기도를 끝내고 황국을 흑마법으로부터 보호할 방법도 찾으면 되겠지.
“왕태자께서 주신 제안과 엘리제의 조건 모두 깊이 생각해보았소.”
‘벌써요?’
“두 제안 모두 받아들일까 하오.”
엘리제가 내건 조건 때문에 황제가 그녀를 보내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쉽고 빠르게 결정될 줄이야. 자이드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단, 사랑하고 아끼는 그녀를 홀로 타국에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니…….”
‘당연히 믿을만한 호위와 하녀를 함께 보내려 하겠지.’
자이드도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크레미언 대공과 엘리제의 전담 시녀도 함께 보내고 싶소.”
그 말에 왕태자의 두 눈이 커졌다.
‘누구를 함께 보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