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다른 이를 연모하게 된 것이냐2022.03.07.
누군가의 죽음이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자신의 첫 번째 폭주로 그의 어머니께서 사경을 헤매실 때였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는 일부러 마음에 누군가를 담지 않으려 애써왔는데. 그녀에게는 그게 되질 않았다. 왜일까.
‘그녀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의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가 가진 힘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듣고부터는 그녀를 향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 기분이다. 이 복잡한 감정을 이전까지는 그저 지켜주고 싶은 마음일 뿐이라 치부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갑자기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다. 저도 모르게 잡은 그녀의 두 손에 간절함이 실렸다. 굳게 닫혔던 금색의 눈이 들어 올려졌을 때는 안도감에 벌려진 입술 사이로 탄성이 뱉어졌다. 그녀가 눈을 떠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아마도 신만이 아실 것이다. 데몬은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의 감정은 더 이상 그저 ‘지켜주고 싶은 마음’ 정도에 머물지 못함을.
“하아.”
제 마음의 정체를 단정 짓기조차 망설여졌다. 그 말보다도 마음이 더 크고 무거울까 봐.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직접 실토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가 붉은 눈을 천천히 떴다. 마음의 무게가 실려 길고 아름다운 눈썹이 무겁게 들어 올려졌다. 침묵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그에게 황제의 시종이 찾아왔다.
“황제 폐하께서 대공 각하를 찾으십니다.”
*** 로안의 방에 도착한 데몬은 로안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짐은 엘리제를 황비의 자리에 올리고 싶다. 그런데 황후의 반대도 걱정되고, 무엇보다도 아직 엘리제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 걱정이야.”
황제가 본인의 애정 관계를 대공에게 상담할 줄이야. 데몬을 부른 이유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내심 놀랐지만, 데몬은 모르는 척 로안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황제가 엘리제를 황비로 맞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마가렛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엘리제가 거부했다는 것도.
‘아직 그 마음이 여전한가 보군.’
그런데도 황제는 그녀를 결국 황비로 맞을 생각인가 보다.
“엘리제 님의 기억을 빨리 찾을 방법을 알고 싶으신 것입니까?”
자신을 부른 이유가 그 방법을 찾아내라 명하기 위해서인가?
“역시 짐의 마음을 바로 헤아리는구나!”
로안이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시에델의 왕태자가 와서 엘리제의 기억을 찾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기억을 찾는 방법이 있다고?’
“그 방법이 시에델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왕태자의 말로는, 그의 모후께서 엘리제와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으셨다고 하던데.”
‘설마!’
“자네의 의견은 어떠한가?”
데몬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렇게 찾던 사람이 어쩌면 시에델의 왕후일지도 모른다!’
정령의 힘을 가지고도 살아남은 사람. 미로니카 안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 이미 죽어버린 후여서. 혹시나 살아남은 이가 시에델에 있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엘리제는 기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령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살아남기 위해 시에델로 가야만 했다.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데몬이 신중하게 대답했다.
“내 생각도 그러해. 엘리제가 기억만 되찾는다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니.”
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엘리제가 자신과 사랑을 나누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데몬의 생각은 달랐다.
‘엘리제가 기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을 황제는 아직 모르는 것이 낫겠군.’
황제가 엘리제를 시에델로 보내는 것으로 결정한다면, 마가렛만으로는 그녀를 돕고 보호하기 힘들 것이었다. 데몬이 대공가에 있다가 몇 시간 말을 달려 올 수 있는 황궁과, 하루 반나절을 더 이동해야 닿을 수 있는 이웃 나라 시에델은 거리부터가 다르니까. 믿을만한 호위 누구를 몰래 보내야 할까 고민하는 데몬에게 로안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걱정되는 것이 하나 더 있어서 그와 관련하여 부탁하고 싶다.”
“명하십시오.”
로안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엘리제가 시에델에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이 그녀를 욕심낼까 걱정이다. 그러니…….”
당연히 걱정되겠지. 당장 왕태자 자이드부터가 그녀를 욕심내고 있는 것을. 게다가 시에델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어서 엘리제를 그냥 보내기 분명 불안할 것이었다.
‘믿을 만한 호위를 추천해달라는 말인가?’
데몬이 로안의 눈을 응시하며 자신의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추리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로안의 말이 이어졌다.
“무리인 줄은 알지만, 그대가 시에델에 엘리제와 함께 가줄 수 있는가?”
*** 엘리제는 프시케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몸살이 나았다더니, 다행이구나!”
프시케는 엘리제를 웃으며 맞이했다. 그녀가 병상에서 일어나 황후에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이라 여기어 따뜻한 차를 준비하며 그녀를 맞이했다.
“황후 폐하, 사실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프시케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엘리제에게 차를 권하고 자신도 찻잔을 들어 올렸다.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 말해 보렴. 무슨 부탁이냐?”
기억을 잃은 후로 엘리제가 황후에게 보여온 모습은 줄곧 솔직하고 욕심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결같이 로안을 밀어내고 있어서 어쩐지 프시케는 같은 여자로서 그녀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이틀을 앓고 나더니 야위었구나.’
지금도 자신을 찾아온 엘리제는 당차지만 지켜줘야 할 것처럼 여리여리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줘서 흔쾌히 엘리제를 돕고 싶었다.
“황후 폐하, 제가 황궁에서 도망치도록 도와주세요.”
“풉.”
너무 놀라서 프시케는 마시던 차를 쏟을 뻔했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말이 엘리제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제 저 말을 꺼냈을 때도 마가렛, 미카일, 데몬 역시 놀란 표정이었지.
“앗, 괜찮으세요?”
엘리제가 걱정하자, 프시케가 손을 흔들었다.
“괜찮다. 너무 뜻밖의 말이라 조금 당황한 것뿐이야.”
프시케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모든 시종을 방에서 물렸다. 단둘만 남은 황후의 방에서 프시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방금 한 말이 네 진심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황궁에 황제 폐하의 눈과 귀가 되는 이가 지천인 것을.”
프시케가 엘리제를 걱정하는 진심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곧 황제 폐하께도 직접 말씀드릴 거라서요.”
엘리제의 말에 이번엔 프시케의 입이 턱 벌어졌다.
“진심이로구나!”
“네! 저는 황궁을 벗어나야만 살 수 있어요. 황제 폐하의 첩인 것이 싫고요.”
“설마…….”
프시케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다른 이를 연모하게 된 것이더냐?”
그렇다면 엘리제가 하는 행동이 전부 이해가 되었다. 부와 권력을 다 준다는 황제를 놔두고 그녀가 황궁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사랑’이라면 충분했다. 게다가 기억을 잃고 나서 엘리제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달라졌으니, 로안 외에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사랑하지도 않는 황제의 곁에 있는 삶이라면 죽음과도 같겠지.’
그러니, 황제의 품을 벗어나야만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엘리제의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맞아요.”
진지한 프시케의 질문에 엘리제도 덩달아 진지하게 인상을 쓰며 대답했지만, 어쩐지 대답이 좀 이상했다.
“어느 정도만 맞다고?”
“네.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어도 저는 황궁을 떠나고 싶었을 테니까요.”
“잠깐, 그럼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맞다는 말이구나!”
“네!”
당당한 그녀의 말과 눈동자에 프시케는 할 말을 잃었다. 황제의 애첩이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는 황후에게 당당하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당돌하고 엉뚱한데, 또 사랑스럽기도 하다. 이게 무슨 마음이지? 혼란스러운 사이 어느덧 프시케는 철없는 막냇동생을 대하는 기분이 되었다.
“엘리제야. 잘 생각해보자. 황제 폐하께서 너를 황명으로 데려오셨어. 그러니 다시 황명이 있어야 네가 궁 밖으로 나갈 수가 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고? 그럼 내가 도와주면 황제께서 너를 궁 밖으로 내보내 주실 거라는 말이냐?”
끄덕.
‘끄덕? 황후에게 끄덕?’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가 맞나? 상식을 깨는 행동에 프시케는 어리둥절해졌다.
“황후 폐하께 미리 허락을 받은 실수 하나를 할게요. 그 죄를 물어 저를 궁 밖으로 내쫓아주세요.”
짜고 치자는 말이로군. 하! 프시케는 기가 막혔다.
“황제 폐하를 상대로 사기극을 벌이자는 이야기 아니냐?”
황제를 상대로 그런 일을 벌일 생각도 모자라, 황후에게 공범이 되어달라 부탁하다니. 간도 크군!
“부탁드릴게요. 대신 다시는 황제 폐하의 곁에 얼씬도 하지 않을 거예요.”
끙. 프시케는 두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혹시 엘리제가 요 이틀 고열로 시달리며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엘리제야. 네가 웬만한 실수를 하여도 폐하께서는 아마 널 용서해주실 것이야.”
로안이라면 프시케가 엘리제를 내쫓으려 해도 어떻게든 지키려 할 것이 분명했다.
“제가 황후 폐하의 소중한 물건을 훔쳐도 그러실까요?”
“!”
프시케는 그만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지혜를 담은 초록색 눈동자가 넋을 놓고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뭐?”
지금 황제를 대상으로 사기극을 벌이겠다는 것도 모자라, 황후의 물건을 훔치는 죄를 짓겠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연극이라고 해도 그건 아주 위험한 생각이었다.
“그러다 잘못하면 네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수가 있다.”
“황궁에 있어도 제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마찬가지예요. 저는 지금 살고 싶어서 이러는 것입니다.”
“!”
프시케는 엘리제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진심이다. 저 타오르는 금색은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 분명하니까.
‘비에 홀딱 젖어 냐옹냐옹 엄마를 찾는 새끼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그녀는 엘리제의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고양이가 아니라 범이었구나.’
***
“엘리제, 황궁을 나가는 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요?”
황후의 말에 나는 그만 다시 기운이 빠지고 말았다. 낙담한 듯 시무룩해졌더니, 프시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저런, 또다시 비 맞은 고양이가 되었구나.”
‘고양이라고? 누가?’
그러더니 곧 자애로운 웃음을 짓고 내게 속삭였다.
“그 방법은 너무 위험해. 대신 네가 만약 경제력을 갖춘다면 내가 방법을 찾아주겠다.”
“정말이십니까?”
실망하고 있던 차에 들었던 말이라 더 반갑게 느껴졌다. 와! 역시 주인공 언니 최고!
“그래. 보통 황실의 첩들이 독립할 기회가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는 경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인 경우가 가장 많지.”
“황궁을 나가고 싶어도 혼자 살아갈 능력이 없으니 떠날 수가 없는 거군요.”
이 소설 속에서 여인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주로 집안과 남편 등에 의지하는 수동적인 존재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너의 방법으로 황궁을 나간다 하더라도, 삶이 궁핍해지면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 사정을 알고 너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이 네게 접근하겠지.”
프시케가 덧붙인 말은 나를 소름 돋게 했다. 당장 황궁을 나갈 생각만 했지, 나가서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한 계획이 아직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귀족이라면 궁을 나가도 가문의 영지와 성이 있지만, 엘리제 너는 황궁을 떠나면 돌아갈 집이라도 있느냐?”
진심으로 내 처지를 들여다보고 조언해주는 프시케가 고마웠다. 물론 나도 마냥 아무 생각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장사나 허드렛일을 하며 살 각오도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대공가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더욱 좋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불확실한 계획이야.’
당장 실현 가능하다고 장담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조언 감사드려요.”
나는 황후에게 진심으로 허리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하지만, 제가 황제 폐하께 마음이 없는 것은 정말 사실이에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궁에 있지만, 황후 폐하께 조금이라도 누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내 말을 듣고 의중이라도 파악하듯 프시케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으나, 이내 다시 따뜻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래. 네 말을 믿는다. 네가 거짓말을 할 거라면 좀 더 그럴싸하게 준비해서 왔겠지.”
“예?”
내가 믿음직스럽다는 말이 아니라, 허술하다는 말로 들리는데?
“궁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지만,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 역시. 오랜 세월 궁에서 생활한 현명한 황후는 과연 내가 넘보지 못할 위엄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이래서 여주인가 봐!
“네 마음을 충분히 알았으니, 함께 좋은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기다리다 보면 분명히 기회가 올 것이다.”
“예. 저도 경제력을 갖출 방법을 고민해볼게요.”
“마음에 드는구나.”
프시케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
“오늘부터 황후 폐하는 내 마음속 언니야!”
“예?”
방으로 돌아온 나를 마가렛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