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그도 남자였다2022.02.28.
쏴아아. 점점 더 세차게 내리는 비에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로안과 프시케는 황궁과 정원이 이어지는 입구에서 큰 우산을 쓴 채 마음을 졸였다. 사제 미카일과 애첩 엘리제가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정원이 온통 질퍽해서 우산을 든 시종들이 나아갈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앞이 보이질 않아 두 사람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사제께서는 비를 피하고 계실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엘리제도요.”
프시케가 로안을 위로했다.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미카일과 엘리제를 로안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 프시케의 입장에서는 사실 속이 더 탔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두 사람이 빗속을 뚫고 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부디, 그러기를 바라는 수밖에.’
모두가 마음을 졸이며 소나기가 수그러들기를 기다렸다. *** 엘리제는 오들오들 떨며 무섭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그렇게 맑았는데, 어디서 이렇게 갑자기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는 것인지 황당할 정도였다. 미카일 덕분에 가까운 큰 나무 아래로 피했지만, 사방이 뚫려 있었고 이미 흠뻑 젖은 상태라 떨리는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늘 움직이기 편하기 위해서 가볍게 입고 나온 탓에 몸이 젖자 낮인데도 추위가 몰려왔다. 엘리제의 입술이 파랗게 변하자, 미카일의 낯빛도 걱정으로 창백해져 갔다.
“이거라도 걸치고 계십시오.”
미카일이 하얀 사제복을 한 겹 벗어냈다.
“아, 아녜요! 그러면 사제님께서 더 추우실 텐데요!”
“그래도 저는 엘리제 님보다는 건강합니다.”
“저도 건강해, 엣취!”
“저런! 괜찮으십니까?”
때마침 나온 재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미카일이 건네는 사제복을 받아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말씀을 안 들어서…….”
보물은 포기하고 그만 돌아가자고 미카일이 권할 때 나갔어야 했는데.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가 건네준 옷을 입고 나니 모습은 우스웠지만, 한결 추위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희한하게도 따뜻한 기운이 몸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당장 추위를 어찌해드릴 수는 없지만, 혹시 감기에 걸리시면 신성력으로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뭐야 그게? 아! 신성력은 치유의 힘이라 아파야만 낫게 해줄 수 있는 건가 보네.
“감사해요. 그럼 걱정할 것 없겠네요.”
지금 잠시 춥더라도 돌아가서 미카일이 금세 치유해줄 것이니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면 되겠다. 그런데 이 비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이제 큰 나무의 나뭇잎 사이를 뚫고도 비가 떨어져 두 사람의 몸을 더 적시는 중이다. 미카일도 점점 추위를 느끼는지 몸이 살짝씩 떨렸다.
‘마가렛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선한 연둣빛 두 눈이 아른아른 떠올랐다. 엘리제를 보내며 정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는데. 보물 쪽지도 못 찾고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나타나면 마가렛이 한차례 잔소리하겠구나 싶어 웃음이 쿡 났다.
“뭐가 우스우십니까?”
“아, 마가렛 생각이 나서요.”
엘리제는 고개를 들어 미카일을 바라보았다. 그의 물에 젖은 연한 갈색 머리와 상냥한 눈빛이 마가렛의 밀빛 머리와 진실한 두 눈을 떠올리게 했다.
‘어딘가 닮게 느껴지네, 두 사람.’
그러는 사이 계속 비를 맞는 몸이 신기하게 아까보다 더 열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사제님, 혹시 이 옷에 신성력이 담겨 있나요?”
엘리제의 물음에 무슨 소리인가 싶어 하던 미카일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엘리제 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냐니, 무슨…….”
말을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미카일의 모습이 휘익 휘었다.
‘어? 왜 이러지?’
시야가 어지러웠다. 미카일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르게 상기되어 있었다.
“!”
정말로 열이 오르고 있었다.
‘비 때문인가?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몸살 증상이 바로 나타나는 모양이다. 아까보다 엘리제의 몸이 더 떨렸다. 센 바람에 가지가 떨리듯이.
“갑자기, 추, 추워요.”
얼굴은 붉은데 그녀의 입술이 파랗다 못해 이제 하얗게 질려서 미카일의 머릿속도 함께 표백되었다. 쿠르릉. 천둥이 쳤다. 아직도 하늘이 어둡고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려 이 상태에서 외부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은 무리였다. 미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죄송하지만, 잠시 실례를 범해도 되겠습니까?”
“뭘, 뭘요?”
몸을 떨던 엘리제는 이제 두 눈마저 감기고 있었다.
“우선은 추위를 가시게 해드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자신은 남자이니, 엘리제보다는 몸이 따뜻할 것이었다. 자신의 몸을 난로로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젖은 몸끼리 닿을 것이라서 미카일의 표정이 무척이나 난처해졌다. 그런데.
“사제님, 이제 저……, 졸…….”
몽롱해진 금색 눈이 감겼다. 갑자기 졸음까지 쏟아진다고? 그녀의 몸 상태가 더욱 안 좋아질 것이 분명했다. 이건 이상하다. 그녀는 단순한 몸살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때, 옆으로 쏟아지는 엘리제의 몸이 미카일의 망설임을 끝내버렸다. 그가 무너지는 그녀를 와락 감싸 안았다.
얇은 옷 한 장을 걸친 그의 몸 전체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사방에서 거세게 쏟아지는 비 때문에 포개어진 두 사람의 몸 위로도 비가 계속해서 떨어졌다. 한참을 버티자, 미카일은 자신의 시야도 점점 흐려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 안 돼!’
신성력을 사용할수록 그도 마찬가지로 어지러웠다. 최선을 다해 정신을 부여잡던 중. 저 멀리서 미카일을 안도케 하는 인영과 붉은 눈이 보였다. 우레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데몬이었다.
“미카일!”
친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카일도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 데몬의 가슴 안쪽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마치 최고속도를 내는 기차처럼. 이 빗속에 미카일과 엘리제가 어디에서 몸을 피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어 초조했는데,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심장이 미칠 듯 뛰기 시작했다. 등에는 미카일을 업고, 팔로는 엘리제를 안은 그가 무서우리만큼 빠른 속도로 정원을 빠져나오자,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맙소사, 사제님!”
“엘리제 님!”
마가렛은 거의 질겁하고 말았다.
“어서 안쪽으로요!”
서둘러 미카일과 엘리제를 따뜻한 곳으로 옮기고 의사를 불렀다. 다행히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미카일이 눈을 떴다.
“데, 데몬.”
“괜찮은가?”
“미안하네. 내가 엘리제 님을…….”
“아무 말 말게. 일단 쉬어.”
데몬이 미카일을 앉히며 안심시켰다. 어느새 다가온 궁의가 미카일의 상태를 진찰했다. 데몬은 서둘러 엘리제도 가장 가까운 방의 카우치에 눕히고 또 다른 궁의를 불렀다. 발갛게 상기된 두 볼을 보니,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사제께서는 안정을 취하시면 괜찮으실 것입니다. 감기 기운은 좀 있으시지만, 갑자기 신성력을 과하게 사용하시면서 어지러우셨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런 것 같아. 실내로 들어오니 지금은 괜찮네. 나보다 엘리제 님이…….”
기운을 차린 미카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금방 열이 오르셔서 감기인가 싶어 신성력을 사용했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어.”
‘신성력이 효과가 없었다고?’
데몬의 심장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신성력이 효과가 없는 경우는 하나이다. 몸의 상처나 부상은 치유 마법 즉,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있다. 신성력이 효과가 없는 경우는 바로 다친 것이 아니라, 흑마법이나 마력 등 또 다른 종류의 마법이 작용하고 있을 때였다. 데몬이 눈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에게 또 다른 주술이 발동되고 있는 것인가 확인하기 위해.
‘흑마법은 아니군.’
그럼 대체 어떤 경우이지? 그녀의 상태는 데몬도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신성력도 흑마법도 아닌데 마법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경우. 갑자기 정령의 힘을 가진 이들이 빠르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그녀에게 그들이 말하던 ‘고비’가 오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람이 정령의 힘을 갖게 되는 경우, 목숨을 걸고 맞부딪히게 되는 과정. 정령의 힘이 그녀의 안에서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
“엘리제! 엘리제는 어디 있느냐!”
소식을 들은 로안이 달려왔다.
“폐, 폐하!”
시종장과 시종들이 로안의 옷과 큰 타월을 들고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로안이 씻자마자 가운만 걸치고 엘리제에게 바로 달려온 까닭이었다.
“폐하.”
데몬과 궁의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 옆 의자에 앉은 미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로안이 서둘러 말렸다.
“사제님! 이런 일을 겪으시게 하여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갑자기 거센 비가 내린 것을요. 되레 제가 엘리제 님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엘리제에게 미안했으며 데몬에게도 면목이 없었는데, 걱정하는 황제와 마가렛 등을 보니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데몬은 친우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자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아닙니다. 엘리제 님께서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도록 온몸으로 막아주셨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사제님 덕분에 엘리제가 이만한 것입니다.”
로안도 고개를 끄덕이며 데몬의 말에 맞장구쳤다.
“궁의는 최선을 다해 엘리제의 회복을 도우라.”
“예, 폐하.”
궁의는 엘리제가 큰 비를 만나 몸살이 난 것이라 판단을 내렸다. 로안은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옆에 선 데몬과 미카일은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두 사람이 말없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잠든 그녀의 숨결이 뜨겁고 빨랐다. 마치 무언가에 쫓겨 서둘러 도망치는 사람처럼. *** 비는 정오가 훨씬 지난 점심 때까지 이어지다 그쳤다. 신성력을 이용하여 완전히 회복한 미카일은 그날 저녁도 황제 부부와 함께 기도 의식을 행했다. 그 사이 데몬과 마가렛이 엘리제의 방에서 함께 간호 중이었다.
“계속 이렇게 열이 내리지 않으시면 어쩌지요?”
궁의가 처방을 내려준 해열제도 소용이 없었다. 마가렛이 걱정스럽게 데몬에게 물었다. 그의 입술 역시 걱정으로 굳게 닫혀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엘리제를 내려다볼 뿐이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애가 탔다. 그녀를 잃게 될까 봐. 아직 그녀를 살릴 방법도 찾지 못했는데, 이렇게나 빨리 ‘고비’가 찾아올지 몰랐다. 데몬은 지난번 유언장의 내용을 떠올렸다. 정령의 힘을 가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던 이의 마지막 기록. 그것은 유언장이라기보다 일기에 가까웠다. 유언장을 쓴 이는 놀랍게도 죽음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열리는 정령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고비가 찾아오는 이유 역시 그 사람은 알고 있었다. 유언장에 적혀 있던 두 글자가 데몬을 충격에 빠트렸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넘겼는데…….’
그 언젠가 주술을 풀기 위해 대공가로 왔던 엘리제가 창밖의 달을 바라보며 가족들 이름을 중얼거렸을 때도 기묘함을 느꼈던 데몬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녀가 누구이든 상관없다.
‘제발 버텨다오.’
데몬은 그저 그녀가 이 고비를 넘기고 다시 눈을 뜨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기도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미카일은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로 세수부터 하였다. 의식을 진행하는 내내 엘리제가 걱정되어 황국을 위한 기도는 어느새 뒷전이었다. 하긴 그녀가 무사히 깨어나야 황국의 평화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미카일의 걱정은 그런 계산적인 것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가녀렸어.’
그는 자신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오들오들 떨던 엘리제를 떠올렸다. 물에 젖어 연약한 몸이 열을 내며 잘게 떨려서 그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건강한 모습을 되찾기를 기원했다. 다시 밝은 모습으로 자신을 향해 상냥하게 웃어주기를. 그리고 그 고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사제님!’
“!”
엘리제가 자신을 부르며 반갑게 웃던 모습이 떠오르자 가슴이 더 절박하게 뛰었다. 그도, 데몬도 정령의 힘을 가진 사람의 최후를 안다. 그녀가 그들처럼 될까 봐 애가 탔다.
‘신이시여! 그녀가 무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욕실에서 나온 미카일이 무릎을 꿇고 다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 데몬은 두려웠다. 이틀째 엘리제의 열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로안 역시 기도실과 엘리제의 방 양쪽을 오가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미카일과 마가렛은 거의 종일 함께 엘리제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 중이었다.
“엘리제가 몸살을 크게 앓는구나.”
안절부절못하는 로안을 바라보며 프시케까지 함께 걱정했다. 그 덕에 옆에 앉은 자이드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엘리제가 곧 깨어날 거라 생각해서 크게 걱정되지 않았으나, 보물찾기를 제안했던 당사자라 황제 부부에게 근심을 안겼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왕태자 전하께서 저희 폐하를 위해 애쓰셨던 것을 저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 마세요.”
프시케가 자이드를 위로했다. 사실 자이드는 엘리제의 상태에 관해 예상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고비를 잘 넘길지 그도 장담할 수 없어서 함부로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말하는 순간, 엘리제의 힘에 대해 알고 있다고 밝히는 셈이 되니 더욱 말을 아꼈다. 그녀의 힘은 시에델의 비밀과도 직결된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서 엘리제가 깨어나야 할 텐데…….’
모두가 그렇게 그녀를 위해 간절한 사이, 엘리제의 의식은 깊은 어둠을 헤맸다. *** 어두웠던 시야가 점차 밝아지더니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른어른 멀리 인영이 보였다.
‘누구지?’
나는 풀밭에 주저앉은 작은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구불거리는 은발이 사랑스럽게 어깨까지 닿아 찰랑거렸다. 은발?
‘설마?’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와 같은 금색이었다. 작고 예쁜 입술이 앙증맞았다.
‘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