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먹구름은 소나기를 부른다2022.02.24.
「얼마 전 고인이 되신 분 중에 한 분을 찾았습니다.」 하임의 쪽지를 받고 깊은 밤을 달려 데몬은 대공가로 향했다. 보고의 내용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엘리제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하임.”
대공가의 집무실로 들어서며 데몬이 바로 보좌관을 불렀다. 하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바로 오셨습니까?”
연회를 위해 대공이 대공가를 떠난 후로 며칠 만이었다. 그사이 폭발 사건으로 황궁에 묶여 있었던 그의 주군은 자신이 보낸 쪽지 한 장에 밤을 꼴딱 새워 이곳에 도착했다. 당장 가겠다는 기별을 받고 새벽부터 대기 중이었던 하임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들어오는 주군을 맞이했다.
“보고는?”
“여기 있습니다. 말씀드린 유언장입니다.”
황궁에 머무는 동안 데몬은 대공가의 살림과 함께 정령의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한 조사를 하임에게 맡겼었다. 미카일이 아카데미에서 알아낸 사실을 바탕으로 몇 가지 단서를 쫓아 드디어 정령의 힘을 가진 사람을 찾아내었을 때는, 이미 그 사람 역시 고인이 된 후였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고자 유가족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뜻밖에 고인의 유언장이 이상하다는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임은 곧장 데몬에게 그 내용을 보고했다. 그 유언장이라는 쪽지를 받아든 데몬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
“왜 그러십니까?”
하임 역시 그 유언장을 읽어봐서 알고 있다. 죽음을 앞둔 이가 쓴 허황된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표정은 심각하고 진지했다. 데몬의 붉은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자이드는 보물찾기의 주최자이자, 보물 쪽지를 직접 황궁 정원에 숨긴 이였다. 그러니 본래 그는 보물찾기에 참가할 수 없었으나, 정원 안을 헤매는 이들 중에 그가 있었다. 구급상자를 손에 들고. 보물찾기의 원활하고 안전한 진행을 돕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실은 처음부터 그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
모두가 혈안이 되어 보물 쪽지를 찾을 때, 그의 눈은 쪽지가 아닌 엘리제를 찾고 있었다. 반갑지 않게 친절한 사제께서 살뜰히 그녀를 챙기고 있었다. 황제가 부탁한 것인지, 대공이 부탁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 곁에 아무도 없어야 자신이 보물찾기를 기획한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인데 일이 꼬이는 것 같다.
‘사제님을 떼어놓아야 하는데…….’
일단 그전에 그녀를 찾아야 뭐라도 할 수가 있겠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서 어디서든 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었는데 막상 정원 안으로 들어오니 너무 넓고 사람이 많아서 자갈들 사이 숨겨진 수정을 찾는 기분이다.
‘대체 어디……!’
“에잉! 또 꽝이야!”
작게 외치는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역시나 엘리제와 미카일이 보였다.
“찾은 쪽지가 보물이 아니었나 보군.”
다행이었다. 그녀가 보물 쪽지를 빨리 찾게 된다면 금방 놀이를 끝내고자 정원에서 나가버릴지도 몰랐다.
“두 분께서 함께 찾고 계시는군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으십니까?”
그가 구급상자를 들어 보였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해요. 아직 둘 다 다친 곳은 없어요.”
엘리제가 힐끗 돌아보며 대답하고 다시 꽃과 풀 사이로 부지런히 시선을 옮겼다.
“요 요망한 쪽지! 어디에 숨긴 거야?”
말하고 보니, 그 요망한 쪽지를 직접 숨긴 이가 바로 뒤에서 엘리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보물 쪽지가 아직이라면 두 분이 찾는 구획을 나누어 찾아보심이 어떠신지요.”
“그게 효율적이긴 하겠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자이드가 웃으며 조언하자, 미카일이 진심을 담아 고마워했다.
“하지만 저는 쪽지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
예상치 못한 난관에 자이드는 당황스러웠다. 곱게 접어 올린 눈 끝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사제님을 먼저 떼어내야겠는데, 좋은 수가 없을까? 잘생긴 왕태자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럼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저를 부르십시오. 행운을 빌겠습니다. 사제님, 엘리제 님.”
자이드가 다른 이들이 있는 쪽으로 이동하였다. 아마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겠지. 엘리제와 미카일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쪽지를 찾았다. 이제 정원의 작은 나무 숲이 끝나고 조금 더 앞은 더 깊은 숲이었다.
“이곳도 보물찾기 구간인 것 같지요?”
엘리제가 숲의 초입에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직 저희는 움직이면서 붉은 끈으로 쳐진 경계를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보물찾기가 이루어지는 구역을 붉은색 끈으로 빙 둘러놓았다고 했다. 아직 두 사람은 붉은색 끈이나 천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끈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너무 숲 깊이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엘리제는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미카일도 그녀를 따라다닐 뿐, 보물은 관심없었다. 오늘 참가의 목적은 그녀의 안전이니까.
“그럼 조금만 더 숲 쪽으로 들어가서 찾아보고 없으면 되돌아 나오는 것으로 할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미카일이 웃었다. 늘 그렇듯 선하고 따뜻한 미소로. *** 시간이 지날수록 보물찾기 참가자 중 풀과 나무에 긁힌 사람들이 생겼다. 자이드와 바튼이 구급상자를 들고 그들을 찾아 돕고 있었으나, 부상의 정도가 조금 큰 경우에는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자이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카일에게 향했다. 부상자가 보물찾기를 포기하고 상처치료를 원한다면 정원 밖으로 나가서 대기 중인 궁의에게 치료를 받으면 되었지만, 부상에도 불구하고 보물찾기를 계속하고 싶은 경우에는 간단한 처치가 필요했다.
“사제님,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자이드가 미카일과 엘리제의 곁으로 다시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미카일이 고개를 들어 안경 너머 투명한 눈으로 자이드를 바라보았다.
“발목을 다치신 분이 계신데, 보물찾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요. 잠시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자이드가 손을 뻗어 정원의 입구 쪽을 가리키자, 바튼이 두 손을 흔들며 여기라고 알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 주저앉은 귀족 영애 하나가 보였다. 발목을 접질려 꼼짝 못 하는 상황임에도 놀이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카일은 상황을 파악하고 엘리제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놔두고 잠시 다녀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
“제 걱정은 마시고 다녀오세요. 이 근처만 찾고 있을게요.”
엘리제가 미카일을 안심시켰다. 뼛속까지 착한 그가 아프고 다친 사람을 모르는 척 놔둘 리 없지. 마음이라도 편히 다녀오게 하는 것이 나았다.
“제가 잠시 엘리제 님 곁에 있어 드리지요.”
자이드 역시 안심하라는 듯 말했고 미카일의 투명한 눈이 잠시 그를 응시했다.
“그럼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
마음을 정한 그가 고개를 까딱하고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멀어지는 미카일을 한참 바라보던 자이드가 고개를 돌려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엘리제 님.”
다정히 부르는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황궁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십니까?”
“!”
보물 쪽지를 찾던 그녀의 고운 손이 순식간에 멈췄다.
***
‘황궁을 벗어나고 싶지 않냐고?’
엘리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자이드가 설마 뭘 알고 하는 질문인가?
‘물론 도망가고 싶지!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살기 위해 가장 먼저 달성해야 하는 1차 목표가 바로 황궁 탈출인 것을. 하지만 자신의 신분이 로안의 첩인 상태로는 도망간다 해도 생존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지?’
엘리제는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지난번 온실 때처럼 자신을 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로안에게 사주를 받아 자신의 마음을 떠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엘리제가 눈을 아래로 내리고 다시 보물찾기에 집중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곤란할 때는 모르쇠가 낫다.
“그러시군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엘리제 님께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영광이겠다며 자이드가 속삭였다. 원하던 대답은 못 들었지만, 그가 오늘 자리를 만든 목적이 달성되었으니 되었다. 황궁에는 눈과 귀가 많아서 어느 곳에서도 안심하고 엘리제에게 솔직한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항상 마가렛과 동행하였고 궁 안의 복도나 방, 자이드가 가는 모든 곳에 황제의 사람들이 있었다. 자이드가 오늘 보물찾기 이벤트를 준비한 이유는 궁 밖에서 엘리제와 단둘만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심중에 작은 돌 하나를 던져보기 위해. 기억을 잃고 황제를 거부하는 첩이라면 황궁을 나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원하게 된다면 황제와 거래를 하여 그녀를 얻고 시에델로 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자이드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아직은 엘리제가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면서 당장에 궁에서 나가고 싶다고 해도 좋았겠지만, 지금처럼 새침하게 모르는 척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엘리제의 마음을 돌리고 어떻게든 시에델로 데려갈 방법은 또 있을 테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에 만족했다. 그녀에게는 고생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으니.
“혹시 나중이라도 제가 필요하시면 꼭 말씀해주십시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이드가 말을 덧붙이자마자 부상자의 상처 치유를 끝낸 미카일이 때마침 다가왔다. 엘리제는 속으로 안도하였다.
“오셨어요?”
반가운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예. 두 분 모두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제 영광이었습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이드가 정중하게 인사하고 물러났다. 별일 없었는지 걱정된 미카일이 엘리제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엘리제 님, 괜찮으십니까? 혹시 힘드시면 무리하지 마십시오.”
“힘들긴요! 재밌어요. 게다가 오늘은 볕도 강하지 않아서 돌아다니기 딱 좋은 거 같은데요.”
엘리제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맑았던 하늘에 두꺼운 구름이 가득 몰려와 있었다.
“이런, 날씨가 흐려지고 있습니다.”
미카일이 어두워지는 구름 색을 보고 말했다.
“그만 돌아가실까요?”
“벌써요? 하지만 아직 보물은 한 개도 못 찾았는데요.”
두 사람이 함께 찾아서 벌써 쪽지를 8개나 찾았지만 죄다 꽝이었다.
‘괘씸한 왕태자! 꽝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다니!’
“그럼 딱 하나만 찾고 정원에서 나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곧 소나기가 올 것 같거든요.”
“알았어요. 딱 하나만요.”
엘리제의 움직임이 더욱 바빠졌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숲으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 데몬은 대공가를 출발하며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황궁이 있는 곳도 상황이 비슷하다면 곧 많은 양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질 것이었다. 점점 더 많은 양의 비구름이 황궁 쪽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으니까. 저런 먹구름은 센 소나기를 부른다.
“서둘러야겠구나.”
보물찾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엘리제가 흠뻑 젖게 될까 걱정이었다.
‘미카일이 곁에 있기는 하지만…….’
미카일은 우산 없이는 비를 막지 못한다. 치유력이 있지, 마력이 있지는 않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조금 전 하임에게 보고받은 내용 때문일까? 데몬의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랴.”
알 수 없는 불안함에 그가 더욱 빠르게 말을 달렸다. *** 쿠르릉, 쏴아아.
“소, 소나기다!”
우려했던 대로 소나기가 쏟아졌다.
“폐하, 비가 너무 많이 내립니다. 어서 정원 밖으로 피하시지요.”
공정성을 위하여 황제도, 황후도 시종 하나 없이 각자 보물찾기에 참가했던 터에 갑자기 거세게 쏟아지는 비에 속수무책이었다.
“그게 좋겠소.”
로안은 아쉽지만 프시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비가 순식간에 너무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외투를 벗어 자신과 프시케의 머리에 둘렀다.
“황후, 날 잡으시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정원의 입구가 보이고, 그 앞에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시종들이 보였다. 먹구름이 몰려올 때 이미 그들은 황제 부부를 위해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큰 우산을 들고 자신들을 걱정하며 바라보는 이들이 보이자 로안과 프시케는 안도했다.
“많이 젖긴 하였지만 바로 들어가서 말리면 괜찮을 것이오.”
로안이 프시케를 챙기며 말했다. 문제는 숲까지 들어간 이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움직여서 정원을 나와도 분명 온통 젖고, 흙까지 묻어 옷차림이 엉망이 될 것이었다. 하나, 둘씩 정원을 빠져나오고 그중에는 홀딱 젖은 자이드와 바튼도 있었다.
“두 분 폐하, 괜찮으십니까?”
“왕태자 전하, 이리로 오십시오!”
자이드가 정원에서 나오자마자 로안과 프시케를 걱정하자, 프시케가 그를 불렀다. 어서 시종을 시켜 자이드와 바튼도 비를 피하게 하고 큰 담요로 몸을 덮었다.
“제가 미처 날씨를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덕분에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소. 게다가.”
자이드가 미안한 듯 사과하자, 로안이 흠뻑 젖은 재킷 속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짐은, 보물도 이미 하나 찾았소만.”
하하하. 자이드와 로안이 유쾌하게 웃었다. 로안에게는 보물 쪽지에 집중하며 몸을 움직여 정원을 돌아다니는 일이 오랜만에 무척이나 즐거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저리 좋으실까.’
프시케도 그 모습에는 웃음이 났다. 비를 맞고 바삐 돌아오는 이들이 보였다.
“서둘러 안으로 드셔야 합니다, 폐하.”
시종들이 부지런히 그들을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프시케가 주변을 둘러보고 시종장을 불렀다. 그녀의 눈에 언뜻 정원 입구를 서성이는 사람 중 우산을 든 마가렛이 보이는 듯하였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참가자가 누구인지 파악해서 어서 비를 피할 수 있게 해드리게.”
“예, 황후 폐하.”
쏟아지는 빗소리를 뒤로하고 황제 부부와 왕태자 일행, 놀이의 참가자들은 우선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씻고 나와 몸을 말리는 황후에게 시종장이 찾아왔다.
“황후 폐하, 대부분의 참가자들께서 이미 황궁 안으로 비를 피하고 몸을 말리고 계시온데.”
그가 말을 다 마치기 전에 프시케가 시종장을 향해 급히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말로 들려서.
‘이런!’
아까 정원 입구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마가렛의 모습이 떠올라 불안함이 엄습했다.
“아직 미카일 사제님과 엘리제 님께서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