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황궁 정원 속 보물찾기2022.02.21.
로안과 프시케, 자이드가 앉은 테이블에 차와 과자가 차려졌다.
“지쳐계실 두 분을 위해 새로운 놀이를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함께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조금 전 앉았는데, 로안은 다시 벌떡 일어났다. 곧 감길 것 같던 벽안이 금세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짐이 지쳐 있는 것도 알고, 눈치 빠르게 새로운 놀이까지 준비해오다니! 정말 배려가 깊구나.’
“새로운 놀이라니, 그게 무엇이오?”
로안이 어서 듣고 싶다는 듯이 물었다.
“보물찾기입니다.”
“보물찾기?”
황제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이웃 나라의 왕태자가 준비했다는 놀이는 이름부터 로안의 마음에 쏙 들었다. 황제 역시도 화려하고 귀한 것을 좋아했으니까. 프시케는 사실 그런 취향은 아니었으나 지쳐 있는 로안을 위해 새로운 즐거움이 될 것이니 나쁘지 않다 생각되었다. 로안의 표정을 보니 이미 신이 나 보이기도 했고.
“황후, 어떻게 생각하시오?”
자리에 앉으며 로안이 프시케에게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허락하고 싶었으나 기도 의식 기간 중이니 눈치가 보여 지혜로운 황후의 의견을 묻는 모습이라도 보이고 싶었다.
“신성한 마음을 갖는 것에 지장을 주진 않을 것 같습니다. 놀이 방법을 조금 더 들어보지요.”
황후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자, 로안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황궁 정원이 제법 넓던데 곳곳에 쪽지를 숨겨서 정해진 시간 내에 찾는 것입니다.”
숨겨진 쪽지를 찾고, 그 쪽지에 쓰인 보물을 선물로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자이드가 설명을 덧붙이니 조금 더 프시케의 마음에 들었다. 보물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면 산책도 될 것이었다. 하지만 꽤 힘들 텐데?
“정원은 너무 넓지 않겠습니까? 한 바퀴 돌려고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릴 텐데요.”
“예. 그러니,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것은 어떻습니다. 장소는 정원 중에 일부로 제한하고요.”
황후와 왕태자의 대화를 듣고 로안이 답했다.
“여럿이 함께 참여하면 경쟁도 되고 좋겠군.”
그의 눈이 오랜만의 흥분으로 벌써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미 긍정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결투와 경쟁에서의 승리에 환호하는 것은, 그를 포함한 대부분의 지배 계층이 가진 공통점이었다.
“윤허하겠소.”
“감사합니다, 폐하.”
로안과 자이드가 서로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보물은 어떻게 준비하시려고요?”
프시케가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보물찾기의 승자에게 보물을 주어야 하니 상품이 필요했다. 자이드는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눈치였다.
“꼭 보물이 보석이나 귀중품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잘생긴 왕태자가 눈을 접어 웃었다. 분명히 매력적인 눈웃음이나, 프시케의 눈에는 마냥 순수한 미소로 보이지는 않았다.
“준비해두신 것이 있으신가요?”
“예. 몇 가지를 생각해 두었습니다. 찻잎부터 시작해서 조금 큰 선물까지도요.”
“경품까지 미리 정해놓으셨군요, 왕태자!”
로안이 감탄했다.
“저희 미로니카에서 가져온 선물들을 보물찾기의 경품으로 몇 개 내놓으려 합니다.”
“좋은 생각이오!”
대답을 들으니 꽤 만족스러워 이번에는 프시케도 고마움을 전했다.
“이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에델의 왕태자께서는 정말 사려 깊으시군요.”
왕태자가 좀 의뭉스러워 보이는 면은 있으나 그래도 로안에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폐하께서 저리 좋아하니 되었다.’
프시케도 마음을 내려놓고 찻잔을 들었다.
***
“내일 함께 보물찾기에 참여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십니다.”
오전에 온실에서 성화를 고르는 중이었던 나와 데몬, 미카일에게 황제의 시종 하나가 와서 명을 전했다.
“보물찾기요?”
갑자기 준비된 이벤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어릴 적 소풍 때 이후로 보물찾기는 정말 오랜만에 듣는 놀이였다.
‘이러다가 다음엔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 같은 거 하게 되는 거 아냐?’
로안과 지난번 침실에서 술래잡기를 하였고, 이번엔 보물찾기다. 이 소설 이대로 흘러가도 괜찮은 거야??
“대공 각하와 미카일 사제님도 함께 오시라 하셨습니다. 자이드 왕태자님도 오십니다.”
“…….”
“알겠습니다.”
데몬은 대답이 없었고, 미카일은 친절하게 답하며 웃었다. 이 무슨 일이지? 그렇다면 이야기 속 주요 인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생겼다.
‘불안한데. 주요 인물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사건이 생기고 그러는 거 아닐까?’
이번 보물찾기 때는 몸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 같다.
“내키지 않으시면 참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네.”
내 표정을 보더니 데몬이 다가와서 조그맣게 말해주었다.
‘와!’
나를 배려해 준 것도 고마웠고, 그런 다정한 말을 전해주는 그의 입술이 예뻐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어쩜 남자 입술이 저리 예쁘지? 저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대공가에 있을 때는 몇 번이나 내 입술과 겹쳐졌었던 것이 순식간에 떠올라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앗! 안 돼, 지금 생각나지 마!’
얼굴에 피가 확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셨습니다.”
“아, 아녜요. 내일 저도 참석할게요.”
내 대답을 듣고 나서야 데몬 역시 참석하겠다고 시종에게 전하였다. 세 명 모두 참석한다는 답변을 들은 시종이 만족스럽게 물러났다. 데몬 앞에서 그와 입맞춤한 일이 떠오르니, 더욱 심장 떨려 죽겠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주술을 풀기 위한 입맞춤이었는데도 왜 이렇게 아직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인지. 정말 내 가슴 주책이다. 시종이 나간 후 미카일이 분홍색 꽃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저는 기도 의식을 위해 먼저 자리를 비워도 될지요.”
“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사제님.”
미카일이 데몬에게도 눈으로 인사를 전하고 온실을 나갔다. 정리를 위해 데몬이 내 옆으로 와서 내가 골라둔 꽃들을 모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고른 꽃들까지 그에게 건넸다.
“어제 주신 파이는 정말 맛이 훌륭하였습니다. 혹시 직접 만드신 겁니까?”
꽃을 가득 들고 그가 물었다. 그렇게 예쁜 입술로, 꽃을 가득 들고 말하니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와!
“맛이…… 황홀했습니다.”
파이의 맛을 말한 것이겠지만, 내 귀에 음란마귀가 사는지 자꾸 다르게 들리고 해석되었다.
‘당신의 입술이 더 황홀했어요.’
말할 수 없는 나의 진심이 목 안으로 꼴깍 넘어갔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비법이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내 물음이 예상 밖이었는지 그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그 예쁜 입술이 다시 한번 열렸다.
“예. 부탁드립니다.”
아……. 그가 저 입술로 묻는다면, 나는. 파이 레시피가 아니라, 이 세계의 비밀을 알려 달래도 말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 다음날, 약속한 보물찾기 시간이 되었다. 나는 마가렛의 도움을 받아 움직이기 편한 드레스를 입었다. 오랜만에 편한 신을 신고 정원을 돌아다닐 생각에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라 꽤 들떴다. 늦은 오후부터는 두 분 폐하와 사제께서 기도를 올려야 하니, 보물찾기는 오전 시간으로 정해졌다. 이른 아침부터 보물찾기 준비를 위해 황궁의 시종들이 바빴고, 자이드 왕태자와 보좌관 바튼 역시 넓은 정원을 돌아다니며 준비한 쪽지들을 곳곳에 숨겼다고 했다. 모이라는 황궁의 정원 앞으로 나가자, 벌써 여러 귀족들이 도착해 있었다. 참가자들인 모양이었다. 내가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자이드가 인사하며 씨익 웃었다. 끄덕. 나는 고개만 까딱해주었다. 그의 눈웃음이 멋진 것은 사실이지만, 모임 때보니 그냥 모든 여성들에게 친절한 성격 같았다. 나는 나한테만 친절한 게 더 좋더라. 이윽고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황제가 황후와 함께 정원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기에, 나도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예법에 맞게 인사를 했다.
‘좀 야위신 것도 같고?’
기도 의식이 힘들다더니만 사실인 모양이었다. 로안의 얼굴이 반쪽이 되었네. 어쩐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처로워 보여서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는데, 때마침 내 곁에 미카일이 다가와 주었다.
“사제님, 어서 오세요!”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작게 외쳤다.
“네, 엘리제 님.”
호의로 가득 찬 미카일의 투명한 눈이 반짝이며 웃었다. 아, 정말 따뜻한 사람이구나.
“어? 그런데 대공 각하께서는요?”
두리번거리며 데몬을 찾는데 그 존재감 월등한 사람께서 안 보인다. 숨으려고 해도 잘 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분인데.
“밤사이 대공가에 급히 일이 생겨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금방 돌아올 것입니다.”
‘아, 데몬이 부탁하고 갔구나!’
자신이 없는 동안 미카일에게도 나를 잘 살펴달라 이야기를 전하고 간 모양이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황제와 황후의 인사말이 끝나고 보물찾기가 시작되려는지 자이드가 간단히 놀이를 설명했다.
“숨겨진 쪽지는 모두 100개입니다. 하지만, 그중에 진짜 선물이 적힌 쪽지는 20개뿐입니다.”
‘나머지 80개가 꽝이라는 말이잖아?’
이 넓은 황궁 정원을 뒤지고 다녀도 꽝을 찾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보물에 욕심이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고생해서 찾았는데 꽝이면 성질이 날 것 같았다.
“혹시 제가 찾는다면 엘리제 님께 모두 드리겠습니다.”
미카일이 작게 소곤대었다.
‘이 뼛속까지 착한 양반!’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저 보물찾기 잘할 자신 있어요. 우리도 선의의 경쟁 해요!”
내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미카일이 더 활짝 웃었다. 하얗게 만개한 히아신스 꽃이 연상되는 웃음이었다. 히아신스 꽃말이 겸손한 사랑이던가? 꽃말도 참 그와 잘 어울린다.
“보물찾기하는 구역의 경계를 붉은색 띠로 둘러놓았습니다. 붉은 띠 밖으로는 아무리 찾으셔도 쪽지가 없습니다.”
정원이 너무 넓으니 보물찾기 지역을 구분해 두었나 보다. 하긴 지난번 데몬을 만나러 몰래 정원 깊이 들어갔을 때는 그냥 하나의 숲이나 다름없었지.
“마지막으로 시종이나 가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간은 정오까지입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마가렛도 이 재미있는 놀이를 함께하면 좋겠지만, 놀이의 참가자가 귀족들로 정해져 있었다. 하긴, 안 그러면 황제가 황궁의 모든 시종을 풀어서 순식간에 100개를 모두 찾아버리겠지.
“엘리제 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정원의 입구에서 마가렛이 나를 배웅했다.
“응! 꼭 찾아서 돌아올게.”
마가렛에게 약속까지 했으니 빈손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럼 함께 가실까요?”
“네, 좋아요!”
미카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는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정원의 하늘이 눈부시게 맑은 가운데 하얀 구름 몇 개가 무리 지어 떠다니며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
‘소나기가 내릴 것 같은데…….’
정오까지는 한참이었다. 그사이 큰 구름이 더 몰려온다면 금세 먹구름이 될 수도 있었다. 자이드가 보물찾기의 규칙을 설명하는 동안 프시케는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떨어지면 서둘러서 돌아오는 것이 좋겠구나.’
너무 정원 깊이까지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시종도 없이 갑자기 내린 비에 모두 홀딱 젖게 될 테니까. 게다가 비가 오지 않더라도 남아 있는 보물의 쪽지가 몇 개인지 참가자들은 정원에서 나올 때까지 알 수가 없으니 자칫하면 정오 때까지 정원에 갇혀 있게 될 수도 있었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아야겠구나.’
판단을 마친 프시케 역시 로안과 함께 정원으로 들어섰다. 보물찾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동시에 빠르게 참가자들이 곳곳으로 흩어졌다. 풀숲 사이와 꽃밭 사이, 작은 덤불 사이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쏘옥 올라왔다 샥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찾았다!”
“벌써?”
참가자들이 웅성거리고 저 멀리 쪽지를 들고 환하게 웃는 남자가 보였다. 황실 창고의 관리를 맡고 있는 백작이었다. 프시케 근처에서 보물을 찾던 로안이 백작을 돌아보더니 더욱 승부욕에 불타올라 정원을 헤치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하아. 보물찾기가 아니라 아무래도 나는 오늘 로안찾기를 해야 할 것 같구나.’
혹시라도 생길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프시케는 로안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