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마성의 매력2022.02.14.
‘누구지? 설마?’
이번에도 자이드였다.
‘어째 왕태자께서는 방문 때마다 뭔가 목적이 있어 찾아오시는 것 같은 기분인데…….’
께름칙하지만 자꾸 오는 이유가 뭐냐 면전에 대고 따져 물을 수야 없지.
“왕태자님, 어쩐 일이세요?”
돌려서 물어볼 수는 있다. 그래봐야 솔직한 속내를 말해줄 리 없겠지만.
“엘리제 님과 친분을 쌓고 싶어 왔습니다.”
“예?”
‘어라? 이 양반 솔직하네? 이런 성격 아닌 것 같았는데?’
뭐지? 솔직하니 솔직한 대로 의심스럽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저러나 싶게.
“저 왕태자님.”
엘리제는 진지하게 자이드를 불렀다.
“예, 엘리제 님.”
“제가 황제 폐하의 첩인 것을 혹시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그래요?”
흐음. 엘리제가 가자미눈을 떴다.
“그렇게 의심스럽게 보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미로니카에 있는 동안 저는 다양한 경험과 넓은 인간관계를 쌓고 싶을 뿐이니까요.”
그가 자신의 주특기 눈웃음을 발사하였다.
“그래서 곧 기도 의식에 지쳐가실 폐하를 위해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 짧은 시일 내에 황제 폐하에 대해 잘도 파악했네. 벌써 폐하가 기도 의식에 지칠 거라는 걸 예상하다니.
“물어보실 거요? 황제 폐하가 뭘 좋아하시냐 같은 질문이면 저도 답해드릴 수가 없어요.”
‘모르니까. 진짜 엘리제라면 알 수도 있겠지만.’
아, 하나 알긴 안다. 하지만 엘리제 본인 입으로 “그분이 좋아하는 건 저예요.”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그런 질문이 아닙니다.”
“그럼요?”
자이드가 웃으며 초대장을 내밀었다.
“제가 작은 모임을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모임이요?”
손님이 황궁에 손님을 초대하겠다는 건가? 그의 발상부터가 대단하다 싶다.
“황제 폐하께는 벌써 허락받았습니다.”
그걸 허락해준 황제도 대단하다! 근데 지금이 모임을 열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시에델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아 이번 기회에 미로니카 귀족 몇 분과 친분을 쌓고 시에델을 소개도 하고 싶어 황제 폐하께 긴히 부탁을 드렸습니다.”
‘아! 시에델에 대해 궁금할 귀족들을 모아서 자이드와 친해질 기회를 쌓게 해준다는 거네?’
황제로서는 나쁠 게 없는 일이었다. 물론 연회장의 폭발로 인해 아직 분위기가 안정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알려진 것 없는 시에델에 대해 미로니카의 귀족들이 먼저 정보를 얻는다면 유리할 것이었다. 머지않아 시에델이 타국과 교류나 무역을 시작할 때, 미로니카가 재빠르게 거래를 선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자이드는 이것이 황제를 위한 일이라 말한 것인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께도 반가운 제안이었을 것입니다. 첫 모임이니 큰 가문의 영식이나 영애 예닐곱 명에게 보낼 초대장만 만들었습니다. 모임의 내용은 제가 정할 테니, 엘리제 님께서 장소와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황후 폐하께 허락받아서 준비해 달라는 말씀이시죠?”
엘리제가 용케도 자이드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의 눈이 흡족하게 위로 접혔다.
“네, 맞습니다.”
황궁에서 모임을 가져도 된다는 황제의 허락이 있었으니, 황후에게 허락을 받고 황실의 살림을 사용해야 했다. 자이드는 그 일을 엘리제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럼 첫 모임이 3일 후이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이드는 흡족하게 원하는 바를 달성하고 엘리제의 방을 나갔다. 이렇게 보니 자신에게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 정말 미로니카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다.
“황후 폐하께 찾아뵙고 싶다 말씀 올릴까요?”
“어. 부탁해, 마가렛.”
마가렛이 차를 잘 우리니 함께 준비하면 되겠지. 어쩌면 자이드 덕에 귀족 영애들의 달콤살벌한 티타임을 직접 관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 데몬은 오전에 엘리제가 꽃을 고르는 일을 돕고 배속 받은 방으로 돌아와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황제가 그에게 당분간 황궁에 머물러 달라 부탁하였으므로 대공을 위한 방에서 머물렀다. 그 방은 황제의 집무실과도 가까웠으며 황국이 시작된 이래, 대대로 크레미언가의 가주를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는 황제와 크레미언의 가주가 친밀한 사이였던 것처럼 방의 위치가 아주 가까웠다.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욕실에서 나온 데몬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휴우.”
‘그녀가 꽃인지, 꽃이 그녀인지 모를 지경이었지.’
장미 온실을 지날 때를 떠올렸다. 달콤한 장미 향이 가슴을 가득 채웠던 때를. 시원하고 달콤한 그녀의 향기와 장미 본연의 향기가 함께 어우러져 그의 이성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곱고 하얀 손으로 꽃가지들을 고르려 손을 내밀었을 때는 가시에 찔리기라도 할까 봐 가슴이 철렁했다.
“이것 좀 보세요! 정말 예뻐요!”
하얀 장미를 한 아름 안고 활짝 그녀가 웃을 때는, 멈춘 줄 알았던 그의 심장이 전쟁이라도 일으키듯 쿵쾅대었다. 그녀가 접었던 허리를 펴며 눈이 부신지 햇살을 가리려 손을 들어 올렸을 때, 이미 자신도 모르게 그녀 앞으로 성큼 가서 햇볕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혹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속으로 전전긍긍하면서. 그 모든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소가 계속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지천이었으나, 그의 눈에는 오직 그녀만이 들어왔다. 꽃보다도 아름다웠던 그녀의 미소만이.
‘어떻게 하면 그 미소를 지켜줄 수 있을까.’
그녀가 정령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도. 그러니 어서 그녀와 같은 힘을 가진 자를 만나서 어떻게 하면 그녀의 죽음을 피할 수 있을지 알아내야 했다.
‘이 모든 사실을 아직 그녀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군.’
자신의 운명이 곧 죽을 것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밝은 미소와 고운 얼굴에 그늘이 질까 염려되었다. 자신은 신분이 대공이라 황궁의 안위를 살피라는 명을 받아 당장은 움직일 수가 없다. 황제 부부의 백일기도 의식이 끝난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하임을 시켜 알아볼 수밖에. 그녀를 보지 못하면 걱정으로 바로 초조해지는 탓에 어찌 보면 황궁에 같이 있으며 지켜보는 지금이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또 다른 공격이나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조바심이 났으니. 게다가.
‘그녀가 황제의 첩인 것을 알면서도 접근하는 왕태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자이드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분명히 엘리제를 욕심내고 있었다.
“대공 각하, 전해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때 문 앞에서 시종 하나가 아뢰었다. 데몬이 하얀색 긴 가운을 집어 들어 조각 같은 몸을 가리고 허리띠를 묶었다.
“무슨 일이냐?”
데몬이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옷차림을 보고 귀빈실에서 심부름을 온 여자 시종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이드 왕태자 전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초대장?’
시기도, 보낸 이도 예상 밖이라 의아해하며 시종이 내미는 푸른색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오실 수 있는지 참석 여부를 물으셨습니다.”
「3일 후 황궁 응접실에서 귀하와 소중한 시간을 나누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의 모국 시에델에 대해 들려드리고 황국 이야기도 듣고 싶군요. - 왕태자 자이드 -」
‘시에델에 대해…….’
며칠 전 엘리제 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그의 붉은 눈이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그때 자이드는 시에델 왕가의 특별한 능력 덕분에 엘리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듯이 보였다. 그렇다면 혹시 시에델에 정령의 힘과 관계된 단서가 있지는 않을까.
“참가하겠다고 전해라.”
데몬의 답을 들은 시종이 붉어진 얼굴을 숙인 채 서둘러 그의 방을 나갔다. ***
“엘리제 님께 통할까요?”
귀빈실로 돌아와 3일 후에 열릴 모임을 준비 중인 자이드에게 바튼이 물었다.
“글쎄. 하지만 시도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겠지.”
자이드는 안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시에델에서는 이 방법이 늘 성공했지 않느냐.”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의 외모 자신감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랬지만 그곳은 시에델이었고, 또 엘리제 님은 이미 임자가 있으시잖습니까.”
그것도 무시무시한 권력을 가지신 임자요.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유부녀라고 내게 넘어오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네?”
바튼은 깜짝 놀랐다. 아니, 왕태자께서 그럼 시에델의 귀부인과도 사통한 적이 있단 말인가? 그것도 보좌관인 자신도 모르게??
“물론 내가 흔들리지 않아서 별일이야 없었지만, 귀부인들도 이미 내게 넘어왔었느니라.”
“그게 자랑스레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바튼의 투덜거림은 그저 배경 잡음처럼 오늘도 자이드의 귓등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두고 봐라. 엘리제 님께서도 모임 후에는 곧 내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니.”
자이드가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군!”
“무슨 소리야?”
데몬의 방으로 들어오는 미카일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었다.
“자네의 매력 말일세.”
내 뭐?
“방금 자네 방 앞에서 서둘러 나가는 시종을 마주쳤는데.”
“그런데?”
“그 시종의 얼굴이 무척 붉어져 있더군.”
“?”
데몬은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방에 들어와 보니 자네가 목욕 가운 차림이더라고.”
“그래서?”
“그래서라고?”
미카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보아도 자네에게 반한 모양새였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데몬이 말했다.
“실없는 소리.”
“…….”
미카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공가의 방 한 칸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양의 고백 편지를 받고도 단 하나도 열어보지도 않은 사람답다. 그에게 무얼 기대하겠는가. 때와 장소,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이성을 매료시키는 마성을 가졌으면서 정작 본인은 자신의 매력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니. 매력을 대놓고 자랑하는 거보다, 그게 더 무섭다.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
“데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삶은 신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야.”
“그런 말을 사제인 자네가 하니 설득력이 부족하군.”
“무슨 말인가. 나중에 외로워진 친우를 둘까 봐 노파심에 하는 말일세.”
데몬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미카일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심지어 우리 사제들도 신께서 허락하신 혼인 하에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자네가 혼자 쓸쓸히 살게 될까 봐 아무래도 걱정이네.”
“뭐라고?”
깜짝 놀란 표정을 보고 미카일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데몬은 자신의 연애 쪽으로는 무심하니까. 그리고 혼자도 상관없으니 괜찮다고 말하겠지.
“그래, 인정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자네는 은근히 감정에 과하게 신중하고, 가끔 보면 이성에게는 관심도 욕심도 없어 보여서…….”
“아니, 그거 말고.”
“응? 그거 때문에 놀란 거 아닌가?”
눈이 동그래진 미카일을 바라보며 데몬이 진지하게 물었다.
“자네, 결혼이 가능해?”
“…….”
한 문장 속에서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달랐구나.
“신성국의 사제에게 혼인은 합법이야.”
“!”
데몬은 처음 알게 된 사실에 깜짝 놀랐다. 좀처럼 놀라는 것이나 신기한 것이 없는 그였지만, 자신의 친우가 한평생 신만 모시고 살 줄 알았는데 평범하게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할 거라니 새삼 놀라웠다. 데몬의 커진 눈을 보고 미카일이 한마디 했다. 잊고 있었나 본데 이거 중요한 사실이라는 듯이.
“사제도 남자일세.”
그도 남자였다.
*** 황후는 흔쾌히 응접실 중 하나와 황궁의 식기들을 빌려주었다. 더불어 다양한 차와 간식까지 황궁의 파티시에들에게 준비해두라 일렀다. 덕분에 엘리제는 어렵지 않게 자이드를 도울 수 있었고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미로니카 내에서 유명한 가문의 영식과 영애 일곱 명이 초대되었고, 그중에 데몬도 있었다.
“하지만 아마 참석하지 않으시겠지?”
“대공 각하 말씀이시죠? 제 생각에도 아마…….”
아마도 올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일단 모임의 자리 자체가 크레미언가의 가주가 참석하기에는 너무 가벼웠고, 데몬의 성격상 이런 사교적인 모임을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다.
“후우. 각하도 안 계실 테니 더 걱정이네.”
엘리제가 된 이후로 이렇게 귀족들과 직접 만나는 자리는 처음이라 긴장이 되었다. 그가 있다면 아무 말 없이 있어만 주어도 든든할 텐데.
“설마, 황제의 첩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는 없겠지?”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요. 그럴 거예요. 저도 시중들며 방에 함께 있어 드릴게요.”
“고마워, 마가렛.”
먼저 모임 장소에 도착하여 테이블과 다과상을 준비를 마쳤다. 이제 앉아서 자이드와 다른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긴장이 되어 엘리제는 손끝을 매만졌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그 끝을 뜯고 있었나 보다.
“그러다 예쁜 손톱이 망가집니다.”
“!”
가슴 떨리게 그윽하고 매력적인 저음이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